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녀, 방문을 활짝 열고
세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다
김진영 35세. 프로그래머.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집에만 있기를 좋아했다. 멋진 풍경을 봐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소풍, 수학여행, 엠티….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여행들은, 발표되는 순간부터 갔다 올 때까지 스트레스였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고 적응하는 게 어려웠다. 어딜 가도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스물세 살 때 친한 친구와 일본 도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 친구가 너무나 가고 싶다고 해서 따라나선 여행이었다. 이번 기회에 나도 새로운 경험을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와 달리 나는 여행 내내 즐겁지가 않았다. 가는 장소마다 묘하게 싫은 구석들이 있었다. 기껏 해외까지 가서 그렇게 김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후로는 정말로 아주 오랫동안 여행을 가지 않았다. 역시 ‘여행’이란 것은 별로 즐겁지도 않고 피곤하기만 한 거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며 다들 휴가 계획을 세울 때 나는 그냥 집에 있었다. 남들은 답답하면 훌쩍 떠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냥 나만의 공간에 있는 게 편했다. 그러면서 여행을 좋아하거나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왜 저렇게 못 하지?’ 하며 비교했다.
그러다 우연히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며 단순히 여행뿐 아니라 삶이라는 여행 자체를 정말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자꾸 안으로만 은둔하려 하고, 나에게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과만 있으려고 했다.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이 최선이자, 최고라 여기며 그에 안 맞는 장소나 사람들은 멀리 했다. 내가 세상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에 감사하기는커녕, 세상이 내 사소한 기분까지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내 기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세상에 단단히 토라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수련을 통해 그런 마음들을 모두 빼내기로 했다.
미련하게 쌓아놓기만 했던 마음들을 하나하나 버려나간 끝에, 드디어 만나게 된 진짜 세상은, 놀랍게도 완전함 그 자체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살아 있게 하는 우주의 정신,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도 있었고, 어디에 가도 변치 않는 참마음이었다. 지금 하는 행동이 최선의 선택일까,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런 고민들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집과 여행지를 서로 다른 곳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도 모두 나였다. 마음수련을 하고 마음이 열린 만큼 나는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일본도 가고, 남미, 미국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이제 아무리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겨도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다. 지구 반대편을 가는 것과 집 앞 슈퍼에 가는 것이 다를 이유가 없었다. 직업상 컴퓨터 앞에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할 때도 많지만, 그 또한 휴양지에서 산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난 그저 불필요한 가짜마음들을 버렸을 뿐인데 이렇게 근사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렇게 신나게 살려고 세상에 나온 것이었구나. 나는 매일매일 ‘세상’이라는 최고의 여행지를 여행하고 있다. 이보다 더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장모님, 이제 저희가
소의 빈자리 채워드릴게요
김 현 완산여고 교사.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1가
“농사일을 못 놓겠으면 소라도 키우지 마세요.” 2005년 장모님 일흔한 번째 생신 때, 8명의 딸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10여 년 전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나시고, 적적해하는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이라도 가려고 해도 ‘소’ 걱정에 집을 비우지 못하셨다. 게다가 혼자 농사일에 소까지 건사하다 보니 더욱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를 키우지 말라는 딸들의 말에 장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것들 너그 아버지 때부터 키워 온 것이다. 저것들 없으면 내가 너그 아버지 영원히 떠나보내는 것 같아 데리고 있는 거여. 그리고 저것들이래도 있응게 밤도 덜 무섭고 덜 적적하다. 내가 저것들 건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저것들에 의지하고 사는 게여.”
그 뒤로 어느 자식도 장모님에게 소를 팔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장모님 모시고 여행을 가겠다는 바람을 접었다.
옛날부터 농촌에서의 소는 재산 목록 1호이자 또한 한 식구처럼 애환을 함께하는 존재였다. 장모님은 당신의 밥은 안 챙겨도 새벽 일찍 쇠죽을 끓여 먹이시는 등 소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하셨다. 그 마음을 아는지 해마다 송아지를 두어 마리씩 낳아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었다. 소와 한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웃지 못할 사연들도 많이 있었다.
한번은 어미 소 한 마리가 송아지를 낳았을 때였다.
“한 두어 시간 뜸 들이더니 송아지를 낳았지. 그런데 송아지가 ‘수놈’이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이왕이면 암놈이나 낳지’ 하지 않았던가. 수송아지보다 암송아지가 조금 더 비싸거든. 헌디 내 말을 에미 소가 들었나 봐. 그때부터 지 새끼를 발로 차고 난리를 피는 것이여. 처음엔 뭐라고도 하고 타일러도 봤는데 당초 새끼를 붙여주질 않는 것이여.”
