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주치의 이종욱 WHO 사무총장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 수장이었던 고(故) 이종욱 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2003년 1월 선출되어, 같은 해 7월 제6대 WHO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결핵, 두창(천연두), 에이즈, 소아마비와 같은 질병을 물리치는 데 기여함으로써 ‘백신의 황제’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렸다. 하지만 정작 그의 헌신적인 삶과 업적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삶의 무대가 대부분 국제 사회였고,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헌신적인 삶을 살다간 이종욱 박사의 삶과 생애를 들여다본다.

정리 김혜진 & 사진 제공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1981년 남태평양에 위치한 조그만 섬나라 사모아에 한 동양인 의사가 도착했다. 태평양 섬들을 오가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 중인 이종욱 박사다. 그는 청진기와 같은 의료 기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직접 환부를 쓰다듬으며 진료했고, 이런 모습을 수행하는 현지 의료진들에게 보여주며 진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종욱 박사에게 개발도상국의 보건의료인 양성은 평생의 꿈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약 26개 개발도상국 350여 명의 보건의료 인력이 한국을 찾고 있다. 이른바 ‘이종욱 펠로우십’이라 일컫는 이 프로그램은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뜻을 잇기 위해 개발도상국의 의료진을 대상으로 하는 후진 양성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 선진 의료 기술을 익혀 자국의 국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뜻은 그의 삶에서 비롯됐다.

이종욱 박사는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의 경험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갖게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어머니, 두 형제와 서울서 대구까지 60일 동안 눈보라 속을 걸었을 때 그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처음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것이 그가 봉사하는 삶을 선택했던 이유였다. 대학 시절에는 경기도의 한센병 환자촌 ‘나자로 마을’에서 활동을 벌였고, 1994년에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HO 본부로 갈 때까지 남태평양 한센병 퇴치 팀장으로서 남태평양 오지에서 진료 활동을 벌였다. 그는 “내가 처음 WHO에서 취업한 것은 월급이나 여러 조건들이 좋아서였다. 숭고한 사상을 가지고 취업한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WHO 예방백신국장으로 근무하며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선포해 1년 만에 소아마비에 걸리는 비율을 인구 만 명당 한 명 이하로 떨어뜨리며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고, 결핵국장으로 있을 때에는 비싼 결핵약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국제의약품기구를 만들어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것.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제6대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12월, 서남아시아 지진 후 파키스탄 내의 캠프에서 겨울을 보낸 사람들의 보건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

“이 일이 과연 옳은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해야 해”

이종욱 박사가 WHO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며 가장 중요하게 내건 공약은 바로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항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투여하는 치료 사업인 ‘3 by 5’ 사업이었다.

2005년까지 개발도상국에 거주하는 3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항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약값이 너무 비싸서 6백만 명의 환자 중 40만 명만이 약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환자 대부분이 의료 체계가 빈약한 아프리카 회원국인 데다, 확보되지 않은 예산 등으로 불가능한 공약이라는 직원들의 우려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백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에게 약을 공급했던 것. 이는 큰 전환점이 되었고, 공감대를 만들어 모든 국가의 관심과 지지를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08년 비로소 3백만 명이 치료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WHO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 중대한 질병이 발생하거나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위기관리센터 ‘전략보건운영센터(SHOC)’를 만들어 신종플루 등 각종 재난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에 이른다.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해야 해. 돈이 없어서, 전문 인력이 부족해서, 같이 일할 지원 인력이 필요해서, 회원국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렸다가….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면 한이 없거든. 옳은 일을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그러나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결국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셈이지. 이건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만도 못한 죄악이라네.”

이종욱 박사는 현지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직접 그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무총장 취임 후 처음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쾀랑가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이종욱 박사는 3년 동안 60개국을 순방, 병들고 가난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기 위해 고된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낸다네”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긴급한 의료 지원을 필요로 하는 60개국 이상을 방문했고,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질병의 퇴치 기금 마련을 위해 각국 정부 지도자와 기업인, 유명 인사들의 관심과 협력을 구하는 데 헌신했다. 1년에 150일 출장, 비행기로 30만 킬로미터 넘게 이동하며 이등석 좌석에 두 명의 수행원을 동반했고, 때론 혼자 다녔다. 자기 소유의 집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 각국의 국가 원수를 자주 만나고 좋은 음식만 먹고,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회의를 하지. 대접을 받다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혹시 교만해지고 또 건방져질지 말이야. 그래서 나는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낸다네. 은퇴하면 한 사람의 자연인 이종욱일 뿐이지.”

2006년 5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과로로 숨졌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Man of action 행동하는 사람’

“이종욱 박사는 보건계의 수장이었다. 그의 지도력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종욱 박사의 원칙, 온정, 추진력 덕분에 노력과 결단만 있다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세계적 보건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박사의 신념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 그의 죽음이 세계의 건강 공동체에 비극적인 상실이긴 하지만, 세계는 그의 비전과 영감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보다 건강하고 보다 평등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대한 그의 공헌은 인류의 영원한 유산이 될 것이다.”

– 빌 게이츠,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대표

파키스탄 지진 재해 지역 방문. 2005년 12월. 파키스탄 아바스 의과학연구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9세 소녀 아미나. 지진으로 인해 집이 붕괴되었을 때 그녀는 잔해에 발이 잘렸다. 이종욱 박사는 “아미나 가족과 같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인류의 주치의 이종욱(1945~2006) 박사는 서울대학교 의예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센병 환자 등을 치료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던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자, WHO 서태평양 지역 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으로 국제기구에 들어갑니다. 이후 20여 년간 주요 요직을 거치며 뛰어난 성과를 남겼으며, 2006년 5월 22일 WHO 총회 준비 중 과로사로 서거합니다. 이 글은 <이종욱 평전>(데스몬드 에버리 지음, 이한중 옮김) 등의 자료를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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