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이십사 시
사십 년 가까이 교직에서 종사하다 퇴임한 지 올해로 7년이 되어간다. 정말 거짓말처럼 세월이 빨리 지나갔다. 오늘 손가락을 꼽아보고 새삼 놀랐다.
지난해 서울로 시집간 딸이 바로 곁으로 이사를 왔다. 시집가기 전에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더니 둘째 아기를 갖고는 출산 한 달 전에 이사를 왔다. 나도 내가 아기들을 보게 될 줄 몰랐다. 애기 보느라 동창회 못 나온다거나 발이 묶였다는 친구들 보면 딱하게 여기던 나였다. 그런데 나이에 따라 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자식이 출가해서 아기를 낳는 일도 요즘 드문 일이라 이것도 큰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벽 다섯 시 반. 머리맡 핸드폰의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기상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올빼미형이 바로 나였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공원 맞은편에 있는 딸의 집으로 간다. 여섯 시. 사위와 딸이 출근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 삶이 고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이들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 이리 부지런한겨?
손자는 다섯 살이고 손녀는 16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두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두 손 벌려 달려든다. 서로 다툰다. 두 돌도 안 된 녀석이 뭘 안다고 이만저만 샘을 내는 게 아니다. 무어든 오빠 하는 대로 하려고 하니 뺏고 빼앗기고 울고 야단이다. 오빠가 양보를 잘하고 동생을 너무 예뻐하니 동생은 점점 버릇이 나빠진다.
손녀에게 우유를 200ml 타서 먹이고 손자는 홍이장군을 먹는다. 어느새 손자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보는 사람이 따로 없으니 나도 온몸을 흔들어가며 아침 체조 겸 춤을 춘다. 다시 할머니를 위해 허리를 튼튼히 하는 운동 시범을 보인다. 따라하다 보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 후 동화책을 다섯 권 이상 읽어주어야 한다. 둘이 서로 자기 책을 읽어달라고 싸워 매양 힘들다.
드디어 아침 식사 시간. 뜨거운 밥에 계란을 깨어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비벼준다. 다음엔 세수하기. 둘이 똑같이 같이 하려고 나란히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히기도 전에 둘이 다 똥을 싼다. 손자는 화장실에서 손녀는 기저귀에 한바탕 황금덩이를 쏟아 놓는다. 그 똥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이제는 어린이집에 갈 시간이 다가온다. 손녀는 5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손자는 15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숲 속 오솔길을 걸어서 간다.
홀로 돌아오는 길, 앞산으로 가거나 커다란 모래 운동장으로 간다. 마침 아침 햇볕이 운동장을 반쯤 차지하고 있다. 열심히 걷는다. 다섯 바퀴 이상 걷는다. 그리고 둘레에 설치해놓은 운동 기구에 매달려 이십 분 정도 논다. 퇴임 후 병원에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그걸 좀 모면해 보려고 하는 일과다. 집에 돌아와 신문을 본다.
12시가 넘으면 점심 식사를 한다. 점심을 먹고 베란다에서 놀고 있는 화초들을 돌아보고 잠시 누워 쉰다. 벌써 두 시 반이다. 배달된 월간지를 보아야 하고 컴퓨터의 메일을 뒤져 답을 써야 한다. 안 그런 날은 친구와 점심 식사를 한다. 늦어도 네 시에는 집에 돌아와야 한다. 네 시! 손자를 찾아 가지고 손잡고 걸어가며 하루의 일과를 묻고 답하고 한다.
오는 도중에 벤치에 앉아 우유나 두유를 마실 때도 있다. 애들과 나는 똑같이 그런 단백질 음식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자라느라 먹고 나는 사라져가는 근육 세포를 보충하기 위해 먹는다. 어느새 쌓인 낙엽에 발을 묻어가며 걷는다. 손자와 나의 정서가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집 앞에서 손녀를 찾아 함께 돌아온다. 다섯 시다. 에미가 올 시간이 한 시간 남았다. 병원 일이 끝나면 쏜살같이 달려오는데도 한 시간이 걸린다. 현관 벨이 울리면 무릎에 앉아 책을 읽던 손녀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현관으로 간다. 신발도 제대로 벗어놓지 못하고 아이들을 업고 안고 서성이는 어미를 보면 젊은 시절 내 모습을 바로 보는 것 같다.
