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나와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만났던 소중한 순간의 이야기

엄마랑 여행하길 정말 잘했다

김윤호 27세. blog.naver.com/kimyuenho

울 엄마는 충청남도 시골 땅에서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에 매우 충실하게도, 어려서부터 살림 밑천 노릇을 톡톡히 하셨단다. “예쁨받아도 모자랄 국민학생의 손으로 동생들의 기저귀를 갈거나 산속에서 땔감을 주워 와야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게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라.” 울 엄마의 아버지는 젊고 건장했지만, 가정적이지는 못했다. 살림 밑천을 충분히 활용하셨고, 가정사에는 충실하지 않으셨다.

울 엄마는 가방끈이 짧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울 아빠랑 결혼하고도 삶은 그리 넉넉지 못해, 그 흔한 해외여행 호사 한 번 못 누려봤다. 그런 울 엄마는, 그래도 항상 긍정적이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불만 많은 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해준다.

혼자만의 긴 여행을 가려고 준비하는 내게 엄마가 “100만 원이라도 보태줄게, 돈도 없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엄마의 말이 나에게는 ‘엄마도 가고 싶다’라고 들렸다. 평생 희생만 하며 사신 엄마에게도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 같이 갈래?” 울 엄마 입가에 퍼지던 완연한 미소, 대답으로 충분했다. 비행기 예약을 마치고 여행을 준비할 때였다. 예기치 않게, 외할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셨다.

나는 ‘외할아버지는 엄마를 끝까지 붙잡는가 보다…’ 싶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나의 여행은 엄마와 함께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는 여행이 되어버렸기에, 여행을 3주 늦추면서까지 외할아버지의 차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외할아버지께서는 쉽게 일어나지 못하셨고,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장녀로서 아버지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쉽사리 여행을 결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감사하게도, 엄마의 형제들과 외할머니가 적극 지지해주었다. 게다가 엄마가 감당해야 할 모든 일들을 아빠가 대신 해주겠다고도 하셨다. 덕분에, 엄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외할머니께서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엄마에게 편지와 함께 여비까지 주셨다.

‘사랑하는 우리 딸, 외손자랑 여행 잘 다녀오너라.’ 그 짧은 글을 읽는데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작년 연말 60일간의 남미 여행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아들과 여행 가는 게 마치 꿈꾸는 거 같다고 말하던 엄마.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매 순간 순간이 생생하지만, 내가 엄마랑 여행하길 참 잘했다고 느꼈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남미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여행 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터라,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다녔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만난 한 여행자가 택시 강도를 당했다는 말에 택시보다는 로컬 버스를 이용했다. 그러나 페루의 쿠스코는 버스 시스템이 전무한 수준이라, 부득이하게 다음 도시인 리마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데 긴장이 풀렸던 탓일까? 짐을 내리고 버스터미널로 향하는데, 어머니께서 짐 하나를 두고 내린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그랬다. 어머니는 급하게 내리느라, 가방 하나를 놓고 내렸고, 공교롭게도 그 안엔 가장 중요한 여권과 귀중품들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셨고, 나는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팽개치고, 택시를 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단 호스텔로 다시 돌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버스 일정도 변경해야 했고, 여권을 찾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기에, 심신이 지친 어머니를 호스텔에 두고, 잠시 다녀오겠노라 하고 홀로 시내로 나섰다. 한인 식당 사장님이 나를 위로해주며, 방법을 알려주었다. 여권 재발급을 받기 위해 경찰 리포트를 받고, 여행사 사장한테도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등 모든 조치들을 취하다 보니, 어머니와 약속한 시간보다 상당히 늦어졌다. 밤늦게서야 호스텔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촉촉한 눈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하시면서 손을 잡으시는데, 얼마나 긴장하셨던지 손에 땀이 흥건하셨다. 어머니는 여권보다 귀중품보다, 나를 가장 많이 걱정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네가 왔으니 됐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는데, 여행 일정과 잃어버린 돈만 걱정했던 내 마음도 그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지만, 어머니와 함께하기에 쉽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지금도 엄마와 나는 여행 가서 있었던 추억을 나누곤 한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함께했던 그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행복해지는 엄마와 나. 아, 엄마랑 여행하길 정말 잘했다!

