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준
푹신한 부드러움, 오믈렛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날 밤, 열한 시 반을 넘길 무렵이었다. 가게엔 손님 한 분만 남아 있었다. 오랜 단골이지만 나이도 이름도 직업도 알지 못하는 손님이었다. 대략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가게를 찾으면 늘 와인 한 병을 혼자 조용히 마시곤 했던 손님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셰프님, 메뉴판에 없는 요리도 해줄 수 있나요? 혹시 오믈렛을 해줄 수 있을까요?”
이미 주방은 마감할 시간이었지만 처음으로 건넨 부탁이었고, 그의 눈빛에서 간절함이 엿보여 흔쾌히 수락했다. 오믈렛은 무척 단순한 요리다. 달걀과 버터만 있으면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반면 ‘제대로’ 만들기는 어려운 요리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오믈렛을 만드는 걸 보고 요리사의 내공을 판단할 정도로, 탄탄한 기본기를 필요로 한다.
달걀을 푼 다음, 소금과 후추를 넣어 간한다. 부드러운 맛을 위해 생크림 약간 투척! 이제 기름을 두른 팬을 살짝 달군 뒤 소량의 버터를 넣고, 버터가 녹을 즈음 달걀을 붓는다. 약한 불에서 팬을 앞뒤로 흔들며 젓가락으로 잘 섞어주는 것이 포인트. 살짝 익었다 싶으면 팬 위쪽으로 달걀을 몰고, 팬을 잡은 손목을 박자에 맞춰 위아래로 탁탁 친다. 계란이 스르르 말리면서 자연스럽게 뒤집어진다. 이윽고 럭비공 모양으로 완성된 오믈렛을 접시에 담아 건네자 무척 고마워했다.
그는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아껴 먹었다. 음식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듯이 아주 천천히, 조금씩.
몇 주 뒤, 그가 다시 가게를 찾아왔다. 주방 마감 전의 짤막한 여유를 함께 즐기는데,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일전에 그가 떨어뜨려 놓고 간 사진이었다.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거기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교복을 입은 여학생도 함께 있었다. 사진을 받더니 한참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 사진 찾으려고 얼마나 동네방네 헤매고 다녔는지 몰라요.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지난번 여기 왔을 때 아내 기일이었어요. 그 사람이 암으로 떠난 게 5년 전이에요. 아내는 저랑 딸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천생 여자였고 아내였고 엄마였죠. 음식 솜씨가 좋아서 집밥밖에 모르는 제게 늘 도시락을 싸줬어요. 제가 일 욕심이 많아서 평소엔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진급 시험이다, 자격증 준비다, 해서 늘 밖에 나갔거든요. 집에서 혼자 살림하고 애 키우느라 고단했을 텐데 싫은 소리 한번을 한 적이 없어요. 늘 정성스레 도시락을 준비해줬는데 특히 오믈렛을 자주 해줬어요. 내가 달걀을 참 좋아하거든요.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그 늦은 시간에 오믈렛을 만들어주곤 했죠. 그냥 자면 속 쓰리다고…. 그때는 동료들 앞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게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자체가 귀찮아서 별로 반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배부른 투정이다 싶어요. 이제는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으니….”
그에게 오믈렛은 아내와의 소중한 추억이었고, 아내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온기였다. 홀로 오믈렛을 먹으며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뼛속까지 시려오는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음식이 지닌 소박하지만 위대한 힘을 나는 이런 순간에 느끼곤 한다. 누군가에겐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 혹은 마음을 전하는 선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떠나고 딸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아내한테 못 해준 몫까지 딸아이한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죠. 혼자 집에 있을 녀석이 걱정돼 야근도 절대 안 했어요. 주말은 무조건 아이와 함께 지내죠. 집사람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요새 딸아이가 요리 학원에 다니는데 아빠가 좋아한다고 오믈렛을 배워 와서는 거의 매일 해줘요. 솔직히 평가해서 맛있는 편은 아니지만 묘하게 아내가 해줬던 그 맛이 나긴 합니다.”
얼마 전에 딸이 교제하는 남자가 있다고 하기에, 혹시나 못난 아비 밑에서 커서 음식 못한다고 구박받을까 봐 덜컥 겁이 나서 냉큼 요리 학원부터 등록시켰다는 그의 말에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혹시나 딸에게 채워주지 못하고 알려주지 못한 것은 없는지 전전긍긍하던 시간들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1년 가까이 셰프와 손님으로 만나면서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항상 어렵게 느껴지던 그가 그날은 마치 내 아버지처럼 가깝고 편안했다.
나를 키운 세 가지 밥상
내가 살던 곳은 읍내에서 더 깊이 들어간 시골, 하루에 버스가 세 번만 다니던 산골이었다. 동네에 텔레비전이 딱 두 대 있었는데 그중 한 대가 우리 집에 있었다. 저녁마다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토방으로 모여들었다. ‘개구리 왕눈이’부터 ‘타잔’ ‘김일 레슬링’ ‘전설의 고향’ ‘수사반장’을 봤다. 텔레비전을 본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감격하던 때였다.
