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내 곁에 있어줘~’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면,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하는 참 행복한 당신입니다.

자비원 아이들아,

너희 생각하며 끝까지 달릴게

이형모 35세. 직장인, 아마추어 자전거 레이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내 곁에는 항상 내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아이들이 있다. 강릉자비원의 아이들이다. 자비원은 부모가 돌보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이 자립해서 클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 곳인데, 10여 년 전 자비원 출신 후배를 만나면서 이곳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처음 만난 건 작년 4월이었다. 당시 나는 그해 6월에 있을 미국 대륙 횡단레이스(램, RAAM) 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9일 안에 자전거로 달리는 세계에서 가장 힘든 사이클 경주 대회.

그런데 대회를 앞두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가 났다. 2인 팀으로 함께 나가기로 한 파트너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대로는 힘들 것 같았다. 그때 우리가 힘을 내기 위해서 해보자 한 것이, 우리의 도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램에 도전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뜻있는 사람들의 후원금을 모아, 사회봉사 단체에 도움을 주자는 것. 후원금은 우리가 달린 거리만큼 마일리지를 적립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후원자가, 1킬로미터당 1원씩 후원하겠다 하면 우리가 약 5,000킬로미터의 레이스를 완주할 시 5천 원의 후원금을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인 후원금으로 도와주기로 한 단체 중 하나가 강릉자비원이었다.

자비원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안기며 손을 잡았다. 어떻게 보면 정에 굶주려 있나 싶기도 하고, 또 어린 나이에 상처를 안고 살아왔을 친구들인데 밝은 모습에 놀랐다. 그러면서 마음 한 켠이 따듯해져왔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꼭 완주해서, 얼마나 너희들을 생각하며 달렸는지 보여줄게” 약속했다. 그러니 더 힘이 나고 용기가 생겼다.

드디어 대회. 경쟁은 치열했고, 우리는 처음부터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야만 했다. 사막을 지나고 로키산맥을 넘었다. 그런데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5일째가 되던 날 파트너의 교통사고로 자전거는 부서지고 파트너는 입원을 해야 했다. 정말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이 생각났다.

너희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달리겠다던 약속. 결국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8일 1시간 15분이라는 기록으로 대륙 횡단을 마쳤고, 2인 팀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첫 출전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거둔 것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경기를 지켜본 후원자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다며,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강릉으로 아이들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지난번처럼 다가와서 안기고 손을 잡아주었다. 너무나 따듯했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Une soiree inoubliable(잊을 수 없는 밤)>

43.5×54cm, Serigraph on paper.

 

그 경험이 너무 소중했기에 그러한 후원을 이어가기로 했다. 올해 초부터 아침 한 시간씩 자전거 운동 모임을 운영하는데, 자발적으로 회원들의 기부금을 받는다. 운동에 참여한 날, 돼지 저금통에 1천 원 이하의 기부금을 내는 것이다.

제법 모아진 금액을 전달해주기 위해 지난 8월에는 또 한 번 서울에서 강릉까지 기부라이딩 행사를 개최했다. 아이들을 보니 정말 힘이 났다. 갓난아이가 크기도 했고, 청소년 아이들은 금세 알아보며 좋아했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자전거 대회 중 하나에 참가할 때였다. 생각지도 않게 자비원 아이들이 ‘이형모 선수 파이팅’이라는 응원 문구를 써서 온 것이 아닌가. 이런 플래카드는 처음이었다. 뭉클했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 등 산을 좋아하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왔다.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 속에서, 도전을 이루고 좋은 성적을 거두면 기뻤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 승부를 위해서만 달려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내 명함에는 세잎클로버가 그려져 있다. 행운이 아닌 ‘행복’을 잊지 말자는 의미이다. 내년에는 자비원 아이들과 꼭 함께 자전거 레이스에 참가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힘들게 오르막도 넘어야 할 때도 있지만 좀 더 멀리 바라보며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기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어떤 순간에도 행복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파도를 탓하지 않는, 심성 고운 내 친구

