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니면 안 돼’ 가족 집착을 내려놓다
지난 9월 27일, 수술대에 올랐다.
4년 전부터 앓아온 뇌혈관 수술이었다.
후유증으로 인해 의사조차 수술을 권유하는 게 쉽지 않았던, 7시간에 걸친 대수술. 가족들은 수술 동의서를 쓰면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 흘렸지만,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편안히 그 순간을 맞이했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그냥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글 조명희 55세.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완벽한 주부’ 30년, 병이 찾아왔다
결혼 후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자식을 키우고 살아왔는데 남는 것은 지독히도 아픈 내 몸뚱이뿐이었다. 오랜 불면증으로 몸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잠 못 자는 것도 서러웠고, 몸이 아플 때마다 늘어가는 건 짜증밖에 없었다. 이곳저곳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의사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때가 2008년.
오직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삶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남편과 아이들이 무얼 하는지 꼬치꼬치 묻고 간섭하고, 하루 종일 걸레 들고 치우며 다니고, 밀린 집안일들로 짜증 내고…. 빨래를 해놓지 않으면 자면서도 꿈속에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설거지를 해놓지 않으면 꿈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모든 걸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못한 일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하는 건 못마땅해했기에 가족들은 집안일 하는 것조차 감히 엄두를 못 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그렇게 스스로를 학대하게 했다.
가족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왔던 30년, 내 모습이 비로소 보였다. 남편, 자식이 잘되는 것, 그것이 내 명예인 양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 커서 내 품을 떠나는 자식들과 회사 일로 바쁜 남편을 보면서 결국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것, 그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인해 참 많이 힘들었다. 가족을 위해 살고 가족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건 그만큼의 미움과 원망뿐이었다.
결국 몸이 아픈 것도 마음을 잘못 먹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 순간 가족을 내 틀에 묶어두려 했구나, 그로 인해 참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겠구나….’ 수련을 통해 평생 움켜쥐려 했던 가족들을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모든 걸 해야 한다는 마음조차도…. 특히 지독히도 아픈 몸이 원망스러워, 남편에게 모질게 쏟아냈던 말들이 떠올라 울기도 많이 울었다.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히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동네를 배회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야, 여보” 무릎을 꿇고 남편에게 참회했을 때 아니라고, 오히려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던 남편…. 그 마음이 고마워 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병이란 것도 쳇바퀴 도는 듯한 인생을 한번 놓아보라고, 쉬어가라고,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제야 비로소 집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일주일간 논산에 있는 마음수련 본원에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전엔 상상조차 못 한 일이다.
‘내가 없으면 밥은, 빨래는 누가 하고, 강아지 밥은 누가 주고, 똥은 누가 치울까’ 하며….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살아온 내가 우스웠다.
낙엽처럼 다 내려놓는 기쁨
집을 비운 동안 집안일은 오히려 더 잘 돌아가기만 했다. 빨래, 설거지를 잘 도와주는 남편은 이제 주부가 다 됐다며 웃는다. 내가 해야 한다는 마음을 놓으니 가족들이 이미 하고 있었고, 서로가 편안해졌다. 10년 동안 앓아온 불면증도 사라지고,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를 내려놓으니 세상은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기에, 나에게 주어진 병이라는 ‘조건’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좋았고, 가족들도 너무나 평온하고 침착한 내 모습에 놀라워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다. 이젠 석양의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외로움은 더 이상 없다. 밖에서 친구를 만날 때나, 어떤 일을 하든 항상 집안일 걱정으로 불편했던 마음, 그토록 팽팽하게 잡아끌었던 긴장의 끈이 놓아졌을 때의 자유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어디에 있든, 그 순간 내 마음도 함께 머문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
요즘은 내가 안 한 건 다 좋다. 전엔 밖에서 밥 먹는 걸 싫어하던 내가 병원 밥을 너무 맛있게 먹으니, 남편이 “병원 밥이 그렇게 맛있나?” 하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남이 해준 밥이 더 맛있더라고.”
오늘도 산책을 나선다. 예전엔 그냥 스쳐 지나갔던 나무 한 그루, 나뭇잎 하나하나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순리에 따라 꽃이 피고 지듯이, 죽음은 두려움이 아닌 자연이기에,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예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다 내려놓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오늘도 마음으로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