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돌아보기,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
글 고권호 48세. KT 네트웍스 근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사진 홍성훈
입사 5년 만에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의 일은 지금까지 해온 일과 달랐다.
낯선 일에 적응할 틈도 없이 상사의 지시는 쉴 새 없이 내려왔다.
책상 앞에 서류는 끊임없이 쌓여갔고,
현장은 현장대로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사람들과도 부딪쳤다.
상사의 지적 한마디는 큰 상처가 되었고,
반면 상사한테 칭찬받는 동료에 대한 열등감은 커져 갔다.
‘동료는 예뻐하고, 나는 미워하는구나. 고향도 다르니까 대우를 더 못 받는 거야….’ 동료들의 모습을 확대 해석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혔고, 매사 비굴해져 갔다. 내가 자라온 환경도 원망스러웠다. 섬 머슴아로 태어나고 자라 대도시에 왔을 때부터 가졌던 열등감이었다. 작은 상처에도 꽁해지고, 대범하게 받아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불안이 엄습해왔다. 마치 전깃불이 확 하고 켜지듯이 온몸으로 쏟아지는 불안감이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지만, 결국 중간에 내려야 했다. 미친 듯이 병원을 찾아 헤매었고, 제 발로 찾아 들어간 곳은 응급실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숨 쉬기도 힘들고, 발끝과 손끝이 점점 마비되는 듯했다. 이렇게 죽나 보다….
그렇게 예고탄도 없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는 큰 압박감을 주었고 결국엔 과부하가 걸린 거였다.
공황장애라 했다. 의사는 약은 보조 역할일 뿐 마음을 바꿔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고로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늘 긴장 상태이고 심장은 쿵쿵 뛴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무대에 혼자 서 있는 기분.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올라가면 과호흡으로 위험해진다. 겨우겨우 호흡 조절을 하면서 위기를 넘겼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를 불안감에 몰골은 수척해갔다.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하고, 24시간 지옥 같은 공포가 이어지기도 했다. 한적한 곳으로 가면 나을까 싶어 시골로 발령을 내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업무는 여유 있는데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업무 습관은 그대로였다.
내가 마음이 여리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보니, 이런 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책도 보면서 안정을 취하려고 했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치 기타줄 당기듯이 뒷골이 당기는 증상까지 겹치면서 죽음의 공포가 연거푸 밀려왔다. 40대에 가장 많다는 ‘돌연사’. 내가 바로 그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때 불현듯 동료가 권유했던 마음수련이 떠올랐다.
죽어라 마음을 버렸다. 마음이 나약해서 이런 병에 걸렸다며 그동안 얼마나 한탄했던가. 그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했다. 처참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가족들 앞에서도 노래도 못 부를 정도로 소심했고, 학급 회의 때도 말 한마디 못 했던 학창 시절….
나는 여리다, 소심하다, 하는 기억의 사진들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나약하게 태어나게 했다며 부모님을 원망했던 마음도 버렸다. 나는 평소 사람들한테 잘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나의 내면을 살펴보니,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서 나온 행동이었다. 때문에 내 딴엔 잘해주던 상대한데 싫은 소리를 들으면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런 자잘한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더 작아졌다. 마음사진들이 나를 계속해서 여리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사진이 스트레스였다.
부지런히 그 사진을 버려나갔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서류 한 장, 사람들의 말 한마디, 지시 사항에 쪼그라들고 상처받던 예전의 ‘고.권.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죽어라고 마음을 빼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공황장애도 밤손님처럼 언제 간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졌다.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연히 직장 생활도 달라졌다. 마음의 빼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과의 부딪침은 줄어들었고, 세상을 넓게 보고 수용하는 마음이 커졌다. 일을 할 때도 ‘과연 잘될까?’ 하며 미리 결과를 걱정하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는 나오듯이, 이제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고맙고, 남을 분별하기보다는 내가 과연 내 역할을 잘하는지부터 점검하게 된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 모두들 직장 생활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해온 일만 고수하고 내 모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살아온 내 모습을 버리며 틀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 또한 바꿀 수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후배들도 존중하며 스스럼없이 도움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남 앞에서 말도 못 하던 내가 어느덧 가족 모임이나 동창회 모임도 주도한다. 일도 모임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생활에 치인다는 마음이 없다. 안될 거란 생각 자체가 없다. 늘 긍정이다.
세상은 나의 마음을 펼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스트레스로 힘들거나, 안 좋은 일 때문에 괴롭다면 내 마음부터 살펴보길 권유하고 싶다. 자기를 되돌아볼 줄 안다는 것은 곧 새로운 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