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선 감독

두 번째 장편영화 <복숭아나무>로 그녀는 다시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연기자, 가수, 화가…. 다양한 수식어를 갖고 있는 구혜선씨가 이번에 하고 싶었던 얘기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 한다. 개봉을 하루 앞두고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 붙들고 있었기에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참 예쁜 구혜선씨. 그녀의 순수와 자유, 열정이 기분 좋은 에너지로 전해져왔다.

영화 <복숭아나무>에 담고 싶은 내용이
무엇이었나요?

근래 ‘나는 왜 살고 있는지, 왜 태어났는지’ 고민을 했었어요. 그러다 잠시 무기력증처럼 누워 있었는데, 곧 함께 사는 반려동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가족들과의 저녁 약속을 위해서 일어나게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누워 있고 싶어도 움직인 거잖아요.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유는 그들이 있기에 가능했구나. 그날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몸은 하나, 머리는 두 개인 쌍둥이 형제, 갈등하면서도 서로가 있었기에 숨 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관계. 누군가는 이들을 괴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 또한 그렇게 오로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장 특별하고 행복한 괴물이 아닌가. 그리고 비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존재 자체로 가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설 <복숭아나무>에도
‘나는 언제나 당신을 위해 달릴 거다’라고
썼는데요, 당신이라면?

일단 지금 저에게는 가족이 제일 중요해요. 가끔 그래요. 내가 이걸 정말 하고 싶을까? 하면 엄마 보여주고 싶어서, 아버지 언니, 가족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내가 인생을 만들어가는 건 ‘나로 인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 거 같아요. 스무 살 때 혼자 살아보려고 집을 나와서 독립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행복하지만은 않더라고요. 싸우고 뭔가에 지쳐도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런 존재 자체가 저에게 엄청난 큰 힘이 되더라고요.

쌍둥이 형제 중 형 상현은 순종적인 성격,
동생 동현은 불만 많은 캐릭터잖아요.
이런 양면적인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나요?

정상적인 앞모습을 가진 동현(류덕환 분)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반면 머리만 있는 형인 상현(조승우 분)은 그런 생활이 불가능해요. 언뜻 보면 동현이 더 정상적으로 클 거 같은데 그 반대예요. 그게 우리 모습 같았어요. 우리도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잖아요. 사실 환경이 똑같아도 성격은 다르게 자라는 걸 보면,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안에서 나온다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는 너무나 남의 탓을 하고 살고 있지 않나. 내가 이 안에서 나의 행복을 찾으면 굉장히 행복한 일일 텐데 하는 거요.

2008년 단편영화 <유쾌한 도우미>를 시작으로, 첫 번째 장편영화 <요술> 등 벌써 다섯 편의 영화를 연출한 구혜선 감독. 놀라운 창의성, 오묘하고 미스테리한 감성, 감각적인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 등으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가는 이 20대 감독은 영화계에서, “10년, 20년 이후가 더 기대되는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든 그림과 음악, 글로 풀어내곤 했다. 10대 시절,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연습생에서 우연한 계기로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 그녀는 2009년 <꽃보다 남자> 금잔디 역을 맡으며 한국을 넘어 아시아 한류스타로 떠오른다.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소설을 발표하고, 중학교 때부터 작곡한 곡들을 모아 소품집을 내고, 직접 자신의 영화 OST를 제작하고, 작업했던 그림들을 모아 개인전을 여는 등 그녀의 계속되는 도전과 변신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때로 “욕심이 과하다” “재능은 많은데 특별히 잘하는 한 가지가 없다” 등등 편견 어린 평가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해나갔다. 그리고 그림, 음악, 작가로서의 멀티적인 그녀의 능력은 영화라는 종합예술 안에 녹아들었고 점점 그녀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첫 영화는 어떻게 찍게 되었나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님께서 많은 것을 알려주셨어요. 처음 제가 쓴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뵀을 때, 그걸 집어던지시는데,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삭제해나가는 작업들을 배웠어요. 그러면서 그분이 계속 숙제를 주셨어요. 구혜선이 감독을 한다면 하고 싶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와라, 거기에 맞는 콘티를 그려 와라, 음악을 만들어 와라…. 그분의 말씀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만 넣어놓으면 그건 상상으로만 정체된다. 꺼내서 맞기도 하고 상처를 받아야 한다면 받아야 한다” 하셨죠. 그분 덕분에 24살 때 <유쾌한 도우미>라는 첫 작품을 만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해야 배운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어요. 그 작품을 보고 대표님이 “이것 봐, 되잖아” 하셨을 때 자신감을 많이 얻었죠. 그 후로 더 활발하게 영화를 하게 됐고요.