아이들과 뽀뽀를 나누고 돌아온다. 벌써 어둠이 깔렸다. 6시 반에 며느리가 마련한 저녁 식탁에 둘러앉는다. 가장 맛있게 먹는 시간이다. 두 손자가 커가면서 음식도 푸짐해지고 종류도 다양해진다. 식사 후에 다시 나간다. 집 앞마당을 오락가락 다섯 번 정도, 심호흡을 하고 들어온다. 여덟 시가 넘어 아홉 시를 향해 간다.
부지런히 온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그동안에 온 메일에 답장을 쓰고 운 좋은 날은 내가 쓴 시를 보내준다. 그냥 정보 메일을 전달했을 때는 답이 오지 않지만 내가 쓴 글을 보내주면 여기저기서 즉석 답신이 온다. 나도 신이 난다. 11시까지는 잠이 들어야 한다는데 늘 넘기게 된다.
나의 24시는 이렇게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잘못하면 백수가 과로사하는 수가 있겠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공원을 산책하고 걷고 운동 기구와 친해지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 어려움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고 즐기게 하심에 감사하다. 손자 손녀와 함께하는 나의 이십사 시. 뒤늦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건강을 주십사 기원해본다.
만화가의 꿈, 마침내 이루다
어릴 적 내 꿈은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마흔 중반인 지금 떠올려봐도 기억이 닿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원래 그림을 그리셨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 여백은 온통 낙서로 덮여 있었고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 그림은 내 삶의 전부였고 반드시 만화가가 되리라 마음먹었었다.
고교 진학을 앞둔 어느 날, 당연히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리라던 내 소망과 달리 아버지께서는 반대를 하셨다. “그림은 안 된다, 기술을 배워라.” 당신은 7남매의 장남으로 그림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든 분이셨다. 아버지가 무서워 고집을 피울 엄두도 못 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터라 원하지 않는 학교로 진학을 했다. 고교 시절은 암울했다.
미대를 가려고 입시 미술을 준비했지만 학력이 약해 고배를 마셨다. 사춘기 시절에 끝냈을 법한 방황은 이십 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여전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정확히 1년 후 모아둔 그림들을 챙겨 들고 서울로 향했다. 당시 목표로 정한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하숙집을 구하고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가 모여 있는 충무로 일대를 무작정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취직이 되었고 서울에서의 그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근무 조건은 열악했다. 월급으로 하숙비 내고 적금 십만 원을 붓고 나면 딱 십만 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지하철비와 점심값을 해결했다. 주문받은 그림을 기한 내에 그려내려면 일주일에 사나흘 밤새는 건 예사였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지만 행복했다. 기억에 남는 건 당시 대전 엑스포 공원을 소개하는 그림을 그렸을 때다. 정말 뿌듯하고 보람찼다.
서울 생활 만 2년째 접어들 무렵 아버지께서 크게 다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내 앞가림조차 버거웠던 터라 부모님께 생활비는 고사하고 용돈조차 드리지 못했는데….
장남이자 하나뿐인 아들로서의 선택. 다시 고향 부산으로 내려와 난생처음 조선소라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좁디좁은 배의 구석구석을 기어 다니며 녹을 벗겨내고 페인트를 칠했다. 퇴근 무렵이면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는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다 1994년 초, 우리나라 조선소 가운데 1, 2위를 다투는 큰 회사에서 생산직 사원 공개 채용이 있었다. 고교 시절 전기과를 나온 터라 면접과 실기 테스트를 거쳐 무난히 합격이 되었다. 안정된 직장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수입이 생기면서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사내 미술 동호회에 들어가 그림도 다시 시작했다. 당시 회사에는 개선 제안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그림이 필수였다. 자연히 동료들의 제안서는 내 앞에 쌓였고 소속 부서의 제안 양식에 들어갈 그림을 원 없이 그리게 되었다. 안전 담당 부서에서 전사에 부착할 안전 표지판 원고 작업을 하면서 사내에서 꽤 알려지게 되었다.