홍경석 54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성남동

올해부터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낭달뀌(양지)가 아닌, 음지의 비정규직 박봉으로 살다 보니 매양 ‘허겁지겁’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대학원생이 된 우리 딸이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해 8월 하순의 어느 날은 딸의 대학 2학기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었다. 역시나 돈이 부족해 주변에 융통을 부탁했지만 모두가 “돈이 씨가 말랐다”고 했다. 궁여지책, 한참의 망설임 끝에 이번엔 고향의 죽마고우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금세 받지를 않는다. 차라리 받지 말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바위와 같이 꿋꿋했던 나였건만 자식 교육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어떤 굴종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잠시 후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지?”라면서 내 안부부터 챙겨주는 친구가 참으로 고마웠다. 입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어렵사리 돈 부탁을 꺼냈다. 친구는 지금은 일을 하고 있는지라 이따 퇴근길에 송금을 해주겠노라고 했다.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힘든 노동일을 하는 친구였음에 돈 부탁을 하고 나서도 내 맘은 쓰디쓴 한약을 먹은 양 마음까지 쓰라렸다.

친구는 그날 저녁 즉시 입금을 해주었고 덕분에 이튿날엔 딸의 등록금을 납부할 수 있었다. 너무나 고마운 친구였기에 월급을 받자마자 친구의 돈을 우선 갚았음은 물론이다.

그해 만추의 일요일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고향의 죽마고우들과의 정기적인 회동 모임이었는데, 그 친구의 미간은 그날따라 유독 어두운 그늘이었다. 2차로 노래방에 끌고 갔는데 그 친구는 평소와는 달리 멜랑콜리한 곡조의 노래만을 부르는 것이었다. 급기야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부를 땐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는 가사에서는 금세라도 엉엉 울 듯한 표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여 술을 가득 따라주며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었으나 친구의 입은 여전히 닫힌 철문이었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담배를 권하니 그제야 친구의 입이 열렸는데.

장사 실패와 빈곤의 상륙 등으로 말미암아 그 친구는 오래전에 이혼을 했다. 자식 둘은 본가(本家)의 부모님께서 거두고 계시지만 연로하시어 약값이 밥값보다 더 들어가는 형국이라고 했다. 그러한 터에 장남인 자신의 생업은 늘 작업 환경이 위태롭고 한 달에 며칠 일하기도 버거운 공사 현장의 막일, 즉 노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과는 달리 돈을 모으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님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이었다.

전월(前月)엔 고작 며칠밖에 일을 하지 못해 여간 어려운 처지가 아니라고 했다. 아울러 친구는 두 자녀의 교육비 마련까지 생각하노라니 그처럼 자기도 모르게 침울해졌던 거라면서 그제야 겨우 얼굴을 펴는 것이었다.

사정이 약간이나마 펴진 내가 다만 얼마간이나마 빌려주겠다고 했으나 친구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리곤 밀린 임금을 받으면 해결된다면서 “나 때문에 술맛만 망친 건 아니냐?”며 되레 내 걱정을 해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출근을 했는데, 그 친구가 자꾸만 명치끝에 걸렸다. 전화를 걸어봤는데, 예상과는 달리 밝고 명랑한 음성이다. 나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더 기운 내라!”

미쉘 들라크로와 작.

<Le Canotier(노 젓는 사람)>

79.5×70.5cm, Lithograph on paper.

 

어언 50년 이상 변함없이 정연한 우정의 끈을 매달고 달려온 진솔한 친구다. 너무도 가난했음에 고작 초등학교만을 마치고 오늘도 시멘트 가루가 휘날리는 공사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친구이다. 하지만 지금껏 역시도 남에게 해코지 한 번 한 일이 없는,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인 것이다. 언젠가 그 친구는 이런 ‘명언’도 남겨 내 맘을 뭉클하게 했다.

