10년 만에 고백하나니… 남편, 난 당신이 좋다
꿈에서 나는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결혼하려는 순간 남편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남편의 슬퍼하는 얼굴이 떠오른다. 후회가 밀려온다. 그런데 너무 늦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고 두렵다. 마음이 너무 괴롭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난다.
이런 꿈을 꿀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왜 이런 꿈을 꿀까. 남편을 정말로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불만이 많아서일까, 우리 둘 사이에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3개월 정도의 짧은 연애 기간. 남편과 나 사이엔 화끈하다고 할 것이 딱히 없었다. 서로 너무 나이가 들었을 때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했고, 두세 번 만나게 되니까 어린애들처럼 마냥 연애하듯 만날 수 없음을 알았고 결혼 상대자로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냥 모든 일이 순서처럼 흘러가 버렸다. 딱히 설레지는 않지만 딱히 맘에 안 드는 것도 아니고 좋은 사람인데 뜨겁진 않고, 헤어지긴 싫은. 남편은 내게 딱 ‘밥’ 같은 사람이었다. 매일 먹어도 새로울 게 없고 그렇다고 질리지도 않는 밥. 다른 맛난 것을 먹어도 밥이 아니면 안 먹은 것 같고, 밥 때문에 살면서도 특별히 고마워하지 않는… 그런 ‘밥’.
사람이 ‘밥맛’을 알게 되면 정말 어른이 된 거라고, 철이 든 거란 걸 이해하게 되었을 때가 결혼하고 10년쯤 흐른 다음이었다. 짧은 연애 끝에 결혼 후 바로 첫아이를 낳고,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아 기르는 동안 우리의 삶은 늘 눈앞에서 넘어가는 도미노를 막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너무나 예뻤지만 키우는 일은 힘들었다.
결혼 10년간 남편과 단둘의 시간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각자 회사와 집에서 일하고, 밤늦게 만나 밥 한 끼 먹으면 세 아이 씻기고, 치우고, 재우는 일로 하루가 다 갔다.
그 10년 동안 나는 남편에게 고마움보다 불만이 많았다. 주말이라도 애들과 놀아주었으면, 아들과 공도 차주고 자전거도 타주었으면, 학교생활도 물어봐 주고 이야기도 들려주었으면 하면서 원망을 했다. 그 세월 동안 남편은 내게 화가 나도 입을 꾹 다물곤 했다. 남편이 한 마디 하면 백열세 마디쯤 내뱉을 준비를 하고 있는 마누라에게 어쩌면 침묵만이 유일한 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우리 사이엔 이렇게 다른 점이 많을까, 남편과 통하는 것이 더 있었으면, 하다못해 남편이 책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이야기라도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속상해 했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언제나 내 창문으로만 남편을 보고 있었다. 남편이 내 창가로 와서 함께 바라봐주기만 원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부터 남편의 회사에 큰일이 생겨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새벽에 퇴근했고, 그다음 날도 출근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회사 일이 수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힘들어지는 남편의 삶이 문득 딱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여웠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지만, 정작 가족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부족한 삶. 새벽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는 것은 빨라야 밤 아홉 시 무렵. 남편에겐 그 저녁이 없다. 식구들과 함께 밥 먹으며 웃어보는 느긋한 저녁이. 주말엔 주 중의 모든 피로를 잠으로 풀고 싶어 하는 남편을 오랫동안 난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만 매달리는 세 아이가 힘들어서 남편의 잠을 오래오래 미워했다.
하지만 이젠 이해한다. 그런 남편을 이해하는 데 10년 걸렸다.
조금씩 주변에서 남편들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가끔 남편이 기침만 오래 해도 가슴이 철렁한다. 이따금 10년 넘도록 못 챙겨주는 아침밥이 맘에 걸리고, 늦게 와서 겨우 한술 먹는 저녁밥도 맘에 걸린다.
“여보… 난 당신이 좋아. 신혼 때보다도 지금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해. 아프지 마.”
며칠 전 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자 남편은 말없이 있다가 “말로만?” 하고 돌아누웠다. 좋으면서도 쑥스러웠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난 진심이었다.
연애할 때보다, 신혼 때보다, 지금 남편이 더 좋다. 어느새 밥의 진정한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이젠 그 어느 맛난 음식이 있어도 밥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꿈속에선 늘 떠나고 놓치고 다시 후회하는 남편이지만 지금 현실에선 난 이 남자를 꼭 붙들고 살고 싶다. 아주 오래오래 내 옆에 붙들어놓고 살고 싶다. 이제부터는 이 남자와 많이 친해지고 싶다. 더 많이 더 깊게 알아가고 싶다.
‘10년 만에 고백하나니… 남편, 난 당신이 좋다. 살아온 날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좋아한다. 그러니 오래오래 같이 살자. 싸우고 토라지더라도 손 내밀고 웃으면서 같이 늙어가자.
이제야 겨우 그걸 알아들었어!
위로는 구십이 되신 연로하신 부모님과 아래로는 막 이십 대에 접어든 아이들 사이에서, 때론 내 말을 저들이 못 알아들어서 또 때로는 저들의 말을 내가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묻고 설명하고 짜증 내고 엉뚱한 소리에 기가 막혀 웃고 혀를 차고 뒤늦게 알아듣고… 늘 소란하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적당히 짐작해서 대답하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콕 집어 지적한다.
“엄마, 제발 엄마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마음대로 해석 좀 하지 마!”