“그래서 어찌 하셨어요?” 장모님 말씀에 우린 깜짝 놀라 물었다. “어찌 허긴, 싹싹 에미 소헌티 빌었지.”
장모님은 “내가 잘못했네. 내가 말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주고 어서 새끼 젖 주소” 하고 몇 번이고 빌었다고 했다. 그때서야 어미 소가 송아지를 발로 차지 않았는데 이번엔 송아지 새끼가 어미젖을 먹으려고 하지 않아 또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송아지도 어미 소한테 섭섭했던 것이다. 결국 어미 소와 송아지는 화해를 하고 잘 지내게 되었는데, “내 이참에 큰 공부했당게” 하시며 장모님은 크게 웃으셨다.
그렇게 소 얘기라면 손주 자랑하듯 신나 하시던 장모님께서 언제부턴가 “소를 팔아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힘이 있는 데까정 키워 볼라꼬 했는디 요놈의 무릎이 따라두덜 안 히여.” 하지만 팔아야지 팔아야지 하면서도 미련과 서운함 때문에 계속 키워왔던 소들을 결국 작년에 모두 파셔야 했다.
“서운혀도 어쩔 수 없지. 이젠 힘이 부쳐서….”
그리고 우린 처음으로 장모님을 모시고 1박 2일 여행을 갔다. 손자들이랑 함께 다니며 무척 흐뭇해하시던 장모님을 뵈며, 어쩌면 장모님께 자식보다 더 자식 노릇을 해주었던 것은 ‘소’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소의 빈자리를 채워드려야겠다.
걱정 말고 떠나십시오,
여행의 신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노동효 39세. 여행 작가
“나, 내년 여름에 회사 그만두고 히말라야로 갈 거다.” 안정된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꿈이었던 히말라야에 가겠다는 L에게 나는 말했다.
“꼭 가겠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둬라. 내년 7월이 되면 넌 또 ‘내년’ ‘다음에’ 그러고 있을 것이다.” 나의 말에 L은 멈칫했고,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갔다 와선, 뭐 해서 먹고사냐?” “걱정 마. 지금의 너와 히말라야에서 돌아온 너는 이미 다른 사람일 테니, 지금 네가 그것을 미리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L은 결단을 내렸고, 스무 살 때부터 꿈꾸었던 설산 원정대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룬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푸르른 스물, 나 역시 무작정 길을 떠나 이 행성의 반 바퀴를 돌았던 적이 있었다. 동서경 0도인 런던 그리니치천문대에서 프라하, 부다페스트, 로마, 이스탄불, 베이징 등의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여 112일 만에 부산의 집까지 도착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야간열차나 장거리 버스를 잠자리로 이용했던 탓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른 도시였다.
박구환 작. <peach blossom 3>
woodcut. 74×51cm. 2008.
인간의 수명이 백 년이라면, 우리는 백 년간 작게는 ‘한국’ 크게는 ‘지구’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간다. 가치관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 단 한 번의 생을 그런 ‘틀’ 속에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루한 생활일지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아 보았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과거의 관계와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과 자세를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어느새 영국에서의 삶도 1년이 훌쩍 지나갔다. 모든 순간순간이 경이로웠다. 들꽃 한 송이, 구름 한 점까지. 더 이상 떠나야겠다는, 떠나 있겠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을 필요조차 없었다. 세계를 새롭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어린애가 되었으니까.
이젠 고국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너무 싱거웠다.
바다를 만나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길을 더듬어가며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해서 귀국하기로 했다. 첫 번째 경유지는 체코 프라하였다. 이곳에서 우연히 야간 택시 운전수와 프라하의 대학생을 만났다. 이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룻밤을 보냈고, 그 인연으로 폴란드에서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숙박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헝가리에서 만난 부랑자는 돈을 구걸하려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는 내가 그날 가장 먹고 싶었던 아침 식사를 아무 조건 없이 시켜주었다. 그렇게 매 순간 우연처럼, 사람들을 만났고 또 헤어졌다. 물론 로마에서는 소매치기를 당해 100만 원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파키스탄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또 다른 만남으로 나를 이끌었다. 천사처럼 나타나 나의 앞길을 안내하고 돌봐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가벼운 주머니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나침반으로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알았다. 미지의 길에서는 언제나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여행의 신이 어깨에 내려앉으며, 그 신은 고난의 모험을 선택한 이들에게 반드시 무언가 보여준다는 것을.
아무리 힘든 여행길이라 할지라도 내일을 위한 계획은 하되, 걱정은 하지 마라. 당신을 내려다보던 여행의 신은 당신이 정말 간절히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 곧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