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간 나무를 연구해온 박상진(73) 교수. 그는 우리나라 나무 문화재 연구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로 손꼽힌다. 나무 세포를 연구하는 ‘목재조직학’을 전공한 그는 나무를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비유한다. 지구상에서 삶의 기록을 매년 몸속에 남기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백제 무령왕의 관재(棺材), 팔만대장경, 거북선 등 나무에 담긴 역사의 비밀을 밝혀왔던 박상진 교수.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일까. 마치 언제나 곁에 있던 오랜 나무와 마주하듯 박상진 교수와의 만남은 휴식처럼 편안했다.
‘원래 궁궐의 건축물 가까이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임금을 해치려는 자객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또한 궁궐 문 앞에 나무가 있으면 ‘한가로울 한(閑)’ 자 모양이 되어 나라가 번창할 수 없고, 담 안쪽 가운데에 나무가 있으면 ‘곤란할 곤(困)’ 자 모양이므로 왕조의 앞날이 암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궁궐의 우리나무> 중에서
우리는 흔히 나무 이야기 하면 딱딱한 식물도감을 떠올린다. 이렇듯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나무 이야기에 역사와 문화를 곁들여 나무살이를 재미있게 전하는 학자가 바로 박상진 교수다. 2001년 <궁궐의 우리나무>를 시작으로 최근에 발행한 어린이를 위한 나무 책까지 그동안 집필해온 나무 관련 교양서만 십여 권에 이른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씨는 “한 나무에 담긴 역사, 문화 등 접근하는 방식이 거의 인문학 수준”이라고 평가할 정도. 그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4대 사서를 비롯해 각종 고전 기록에서 찾아낸 나무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나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이렇게 덕수궁에서 뵈니 맨 처음 집필하셨던 <궁궐의 우리나무>란 책이 생각납니다. 궁궐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나무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이 어딜까 생각했어요. 바로 궁궐이더라고요. 일제 강점기에 원형을 잃긴 했지만 지금은 많이 복원됐습니다. 남해안에서 자라는 일부 수종을 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무를 거의 볼 수가 있거든요.
박사님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말 못하는 나무의 ‘대변자’ 같으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마다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내가 나무가 돼서 이야기하려고 하죠. 단순히 나무 이름만 알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근데 나무에 담긴 우리의 역사와 문화, 삶을 알게 되면 나무가 달리 보이거든요. 재미있는 사연들도 많습니다. 가령 경복궁에 가보면 앵두나무가 유별나게 많아요. 애틋한 부자 관계를 담고 있지요. 세종대왕이 앵두를 좋아했는데 효자로 이름난 문종이 세자 시절, 아버지 세종에게 드리려고 손수 앵두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맛본 세종이 얼마나 흐뭇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가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일본에서 임학과를 나온 선생님은 “저 산을 푸르게 만들어보라”면서 그에게 임학과 진학을 권유했다.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 산은 그야말로 민둥산이었고, 덴마크의 황무지를 푸르게 만든 엔리코 달가스(1828-1894) 이야기가 한창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한때 달가스처럼 사회 운동가를 꿈꿨지만, 내성적인 자신과는 잘 맞지 않다고 판단, 목재조직학을 전공하게 된다.
목재조직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쉽게 말하면 나무 해부학입니다. 예를 들면 의사들은 인체해부학을 공부하잖아요. 그거와 비슷해요. 현미경을 통해 나무속의 세포를 연구하는 것이죠. 나무는 1년 단위로 자신이 처한 자연환경을 종합적으로 나이테에 기록해요. 무한 용량의 자연식 하드디스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테를 조사해보면 나무의 종류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후 등도 짐작할 수 있어요.
순수 목재조직학을 연구하다가 나무에 문화와 역사를 접목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요.
