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특효약, 믿음
신문자 조선대학교 언어치료학부 교수,
신-언어임상연구소 대표
초등학교 때 일이다. 나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선생님이 뭐라 말만 해도 눈물이 나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더구나 발표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종이 울렸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일은 나부터 다시 한다는 말씀으로 끝을 내셨다.
다음 날 나는 꾀병을 부렸다.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다는 나의 완강한 태도에 어머니는 이유도 묻지 않으시고 담임 선생님에게 내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간다고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마나 고마웠던지 이불 속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린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와 현실을 혼돈하여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말이 서투르다 보면 말이 잘못 나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올바로 키우려는 마음이 지나쳐 작은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는 어머니들을 보기도 한다. 실제로 매를 들어도 아이의 거짓말이 잦아지자,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하였다는 부모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거짓말을 안 하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아이는 더욱 머리를 짜내고 그러다 보면 또 큰 거짓말을 하게 되고 만다.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무슨 얘기든 믿어주셨다. 그러다 보니 그 이후로는 사실 거짓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니 오히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삶 속에는 어려운 일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항상 믿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든든하다. 그럴 때 모든 일을 좀 더 자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나 싶다.
나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잘못했다고 따지기보다는 믿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장차 언어치료사가 될 학생들에게, "언어장애를 먼저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그 사람의 고통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생활에서도 혹시 상대가 나를 속이는 것 아닐까, 거짓말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 그냥 믿어버리면 내 마음도 편하고 세상도 믿음으로 다가온다.
모두 어머니한테 배운 지혜이리라. 그런 지혜를 가르쳐주신 어머니께서는 63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올해 아흔한 살이 되셨다. 새해 초부터 호흡이 급격히 안 좋아지셔서 병원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한 달여를 지내다 이제야 힘들게 집으로 모셔 왔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한마음으로 30년 가까이 되는 긴 시간 동안 어머니를 정성으로 간병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사랑과 믿음으로 키워주신 덕분이다.
어머니! 어머니의 귀한 가르침, 아이들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잘 전하고 있어요. 올 것 같지 않던 생명의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 너무나 사랑합니다.
거짓말쟁이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영애 60세.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남편은 연구원이었는데 며칠째 늦게까지 근무하느라 과로를 했고, 퇴근길 승용차 안에서 가볍게 어지럼증이 생겨 병원에 들러 진료를 했다. 그리고 담도암인 듯하니 입원 절차를 밟으라는 병원 측 통보에 눈앞이 캄캄하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오진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그럴 리가 없다며 남편도 황당해했다. 그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6개월의 투병 생활 끝에 남편은 마른 장작 같은 처절한 모습으로 떠나고 말았다.
가슴속 죄멍을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었으나 자식들을 생각하니 차마 속단할 수가 없었다. 불면증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일시적으로 끊게 된 인연도 회복시키며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마음 비우고 버리기를 생활화했다.
이제 남편이 떠난 지 10년. 아직도 남편의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아깝고 가슴 시리게 안타깝다.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활할 시기였는데 너무 가엾다. 인간이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때를 모르고 살아가지만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새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낀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나눴던 우리 부부였는데, 이제 세월이 흘러 두 손자들로부터 나 홀로 듣는다. 남편 몫까지 심장이 뚫리도록 사랑을 담으며 귀한 인생 겸허하게 살 것이다.
여보! 죽을 때도 함께 죽자고 했던 말 지키지 못하여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거짓말쟁이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존경하고 사랑해요.
세상은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김조영 대전대 한의학과 본과 3학년
어린 시절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열등감 때문인지 친구들이 조금만 농담 하거나 장난치면 화만 냈다. 늘 친구들에게 외면당했고, 문제아로 찍힐 정도였다.
