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첫 유행가는 진송남의 히트송 ‘바보처럼 울었다’이다. 고작 아홉 살이었던 아이가 왜 그렇게 청승맞은 뽕짝을 좋아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뽕짝은 온 가족이 함께 즐기던 노래였다.
철물점을 하시던 아버지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얼큰하게 취해서 돌아오는 날이면, 당신은 우리 형제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노래자랑을 시켰다.
부끄럼 많은 열한 살 누나는 이불 속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일찍이 트로트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당당하게 아버지 앞으로 나가 한 곡조를 뽑았다.
‘♪♬ 그렇게 그렇게 사랑을 하면서도 어이해 어이해 말 한마디 못 한 채
바보처럼 바보처럼 그 님을 잃어버리고 고까짓 것 해보건만
아무래도 못 잊어서 아무래도 못 잊어서 바보처럼 울었다. 목을 놓아 울었다 ♪♬’
내 노래가 끝나면 여섯 살짜리 동생 차례였다. 이제 겨우 엄마 앞에서 짝짜꿍이나 할 어린 녀석이 꽤나 조숙했는지 동생도 가요를 불렀다. 내 동생 십팔번은 남진의 ‘가슴 아프게’였다.
‘♪♬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바다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
동생의 노래가 끝나면 아버지는 아주 드러내놓고 박장대소하셨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형인 내가 훨씬 더 멋지게 잘 불렀는데 아버지는 왜 동생 노래에만 열광하실까. 이별의 이유가 바다 때문이라는 그 얼토당토않는 노랫말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눈물짓는다는 멋진 가사와 어찌 비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진짜 불만이었다.
아버지는 특히 막내 동생한테 관대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와 막내 동생과 내가 나란히 누워 라디오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옆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던 일곱 살짜리 막내 고사리 손이 아버지의 헐렁한 러닝 속으로 쓱 들어가더니, 아버지의 가슴께에서 꼼지락 꼼지락대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아니! 아버지 맨살에 손을 대다니!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당신은 막내의 허튼짓에 짐짓 시치미를 떼고 라디오 연속극만 듣고 계셨다. 아! 나는 그때 불현듯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비결을 알아차렸다. 나는 시시탐탐 기회를 엿보았고 며칠 후 기회가 왔다.
그날도 머리맡에 있는 고물 라디오가 웽웽거렸고, 아버지는 두 팔로 뒷머리를 감싸 안는 특유의 자세로 누워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윗목에 밥상을 펴놓고 공부하던 나는 피곤한 척 기지개를 켜고 슬그머니 당신 곁으로 가서 누웠다. 아버지는 여전히 연속극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용기를 내어 아버지 쪽으로 돌아눕고, 한쪽 팔로 당신의 넉넉한 배를 안으면서, 부드러운 콧소리로 “아부지예” 하고 불러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자슥이 와 이라노?” 하는 표정으로 힐긋 보시더니 내 팔을 툭 쳐서 물리치셨다. 나는 쭈뼛쭈뼛하다가 밥상 겸 책상으로 돌아왔다. 아마 그 순간 라디오 연속극에서는 실연당한 여인의 흐느낌과 슬픈 배경음악이 흘렀을 것이다. 으으으…. 뻘쭘했던 장남의 굴욕이여.
이솝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느 집에서 날마다 집주인의 귀여움을 듬뿍 받고 사는 고양이를 부러워하던 망아지가, 주인이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고양이처럼 아양 피우다가 쫓겨난 이야기. 일곱 살짜리 막내 동생이 하던 어리광을 초등학교 육 학년이던 내가 따라했으니, 생각하면 그날 실컷 얻어터지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진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자고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에휴~
글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