이럴 때면 작년에 본 연극 한 편이 떠오른다. <인물 실록 봉달수>. 여기 보청기로 시작해 큰 기업을 이룬 회장님이 계시다. 직원들 늘어세워 놓고 호통을 치는 일이 다반사. 그러던 어느 날 불같이 화를 내다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인생이 갑자기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한다. 대필 작가는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 있는 여자 작가. 불같은 기업 회장과 까칠한 여자 작가가 만났으니 그 싸움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 두 사람은 부딪치며 서서히 서로에게 적응해 간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기술을 배우며 죽어라 고생하던 청년기, 지금은 세상 떠나고 없는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봉달수 회장의 회고담이 이어지면서 무대와 객석은 하나가 돼서 울고 웃는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한 사람의 일생 또한 누구의 시선으로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외국에서 유학 중인 봉달수 회장의 외동딸이 귀국해 쏟아놓는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어머니를 때려 고막을 상하게 한 아버지처럼 봉달수 회장 역시 자기 방식으로 아내와 외동딸을 대했던 것. 한때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여기며 열렬히 사랑해 결혼까지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아마비 아내가 부끄러워졌고,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더 이상 다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대화나 소통이 아닌 풍족한 물질로 채워준다.
입만 다물어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닫아걸고 자기 안으로 숨어든 아내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봉달수 회장은 진정 아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러다 딸의 처절한 외침에 비로소 눈을 뜨고 귀를 열게 된다. 배가 고프더라도 글 쓰는 일을 하며 못다 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다는 딸. 아버지 방식대로 주는 사랑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싶었던 딸. 그 딸의 울부짖음을 통해 처음으로 아내의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
“이제야 겨우 그걸 알아들었어!”
회한에 찬 회장의 말.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회장은 자서전 집필을 중단하기로 하고, 작가는 또 진심을 다해 설득에 나선다. 그러면서 작가 역시 오래전 다른 작가의 작품을 표절했던, 자기 자신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진실과 대면하는 용기를 얻는다.
결과는 해피엔딩. 진실을 담은 자서전과 작가의 양심 고백은 큰 반향을 일으킨다. 남편의 폭력으로 듣지 못하게 된 어머니, 소리를 잘 듣게 해주는 보청기 사업, 그러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줄 몰랐던 회장, 이 연결 고리는 결국 우리들의 소통과 대화와 관계 맺음에 닿아 있다.
최근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일은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다. 고민을 꺼내놓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답을 가르쳐주지 못해 안달복달이다. 그것도 순전히 자기 경험에서 얻은 결론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그 고민을 드러내놓기까지 겪은, 겪고 있는 내 마음의 어려움과 불편함과 속상함에 대해서는 전혀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반성을 한다. 이제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맘대로 해석하지 않기로. 나이 먹어 말을 알아듣는 능력과 이해력이 떨어진 건 엄연한 사실. 그래도 노력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는가. 귀 기울이고 눈 맞추고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헤아려 읽으려는 노력이 없는데 세상일인들 제대로 보일까 싶다.
이제는 말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얘들아, 이제는 우리처럼만 살아라
지난 날 정말 힘들었던 한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1990년대의 10년 동안이 특히 그랬다. 지방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으로 사글셋방을 전전하고, 하루 세끼를 멀건 된장국으로 때울 때도 다반사였다. 그러다 정말 힘들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거야. 부모님께서는 왜 날 이 힘든 세상에 내보낸 거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실상 부모님께서는 내게 최선을 다하셨다. 그때 부모님께서는 오직 말없이, 내가 한 삶의 선택을 지지해 주셨을 따름이다.
1985년 2월의 시린 겨울 아침을 기억한다.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의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이 결정되고, 자취방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아버지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표정은 약간 들떠 있으셨다. 우리는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고 순천행 버스를 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순천 아랫장에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갖고 싶었던 책상 일습을 챙겨주려던 것이었다. 가구점 주인이 사람이 없어 배달을 못 한다고 해, 아버지와 나는 걸상을 책상 위에 올려 끈으로 묶은 후 책상 앞뒤의 좌우 귀퉁이를 잡고 가구점을 나섰다.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겨울 아침의 칼 추위는 여전했다. 삼십여 분을 걸어 자취방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속으로 ‘아버지!’ 하고 부르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보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는 참 지혜로운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실상은 ‘갑자기’가 아니겠지만) 그것을 들어주셨다. 마음속에 놀람과 감동이 아니 생길 리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결코 자식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놀게만 하지도 않으셨다. 쇠죽을 끓이거나 돼지 여물통을 채우게 하는 등 자잘한 일이라도 꼭 일손을 거들게 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하는 구석이 보이면 숨겨 두었던 엿이며 과자를 챙겨주시곤 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배신한다. 다음과 같은 한마디 말로.
“얘들아,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아버지께서는 평생 농군으로 사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자랑스러운 농부임을 결코 잊은 적이 없으셨다. 나는 열 살 전후부터 꼴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그렇게 다닐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일과 농부에 대한 당신의 자긍심을 내게 자랑스럽게 펼쳐 놓으셨다. 그렇다고 ‘나처럼 살아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당연히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씀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삶이란 성실하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렇게 다닐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일과 농부에 대한 당신의 자긍심을 내게 자랑스럽게 펼쳐 놓으셨다. 그렇다고 ‘나처럼 살아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당연히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씀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삶이란 성실하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재작년 여름 돌아가셨다. 그해 여름 가장 많은 비가 쏟아진 8월 9일이었다. 그 비만큼이나 눈물을 쏟아냈다. 내게 살과 뼈를 준, 내 마음과 정신을 날카로운 바늘침 같은 가르침으로 단련해 주신 당신이 그립다.
자식 앞에서, 그리고 세상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부모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에 임하고, 스스로를, 그리고 자식을 다른 이들과 견주지 않는 인생을 꾸려갔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우아하게 빛나는 삶을 자식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아직 어린 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부터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해본다. ‘얘들아, 우리처럼만 살아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