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은 고단한 날이다. 저녁상을 물리자 포만감과 피로가 함께 밀려왔다. 목뒤로 팔베개를 하고 누웠으니, 옆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던 아들이 텔레비전 방송 편성표가 있는 면을 접어 내 코앞에 쑥 들이밀었다. “아빠, 우리 오늘 밤에 이 프로 같이 봐요. 재미있겠어요.”
꼼짝 않고 누운 채 읽어보니 야생 동물 보호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묵묵부답하였다. 옆에 있던 아내가 아들을 거들었다. “오랜만에 식구끼리 한번 봐요.”
나는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신문 속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사냥꾼이 야생 원숭이를 결박하고 송곳니를 제거하고 있었다. 인간의 무자비한 도륙이 단박에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르긴 해도 동물판 ‘지옥의 묵시록’일 것이다. 피곤해, 잔인한 것을 보고 흥분하기도 싫어. 불쌍한 모습들도 귀찮아. 나는 신문을 접어 방구석으로 툭 던졌다.
“싫다! 안 볼란다. 징그럽다!”
다시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다가 스르르 초저녁잠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는 밤 열한 시를 넘어가고, 식구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나는 식탁에 있는 귤 접시를 들고 와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리모컨을 톡 눌렀다.
화면은 열대우림 속, 원주민이 숨을 죽이고 사냥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있었다. 총구는 나무 끝 가장 높은 곳에만 앉는다는 극락조를 향하고 있었다. 초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시청하기를 거부한 프로그램을 우연찮게 혼자 보게 된 것이다. 다행히 잔인한 장면이 다 지나가고 프로그램은 마무리 중이었다. 그런데 해설자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원주민들은 그날 숲속에서 잡은 극락조 열여덟 마리를 군인들에게 넘겼다. 군인들은 또 돈을 주지 않고 가버렸다. 다음 날 원주민들이 군인들을 찾아가 말했다. ‘당신들은 월급을 받지만 우리는 극락조를 팔아서 한 끼를 때우는 소금과 설탕을 사야 합니다.’”
극락조 열여덟 마리가 제물이 된 것 또한 운명이다. 소금과 설탕을 얻기 위해 극락조를 잡아 파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원주민은 끝내 소금과 설탕을 얻지 못했다. 검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원주민과 높은 나무에서 추락하는 아름다운 극락조 생각에 가슴 한쪽이 아팠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프로그램이 끝났음을 알리는 자막이 아래로 눈물처럼 쏟아졌다. 목요일은 역시 고단한 날이다. 텔레비전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