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슬

지리산 산자락 어느 외딴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늙은 아내가 병들어 눕고 늙은 남편이 집안일을 맡았다. 남편이 아침부터 담숭담숭 일을 한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방 청소하고, 하얀 요강 단지를 씻어 햇살 잘 드는 앞뜰에 엎어 두었다. 마루를 닦고 마당을 쓸고, 흰 고무신 두 켤레를 뽀득뽀득 씻어 댓돌 아래 가지런히 두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요강과 흰 고무신이 반짝반짝 눈부시다. 그러는 내내 아픈 아내는 마루 끝에 앉아 남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했다.

“남자한테 그런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해요.”

늙은 아내가 울적해 보여 영감은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닭장으로 갔다. 노인 얼굴이 소년처럼 밝아져서 닭장을 나왔다. 노인의 손 안에 달걀 두 개가 소담하게 있다. 남편이 상기된 소년의 표정으로 아내에게 달걀을 건넨다. 오랜 세월에도 식지 않는 남편의 온기가 고스란히 아내에게 전해진다. 늙은 아내가 소녀처럼 함박웃음을 짓는다.

“추운데 그만하고 이제 이쪽으로 오세요.” 아내가 손으로 마루를 쓰다듬어 자리를 권한다. 따스한 햇살이 어느새 금빛 돗자리를 깔았다. 남편이 아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산 아래 낮은 들판처럼 늘 곁에 있는 아내가 고맙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나한테 시집와 오래 살아줘서 할멈이 좋소.” “영감도 바람 한번 안 피우고 옆에 있어 주어 고맙소.”

땅거미 내린 저녁, 늙은 아내가 부뚜막과 방을 통하는 쪽문을 열고 부엌일을 하는 남편을 본다. 돌아서서 설거지에 여념이 없는 남편의 굽은 등이 송구하다. 남편도 아내의 애틋한 시선이 등에 머무르고 있음을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작은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밀어 넣으며 남편이 말했다.

“할멈, 우리 한날 한시에 같이 갑시다.” “그래요. 영감, 한날 한시에 같이 가요.”

여느 날처럼 남편은 따뜻한 물을 데워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아내는 순한 아이처럼 머리를 맡겼다. 늙은 남편이 서리 내린 아내의 머리카락을 참빗으로 빗어주었다. 아내가 얌전하게 돌아앉아 비녀를 꽂는다. 남편이 말했다.

“자네, 머릿결이 시집올 때처럼 곱소.”

남편의 목소리가 옛날 옛적 사대관모를 쓴 신랑 때와 똑같았다. 홍조 띤 아내의 모습이 첫날밤 족두리를 쓰고 수줍던 그대로다. 이윽고 밤이 깊어가고 노부부도 잠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누운 늙은 남편이, 옆으로 손을 내밀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할멈 우리 한날 한시에 같이 갑시다.” “그래요. 한날 한시에 같이 가요.”

늙은 내외는 감실감실 단잠이 들었다. 옛 악기 ‘금슬’이 그러하단다. 거문고 금(琴)과 비파 슬(瑟)은 제 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곡조를 빚어낸단다. 기쁜 자리나 슬픈 자리나 오래오래 금슬지락의 애틋한 정으로 함께하였단다. 그래서 ‘금슬’이란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