한여름에는, 우리 집에서 걸으면 1시간 거리에 있는 교회에서, 담벼락에다 영화를 쏘아서 보여주곤 했다. 긴긴 해가 떨어진 뒤에야 볼 수 있던 영화는 밤 10시 넘어 끝났다. 열 살도 안 먹은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하품을 쩍쩍 했고, 눈가가 젖은 김에 울며불며 걸었다. 징징거리는 소리를 싫어했던 언니도 그때만은 야박하게 굴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는 삼십 대 초반이던 우리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모기가 사정없이 물어뜯는 정지(부엌)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여 밥상을 차려놓은 뒤였다. 밥보자기를 들추면, 보리나 콩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보드라운 밥이 있었다.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먹으면, 엄마는 “오메, 내 가시내!” 하고 내 엉덩이를 토닥였다.
내 생일은 음력 9월 16일, 엄마는 꼭 쌀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팥을 듬뿍 넣은 시루떡을 해서 옆집, 건넛집까지 돌렸다. 엄마는 냇가에서 시루를 닦으며 “내 지영이는 아조 먹을 복을 타고난 사람이제이. 가을걷이 다 끝나고 생일 닥친 게 얼마나 좋은가이?” 하면서 해맑게 웃었다. 그렇지만 나를 따라다니던 별명은 ‘갈비씨’, 입이 짧았다.
내 먹을 복은 결혼으로 증명되었다. 남편과 나는 4년이면 졸업하는 대학을 몇 년씩 더 다니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즈그 살림하고 살면 철들겠지” 하는 마음으로, 학교 마치기 전에 혼인시켰다. 갑작스러운 결혼이라 집이 없어서 한 달간 시댁에서 살았다. 시부모님이 아침에 차려주신 밥 먹고 나왔다가 저녁이면 다시 차려주신 밥을 먹고 잤다.
큰애를 낳았을 때도 산바라지는 시부모님이 해주셨다. 어머니는 하루에 다섯 번씩 새 밥과 새 국을 끓이셨고, 아버지는 회복이 빠르라고 손수 가물치를 잡아다 주셨다. 처음 시부모님 댁에 갔을 때 부엌에 계시던 아버지가 “야, 야, 우리는 이렇게 산다” 하며 환하게 웃으셨던 얼굴 그대로, 우리가 아무 때고 시댁에 가도 꼭 밥상을 차려주셨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눈에 띄게 기력이 떨어지셨다. 뒤이어 대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와서도 어머니 밥상을 차리셨다.
밥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남편은 처음부터 시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부엌에 서는 게 자연스러웠다. 조신한 솜씨를 가진 그가 밥상을 차렸고, “내일 아침에 뭐 해 먹지?”도 그의 고민이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빠가 차리는 밥, 아빠가 싸 주는 소풍 김밥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란다.
나는 두 달 동안 남편 밥을 끊은 적이 있다. 큰애와 열 살 터울로 임신한 둘째는 7개월째에 나오려고 했다. 아기의 건강은 알 수 없는 채로, 주사만 맞으며 대학 병원에서 누워 지냈다. 그게 그거 같았던, 집에서 보내던 일상이 가장 그리웠다. 처자식을 사육하듯, 부엌에서 음식을 하던 남편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식구끼리 평범하게 둘러앉아 밥 먹고 싶었다.
애태우고 태어난 꽃차남(^^)은 건강했다. 산후 조리 아주머니가 있어도,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흰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내가 어릴 때 교회 영화를 보고, 먼 밤길을 걸어와서 먹던 엄마 밥보다 더 맛있는 남편의 밥. 살아가는 일을 기쁘게 만드는 그 밥은, 먹는 대로 아기 젖이 되었다. 아기는 빈약한 엄마 가슴에서 나온 젖만 먹고도 매혹적인 우량아가 되었다.
나도 밥 속에 들어가는 공력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남편이 자정 넘어 퇴근해서 새벽에 나가는 생활을 할 때는 확실하게 그의 밥 걱정을 덜어주었다. 내가 겁먹지 않고 할 수 있는 반찬을 찾아 식단표를 짜서 그대로 했다. 달랑 반찬 한두 가지인 밥상에 실망한 아이들은 “에이, 이게 뭐야?” 했지만, 배고플 때까지 최대한 기다리면, 달려와서 달게 먹었다.
남편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날부터 밥상은 달라진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오이소박이를 담근다. ‘육해공’ 음식을 총출동시켜 접시마다 정갈하게 음식을 담는다. 애들은 놀거나 책 읽으면서도,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으로 와서 이것저것 집어 먹고, 다시 거실로 간다. 현실적으로 치울 일이 걱정인 나는 남편에게 묻는다.
“여보, 음식을 왜 항상 이렇게 많이 해?” “각시랑 애들 먹고 나면, 나 먹을 게 없잖아.”