영화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뻑’이요.(웃음) 자뻑으로 인한 자부심? 전에는 제가 작품을 만들고도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족한데 누가 봐줘야 해? 그럼 부족한 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뭐야? 내가 하는 일에 나를 낮추는 것이 참여한 사람들을 똑같이 만들게 되는 거더라고요. 전에 제가 ‘왕과 나’라는 드라마를 했을 때, 어떤 배우와 비교의 대상이 됐었어요. 너무 부끄러워하는데 작가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우리 드라마 여주인공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 이 작품은 완성도가 없다고. 그 순간에 나를 낮추는 것만이 겸손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사실은 진짜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안 했겠죠. 개인적으로 부끄럽긴 부끄럽지만. 그래도 항상 프라이드는 가지고 있어요.(웃음)

그동안의 영화나 소설을 보면,
삶과 죽음, 관계와 소통 등에 대해
많은 성찰을 한 거 같아요.

2009년 탱고라는 소설을 쓸 당시 굉장히 사람을 많이 잃었어요. 정승혜 스승님도 돌아가셨고, 또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참 힘들 때였는데 글을 쓰면서 치유가 많이 되었던 거 같아요.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죽음은 나와 굉장히 가까이 있는 문제인데, 누구나 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니까 그렇게 두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았어요. 저도 회피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잘 보내줄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되고, 오늘 밥을 먹자 했을 때, 좀 귀찮아도 내일 먹자, 그런 소린 안 하게 되더라고요.

연기자, 작곡가, 화가 등 구혜선씨 앞에
수식어가 많잖아요.
스스로 자만해질 때는 없나요?

자만이라기보다 ‘자뻑’은 있는 거 같아요.(웃음) 그게 왜 생겼냐면 저도 원래 열등감이 굉장한 사람이었는데, 그게 하루하루가 괴롭고,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제 손해더라고요. 그다음부터 그냥 현실을 인정해 버리니까 제가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제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던 서현진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거의 20살 이후부터 저를 키워줬어요. 저의 대모라고 할까.(웃음) 그 친구가 제가 위축될 때마다 “충분하다”는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그 이후부터는 제 안에 있는 자부심 플러스 자뻑이 나오면서 내가 어떠한 예술가가 되려면 점을 하나 찍어도 이 점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남의 시선을 많이 받는 연예인인데
굉장히 털털하고 소박하다고 들었습니다.

주변 선생님들의 영향인 것 같아요. 특히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은 항상 저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들을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예를 들어 제가 중학생이 되니까 애들이 메이커 옷을 입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런 형편이 안 되는데도 저도 입고 싶었는데,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생각에 그게 진짜 예쁜 거니? 애들이 예쁘다고 하니까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거니? 그런 질문을 계속 하셨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면서부터는 물건을 모시지 않게 됐죠. 외모는 변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변하고 없어지는 것에 신경 쓰다 보면 괴롭잖아요. 외모보다는 내면을 가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웃음)

그녀는 작년 성균관대 영상학과에 입학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한때 방송연예과에 입학했지만 필요한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가, 영화 일을 하면서 공부가 필요하다 싶어 다시 대학에 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갔기에, 아무리 바빠도 수업에 빠지거나 지각해본 적이 없는 그녀는 늘 다른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학생이라 한다.

“자신은 평생 매일매일 배우는 사람일 거 같다”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배움터는 바로 나눔이다. 지난 9월 구혜선씨는 두 번째 그림 전시회 수익금을 모두 백혈병 환우들의 무균 차량 제작을 위해 기부했다. 또한 반려동물과 사람 사이의 교감을 그린 다큐멘터리 ‘너는 내 운명’, SBS스페셜 ‘오늘을 사는 아이들-아동호스피스’ 편의 내레이션 출연료 역시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했다.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키워주기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럴 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당시에는 너무 심각한 일도 지나고 보면 왜 그렇게 심각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크게 안 하려고 하죠. 그냥 가만히 놔두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인 거 같아요. 왜 연애하다가 이별했을 때, 그때는 막 죽을 거 같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기억에서 없어져버려요. 그러니까 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어서 사랑한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사람이 아닌 누가 거기 있어도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요즘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스스로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다 보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자기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면 결국에는 뭐든 되는 것 같더라고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존재가 가장 가치 있는 거겠죠. 항상 그분들 덕분에 저는 또 다른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요. 정말 감사한 것은 저를 좋아해주시고, 격려해주셨던 분들은, 저를 사랑해주심과 동시에 본인도 사랑하고 본인의 가족들도 사랑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셨어요. 그게 저는 너무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안 돌아가고 싶어요. 지금이 제일 좋아요”라고 답했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으면 성공한 인생”인 것 같다는 구혜선씨. “자신의 삶 안에서 자유롭게, 온전히 나를 완성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언제 혹은 무엇이라는 수식어가 무슨 의미일까. 인기 연예인인가 하면 거기에서 벗어나 있고 화가, 작곡가인가 싶으면 그 범위에서 벗어나 있고, 영화감독인가 하면 그 타이틀에도 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구혜선은 진짜 예쁜 사람이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