1975년 일본 유학 중에 만난 강우방 교수의 영향이 컸어요. 그는 나와 동년배이면서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인데 알기 쉽게 한일 문화재를 비교해서 설명해주곤 했거든요. 그때 문득, 제 전공과 접목시켜서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록 썩은 나무토막이라 할지라도 1mm 되는 부스러기만 있어도 어느 나무인지 알 수 있거든요. 특히 나무는 종류에 따라 정해진 지역에만 자라는 특성이 있어서 나무 재질을 통해 지역 간의 교역 범위도 추정할 수 있으니까요.
차츰 그의 연구실에는 역사가 새겨진 문화재 나무들의 작은 표본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멀리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살림터에서 나온 나무부터 임금님들의 관재, 옛 배를 만드는 데 쓰인 나무, 각종 건축재, 글자가 새겨진 목판까지 저마다 사연을 갖고 있는 나무들…. 잃어버린 세월의 흔적을 밝히기 위해 현미경과의 씨름은 계속됐고, 5천 년 역사의 현장 목격자인 나무들은 선조들의 생활상까지 짐작게 해주었다. 또한 백제 무령왕의 관재, 팔만대장경 등 단지 역사 기록만으로는 풀리지 않았던 의구심들이 하나하나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무에게 입이 있고, 문자가 있었다면 필히 보고 들은 사연을 수많은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라며, 그는 나이테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려나갔다.
여러 연구 중에서도 1991년 ‘백제 무령왕의 관재가 일본의 금송’임을 밝힌 게 가장 큰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가 제일 인상에 남죠.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최대 백제 고분인 무령왕릉이 발굴됐고, 20년이 지나 어렵사리 관재 조각 일부를 얻게 되었지요. 현미경으로 보는 순간 놀랐습니다. 일본에만 자라는 금송이었던 겁니다. 그동안 밤나무로 알려져 있었거든요. 백제와 일본,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였죠. 무령왕이 어릴 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역사 기록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걸 밝혔다는 데 자부심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우리나라 고고학 분야에 과학의 도입이 늦었다는 면에서는 안타깝죠.
팔만대장경의 경우 기존의 학설을 뒤엎고 ‘강화도가 아닌 해인사 근처에서 제작됐다’는 주장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아직 학계에선 의견이 분분한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자작나무로 만들어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게 통설이었죠.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해요. 우선 기록에 나오는 것과 맞춰보면 너무 맞지가 않아요. 표본 조사 결과, 자작나무가 아닌 산벚나무, 돌배나무, 남쪽 지방에 있는 후박나무, 해인사 근처에 있는 거제수나무 등이 대장경판으로 쓰인 게 확인됐거든요. 또한, 강화도에서 옮겼다고 하기엔 무게만도 4톤 트럭 70대분에 해당하는 280톤인 8만여 장의 경판의 양도 너무 많고, 그 과정에서 있을 법한 그 흔한 마모된 흔적조차 없이 너무 깨끗해요. 아직은 개인의 주장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합니다.
나무가 역사의 길라잡이를 한다는 점에서 새삼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끈 거북선이 백전백승했던 이유도 바로 나무에 있어요. 우리 군이 내세운 전술은 당파(撞破), 즉 박치기를 해서 일본 배를 부수는 거였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배를 만드는 침엽수 중 가장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요 부위는 참나무, 가시나무 등 더 강한 나무로 힘을 보강했지요. 반면 일본 배는 훨씬 약한 삼나무로 만들어서 박치기하면 그냥 박살이 났지요. 어찌 보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일등 공신은 나무들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죽어 있는 문화재뿐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재인 고목나무로도 이어졌다. 1995년 남해 창선도 넓은 들판에서 본 천연기념물 왕후나무와의 만남. 웅장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나무와 마주한 순간 경외심이 들면서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거 같은…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강렬한 느낌이 전해졌다. 관련 역사 자료를 찾아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그 나무 밑에서 군사들과 쉬어갔다는 전설이 있었다.