남편이 차린 밥을 먹고 산 지 십 수 년, 훈훈함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병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병을 달고 와 버렸다. 중학생인 큰애는 아침에 입고 나간 바지가 저녁이면 짧아져서 돌아온다는 폭풍 성장의 기미조차 없어서 반에서는 두 번째로 작다. 그러나 남편은 개의치 않고, 밥을 한다. 우리 식구는 오늘도 최고의 밥을 먹는다.
내가 키운 채소 먹으니,
콜라는 멀어지고
‘치~ 익!’ 이 소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이다. 콜라 캔을 딸 때 치~익 하고 나는 소리를 들으면 짜릿짜릿한 탄산과 달콤한 콜라 맛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 우리 아빠도 나처럼 콜라를 좋아하신다. 덕분에 동글동글 불룩 나온 배도 닮았다.
아빠와 다르게 날씬한 엄마는 얼마 전부터 동네 분들과 텃밭을 일구기 시작했다며 바쁘셨다. 그리고 며칠 후 대학생 형들과 함께하는 텃밭이 있다면서 같이 가보자고 하셨다. 4학년 때 지렁이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는 실험을 해서 상을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농사짓기도 궁금했기 때문에 바로 토요일부터 함께 따라다녔다.
처음엔 땅에는 무엇이든 심기만 하면 자라는 줄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전에 먼저 흙을 살리고 우리 토종 씨앗을 심어 천연 비료인 오줌 액비를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노래에서만 듣던 신토불이가 그냥 우리나라 것이라서 우리 몸에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자란 농작물이라도 화학 비료를 주고 농약을 뿌린 작물은 오히려 몸에 해롭다. 그런데 내가 음식을 먹고 싼 오줌으로 퇴비를 만들어 다시 밭에 뿌려주면 그 밭에서 난 작물들이 내게 필요한 면역 인자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 작물을 먹었을 때 내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내가 열심히 오줌을 모으는 가장 큰 이유다.
처음 밭에 뿌린 씨앗은 상추였다. 몇 주가 지나자 싹이 생기고 6주가 지나자 상추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처음으로 내가 키운 상추를 먹게 되었다.
농약이 안 들어 있으니 믿음이 가고 몸에도 좋은 것 같고 왠지 더 맛있었다. 상추는 따도 따도 계속 자라니까 먹는 게 아깝지가 않았다. 오히려 생명의 신기함이 느껴졌다.
상추를 키우면서 집에 있는 텃밭에 고추, 콜라비, 방울토마토를 키우고 집 안에서는 새싹 채소도 키워서 먹게 되었다. 아무래도 화학 비료를 안 주니까 먹을 수 있는 새싹 채소 양이 작은 접시 하나도 안 될 때도 있지만 가족들이 맛있게 함께 먹으니까 좋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수확한 채소들로 고기를 싸 드시면서 아들 덕을 톡톡히 본다고 하셔서 어깨가 으쓱했다.
가을에는 배추를 심었는데 얼마 전에 그 배추로 김장을 했다. 우리가 힘들게 키운 농산물이 잘 자라줘서 독거노인처럼 어려운 분들에게 나눠주게 되니 보람차고 뿌듯했다.
그동안 내 식성도 많이 바뀌었다. 밥을 먹을 때도 짜릿한 맛에 콜라를 함께 마셨는데 집에서도 새싹 채소와 쌈 채소를 키워 매일매일 먹을 수 있게 되니까 채소들이 더 좋아지고 내가 키운 쌈 채소를 자랑하다 보니 콜라도 점점 멀어져 갔다.
또 나는 건강에는 좋지만 맛은 별로 없는 해산물을 싫어했었다. 대표적으로 멸치와 다시마가 있다. 몸에 좋다고 해도 흐물흐물 씹는 맛이 기분이 안 좋아서 편식했는데 내가 키운 채소랑 섞어서 쌈을 싸 먹으니까 더 맛있다고 느껴졌다.
학교에서 급식 먹을 때 맛없는 반찬이 나와도 이걸 키우는 데 많은 자원이 드는 걸 알기 때문에 남기지 않는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실제로 며칠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냥 버리는 게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내가 오줌 액비를 만든다고 하면 신기해하기도 하지만 ‘에이, 더러워’ 하는 친구도 많은데 그런 친구들에게 토종 종자를 잘 키워서 나눠주고 싶다. 식물들은 우리가 잎을 딴다고 해서 화내거나 반항하지 않고 평화롭게 사람 입으로 들어가 준다. 그리고 그런 약한 식물들이 우리 몸을 튼튼하게 해준다. 우리가 약한 식물을 키우다 보면 친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생기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햄버거 피자 햄 같은 가공식품을 예전처럼 많이 먹지 않는다. 앞으로도 고기는 쪼금 들어가고 채소는 많이 들어간 건강한 밥상을 먹고 싶다. 그리고 내가 키운 농산물이 어려운 사람들의 반찬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을 하면서 우리 농산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