그러다 점차 수학에 흥미를 들이게 되었다. 수학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친구들도 나를 달리 보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못해도 공부만 잘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중학교 입학 후 치른 첫 시험에서 전교 4등을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평이 돌자 모두 나를 좋게 보았다. 하지만 중학교 공부는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영어, 수학, 과학 경시 대비 학원, 특목고 대비 학원 등을 보내셨지만, 그 모든 공부를 소화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리고 노력할 끈기도, 인내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지원했던 경시대회에서 별다른 상을 타지 못했고, 특목고 입시도 고배를 마셔야 했다. 결과가 나의 실력을 말해주었다. 친구들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나의 말들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괴로웠다. 내 자신과 세상을 그렇게 속이며 살았다는 것 또한 너무나 괴로웠다. 나의 모든 행동이 정말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그놈의 공부 잘한다는 칭찬이 뭐기에, 그 칭찬을 듣기 위해 세상을 속여야 되나.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 세상을 속이지 않으리라.
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좋아하던 게임, 싸이월드 등은 아예 접었다. 잠이 와도 놀고 싶어도 참으면서 오직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갔다.
나는 세상을 향해 수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세상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내가 꿈꾸던 한의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내가 중학교 때 했던 그 수많은 거짓말이 그 당시에는 나를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완전 바뀌게 만들었고, 새롭게 성장하게 했다. 뭔가를 진정으로 얻고 싶은 게 있다면 그만큼 움직이고 부딪치고 노력해야 한다는, 세상의 답을 알게 된 것이다.
엄마는 다 알고 있었단다
권지예 52세. 소설가. <4월의 물고기> 저
거짓말,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금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동생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집 골목 앞에는 늘 ‘뽑기’니 ‘달고나’니 하는 군것질 장사가 있었다. 연탄불에 설탕을 녹여 만든 납작한 설탕 과자에 여러 가지 모양의 틀을 찍어 그 틀대로 과자를 다듬어 오면 몇 가지 상품을 뽑을 수 있거나 덤으로 설탕 과자를 더 먹을 수 있었다. 동네 조무래기들처럼 나 또한 그 재미에 한없이 빠져 있었다.
그날도 어머니 지갑에서 동전을 슬쩍 해가지고 나서는데 세 살배기 남동생이 같이 가자고 쫓아 나왔다. 귀찮았지만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저만치 ‘뽑기 판’ 주위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어린 동생을 옆에 앉히고 나도 설탕 과자 하나를 쥐고 앉아 ‘쪼기’ 시작했다. 동생도 좋아라 궁둥일 들썩였다. 얼마나 정신없이 그 일에 매달렸는지 허리가 아파 기지개를 켜며 둘러보니 동생이 안 보였다.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었다.
이 녀석이 집에 갔나, 하며 집으로 달려가 보니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와 같이 있는 줄 알고 계셨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온 건 거짓말이었다. 어머니가 금지하는 ‘뽑기’를 했고, 무엇보다 그것을 하기 위해 지갑에 손댄 것부터 불어야 하니 애초에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난 친구네 집에 숙제하러 갔었는데…." "아니, 그럼 얘가 어디 갔다니?"
어머니는 사색이 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이웃들 또한 모두 모른다고 했다. 아무도 내가 동생과 함께 ‘뽑기 판’에 있었던 사실을 몰랐다. 나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지만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했다.
사연인즉, 우리 옆 동네에 사는, 너무나 아이를 키워보고 싶었던 늙은 과부가 골목을 헤매는 동생을 보자 욕심이 나서 데려다 키웠고, 그걸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파출소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대통령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울 자신 있었다며 동생과 떨어질 때는 통곡을 하더란다. 어머니는 그 후 정성스럽게 떡을 만들어 동생과 함께 아주머니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리곤 했다.
순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한 철없는 거짓말이었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죄책감에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은 조숙한 아이가 되어간 것 같다. 거짓말과 진실, 그리고 참된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동생을 찾지 못했다면 어린 가슴에 감당하기 힘든 비밀을 간직하며 어두운 터널 같은 인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몇 년 전에야 어머니께 그 비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놀란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였다.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하면 자식을 둘이나 죽일 수 있기에 모르는 척했어. 없어진 애도 애지만 멀쩡한 눈앞의 자식도 살려야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나 또한 아이를 둔 엄마이기에 더 절절히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렇다. 거짓말조차 감싸준 엄마의 사랑이 나를 키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