‘나무 문화재’란 인식조차 희박했던 시절, 그는 천연기념물인 고목나무 세계로 점점 빠져들었다. 고목나무의 전설은 때론 역사의 편린을 꿰어 맞출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무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현재까지 찾아간 고목나무 장소만도 175군데에 이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나무가 어느 정도 되나요?
전국에 265군데의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적한 시골 마을 어귀에 자리하고 있죠. 천연기념물은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살아 있는 문화재인데, 이것이 꼭 우리가 알아야 될 부분이에요. 문화재가 금관, 석탑만이 아니거든요. 동물, 바위, 나무 등도 포함됩니다. 천연기념물인 나무는 불타버리면 5백년, 천년 된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잘 보살피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수많은 나무들을 만나면서 안타까운 순간도 많았을 거 같은데요, 소중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요?
나무들이 오히려 과잉보호로 수난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어찌 보면 그동안의 자연 조건에 잘 적응해서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적합한 환경이라 볼 수 있는데, 보호한다면서 오히려 나무를 힘들게 하는 것이죠. 주위에 돌담을 쌓거나 나무 밑동 주위를 흙으로 돋아 놓은 복토(覆土)를 종종 보거든요. 때론, 시멘트나 아스콘으로 아예 포장해버리고. 그렇게 되면 잔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 결국 나무는 죽게 됩니다. 굉장히 치명적이죠. 외과수술이란 이름으로 나무줄기의 썩은 구멍을 메우는 일도 그래요. 나무는 썩은 부분이 살아 있는 부분을 보호해주는 기능을 잘 갖추고 있거든요. 자연 상태로 가만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는 기억에 남는 나무로 전남 강진의 600년 된 은행나무를 꼽는다. 이 나무는 태풍으로 인해 한국에 떠밀려 오게 된 네델란드인 하멜이 나무 밑의 고인돌에 걸터앉아 고향을 그리워했다 해서 일명 ‘하멜의 은행나무’라고도 불린다. 하멜은 13년간의 조선 생활을 기록한 <하멜 보고서>를 쓰게 되는데, 우리에겐 <하멜 표류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훗날 조선을 서구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혹시 박사님 개인적으로 쉬고 싶을 때 찾아간다던지, 유독 마음이 가는 나무가 있나요?
제가 잘 가는 곳이 해인사인데, 학사대 전나무를 좋아해요. 신라 시대 최치원 선생을 떠올리면서 우리 역사를 알 수 있어서 제겐 특별한 곳이죠. 또 늘 가까이 하고 싶은 나무는 느티나무입니다. 편안하고 넉넉하게 보듬어주니까요. 느티나무 하면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로만 생각하지만, 나무의 재질이 좋아 쓸모가 많았던 나무이기도 합니다. 고려 이전만 해도 궁궐 기둥, 임금의 관재 등으로 쓰였거든요. 보통 소나무를 제일 좋은 나무로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나라 나무 중 제일 좋은 나무를 뽑으라면 느티나무라고 말합니다.
박사님께 나무란 무엇인가요?
변함없는 친구죠. 언제나 나를 반겨주면서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변함없이…. 10년이란 세월도 긴데 천년을 넘는 나무도 있으니까, 대단한 거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나무로 강원도 정선에 주목이란 나무가 있어요. 나이가 1,400살이죠. 김유신 장군, 계백 장군과 동갑내기인데, 아직 이 나무는 살아 있고 1,400년의 역사를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가끔 사람들에게 얘기해요. 고목나무를 찾아가서 세월을 이야기하고 역사를 이야기해 보라고 합니다. 그럼, 인생을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평생 나무만을 연구해온 박상진 교수. 그에게 나무란 훌륭한 벗, 편안한 안식처를 넘어 우리들의 과거이자 살아 있는 미래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전국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을 만나러 천리길도 마다 않는다. 그리고, 나무들의 그 깊은 에너지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 봄, 우리 주변에 있는 나무에 한번 가까이 다가가보면 어떨까. 어떠한 마음도 한없이 받아주고 가장 편안하게 감싸줄 수 있는 나무가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