“누군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도 모자라 좋은 직장에서 떵떵거린다고 하더구나. 나는 비록 가난과 불학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어렵게 살고는 있으되 그러나 부모님 원망은 안 한다. 부모님께서 날 낳아주신 덕분에 그나마 이 세상의 이모저모를 두루 구경할 수 있다 가는 인생이니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눈물이 핑 돌던지, 지금도 기억의 창고에서 생생하게 유효하다.

그처럼 ‘파도를 탓하지 않는 어부’와도 같은 심성 고운 내 친구, 그렇게 내 곁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내 친구야, 늘 고맙다. 도래하는 새해엔 네가 하는 일도 순풍에 돛을 달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줏빛 나팔꽃 같은 고은이 언니

이계환 26세. 대학생. 뉴질랜드 오클랜드시티 거주

“언니, 고마워요.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 전화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목소리 듣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 “그래, 나도 너가 그렇게 말해주니깐 힘이 많이 된다. 고마워.”

그렇게 한국과 뉴질랜드라는 대서양을 넘는 거리 너머로,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고은이 언니의 목소리. 나는 또 한바탕 드라마처럼 붉으락푸르락했던 마음을 고은이 언니한테 다 쏟아냈지만 언니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하다.

마치 비 온 후 막 고개를 든 자줏빛 나팔꽃처럼 언제나 환한 미소만 가슴에 남게 해주는 고은이 언니. 세상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지는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이 바로 장고은 언니다.

언니는, 사실 직접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내가 적성에 맞지 않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너무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때였다. 고은이 언니 아버지께서는 당신도 딸이 있는데, 영국에서 법대를 졸업했다고 말해주셨다. 하지만 당신의 딸도 법대가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아 굉장히 힘들어하다 그 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방향을 바꾸었다고 말해주셨다.

당시 진로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고 심각했던 나는 고은이 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었고, 그래서 언니를 만나기 전부터 왠지 언니라면 내 힘든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 같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어느 겨울날, 겨울 방학 때 한국에 잠시 들렀을 때 언니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너무 차가워서 오히려 맑게 느껴지던 그 겨울밤, 우리는 새벽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법대 이야기, 진로 이야기, 가족 이야기…. 아침 일찍 출근해야 돼서 피곤했을 법한데도, 언니는 그렇게 철없는 동생의 이야기 보따리를 들어주었다.

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둘 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서로 바빠 자주는 못 보더라도 내 마음이 정말 힘들 때면 유일하게 달려와주는 사람은 언니였다.

한번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지쳐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전 제가 왜 공부해야 되는지 그 목적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언니는 왜 언니가 법대 공부했는지 이제 알아요?” “응. 지금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

또 한 번은 부모님과 엄청 크게 싸우고 짐까지 다 싸서 집을 나왔을 때였다. 나는 결국 또 언니에게 엉엉 울면서 전화를 했다. 언니는 바로 달려와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역시나 내 한풀이를 들어주었다. 음식점을 나올 때쯤 결국 언니의 그 따뜻함은 내 마음을 돌려놓았다. “맞아요. 제가 부모님께 잘못한 것 같아요.”

미쉘 들라크로와 작.

<Winter in New England(뉴잉글랜드의 겨울)>

72×53.5cm, Serigraph on canvas.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힘들다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따스한 사랑으로 결국 세상에 대한 내 마음속의 미움과 원망을 다 녹여주었던 언니. 내가 어떤 불만과 한풀이를 해도, 결국 내가 다시 일어설 거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기다려준 언니.

그런 언니의 격려와 따스함을 받았기에, 나도 이제 힘든 일이 있어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다른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언니에게서 받은 똑같은 사랑과 따스함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난 호 월간 마음수련에 ‘코이그지스트(coexist)’라는 시가 실렸다. 그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서로 도와주는 우리가 아름답다. 항상 같이 있어 아름답다. 함께할 수 있어 아름답다. 아픔도 행복으로 만드는 우리가 아름답다. 서로 믿는 우리가 아름답다….’

이 시처럼 항상 같이 있어주고, 믿어주고, 도와주는 언니를 만나서 정말 좋다. 언니, 언제나 곁에 있어주세요. 그렇게 제가 철들어가는 모습 계속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