입사하고 12년이 흐른 2006년 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회사 홍보팀이었다. 사내 신문 기자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2013년 현재 나는 홍보팀 근무 8년 차에 접어들었고 디자인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 또 회사 신문에 만평과 숨은그림찾기도 연재하고 있다. 2007년 방송대학교에 편입하면서 야간 대학을 나와 모자랐던 공부도 이어갔다. 3년간 방송대 신문에 시사만평을 연재한 것을 계기로 지역 언론사와 잡지사, 관공서 등에 만평과 숨은그림찾기를 고정 연재하게 됐다.
퇴근 후 집에서조차 그림을 그리게 되니 버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인생은 분명 복 받은 삶이다.
사십 대 중반 내 꿈은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퇴직 후에도 시사만평을 그리며 세상을 관조하고, 숨은그림찾기를 그려 이웃과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다.
나에게는 중학교 3학년 쌍둥이 딸들이 있다. 그중 한 아이가 그림을 곧잘 그린다. 대물림일까? 하지만 아이는 아직 꿈이 명확하지는 않은 듯 보인다.
“아빠는 한때 꿈이 좌절되는 듯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했더니 이루어지더라.” “네가 재미있고 정말 잘하는 게 뭔지 찾아볼래? 그것이 너를 행복하게 만든단다.”
가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긋났던 꿈의 퍼즐을 다시 맞추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
‘차근차근 미술 수업을 받고, 근사한 작가가 되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세상을 그리고….’
현실은 좌절이었지만, 그 좌절을 통해 정말 하고 싶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게 된 지금, 지난 삶이야말로 나를 단련시켜 준 시기였기에 후회는 없다. 훗날, 하루 24시간을 꽉 채우며 살아온 삶에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게 되리라.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내가 처음 양봉을 시작한 것은 1974년 3월이었다. 매년 꿀을 따기 위해 벌통을 차에 싣고 전국 방방곡곡 밀원(꽃)이 많은 곳을 찾아 누빈다. 매년 520만(한 통당 8만 마리가 들어 있는 65개 벌통) 벌떼를 이끄는 꿀벌 총사령관인 셈이다. 4월에는 유채꽃이 피는 부안으로 가서 유채꿀과 꽃가루를 채취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국을 다니며 아카시아꿀, 밤꿀, 들깨꿀 등을 채취한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말도 있듯이 꿀벌은 나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하다. 또한 정직하며 공짜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나기처럼 세찬 비가 아니면 이슬비가 와도 일하러 나간다. 벌집에 꿀이 차 있어도 꽃에서 꿀이 나오면 어두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한창 유밀기에는 어두워서 날지 못할 때까지 일을 하고, 그 이튿날 돌아오는 꿀벌도 있다. 꿀 1kg을 생산하기 위해 꿀벌 한 마리는 560만 개의 꽃을 찾아다닌다. 이 꽃 저 꽃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꿀과 꽃가루를 모은다.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란다.
자기가 맡은 일을 남한테 미루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목숨 걸고 일하는 꿀벌들을 보노라면 고개가 숙여진다.
일명 ‘꿀 아저씨’라 불리며, 꿀벌과 함께해온 지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런 꿀벌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듯이 새벽부터 준비하고, 아침 일찍 채밀(꿀 따는 일)을 마쳐야 한다. 그래야 꿀의 품질도 좋고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는 꿀벌들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낮에도 쉴 틈이 없다. 다음에 갈 지역을 미리 답사해서 벌통 놓을 장소를 섭외하거나, 아침, 저녁으로 벌통 안의 꿀벌 상태를 살피다 보면 하루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간다. 하지만 힘들어도 꿀벌들이 모아온 꿀을 따는 날은 그야말로 잔칫날이고 또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하다.
양봉인으로 살아오며 제일 힘들 때는 정성껏 천연 벌꿀을 생산하고 있는데도, 가짜 꿀이라는 오해를 받을 때였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들에서도 언제나 말없이 때가 되면 묵묵히 부지런히 꿀을 모아주는 꿀벌들이 나를 더욱 채찍질해주었다.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컴퓨터 공부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컴퓨터를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지만, 부지런히 공부하다 보니 블로그도 운영할 정도로 실력을 쌓게 되었다. 이곳에서 소비자들과 소통하면서, 정직하게 생산한 우리 꿀을 인정해주실 때면 보람을 느낀다. 바쁜 꿀벌은 오직 꿀을 딸 뿐 슬퍼할 시간도 주저앉을 시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