강예신 작.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
89×130cm. Oil on canvas. 2011.

그리움이 쌓이는 히말라야

김인식 46세. 자영업. 대구시 남구 대명3동

아마도 중학생 때였지 싶다. 놀자고 부르는 친구도 없고 마땅히 할 일도 없어 애꿎은 텔레비전만 이리저리 틀어대다 어느 한 장면에 꽂혀 한참을 꼼짝 않고 앉아 들여다봤다. 거대하게 펼쳐진 설산, 그 산을 오르려고 애쓰는 등반가들의 거친 숨소리.

‘어? 우리 동네 뒷산(가야산)이 제일 높은 줄 알았는데… 저건 무슨 산이지?’ 그렇게 히말라야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놓았고 강렬한 그날의 인상은 가슴 한켠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꼭 히말라야에 가봐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그동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무던하게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작지만 온 열정을 다해 가꿔가는 일터가 있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고 소중한 나의 반쪽이 있음에 늘 감사했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 문득문득 마음이 허전해져 올 때가 있었다. 앞만 보고 사느라 그간 잊고 지낸, 가슴 한켠에 묻어둔 내 작은 꿈의 꿈틀거림이었으리라. 텔레비전이 아닌 진짜 히말라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조금씩 피어올랐고 눈을 감으면 거대한 산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즈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히말라야에 대한 간절함에 강하게 불을 지핀 이가 있었으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었다. 간만에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히말라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본인은 수년 전에 다녀왔고 꼭 한번 권하고 싶은 여행지라는 말에 나는 큰 용기를 내게 되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못 갈 이유가 더 많은 게 현실인지라 비행기 표부터 끊어 놓으면 어떻게든 가게 된다는 지인의 말에 2012년 12월 31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일찌감치 8월 초에 끊어두고 우리 가족은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준비에 들어갔다.

생애 첫 해외여행인 데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는 자유 여행이다 보니 여권부터 시작해서 언어, 중간 경유지의 숙소 예약 및 트레킹 준비물 등 준비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트레킹을 위한 체력 단련도 필수였기에 틈틈이 운동과 산행도 병행해야 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내는 나에게 종종 이렇게 묻곤 했다. “여보, 우리 말야…. 네팔에 도착은 할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갈 수 있지.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내심 불안하고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원래 그런 거 아닐까? 늘 동경의 대상이지만 막상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면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동반하는 거. 그러기에 영혼을 살찌우고 마음을 훌쩍 자라게 하고플 땐 여행이 최고의 명약인지도 모른다.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차근차근 준비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17일간의 네팔 여행 및 히말라야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올 수 있었다.

간절하게 보고 싶던 히말라야를 원 없이 보았고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참으로 작은 존재라는 것도 느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걷는 11일 동안의 트레킹에서는 고산 증세로 가족 모두가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고통을 동반한 대가로 얻게 되는 자연의 고귀한 선물들을 많이도 받았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관이었던 푼힐의 일출, 창을 열면 눈앞에 펼쳐지던 설산의 파노라마,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던 밤하늘의 별들,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이어지던 돌계단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네팔 친구들과 좋은 여행객들.

음식과 고산 증세로 힘들 때도 있었지만 여행 막바지로 접어들자 일정을 좀 더 길게 잡을 걸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참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기르며 네팔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그리움 한 자락을 히말라야에 두고 왔다.

문득 히말라야가 미친 듯이 그립고 다시 가고픈 마음이 강하게 이는 순간이 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막연하게 품었던 꿈처럼 다시금 히말라야를 가슴 한켠에 품었다. 머지않아 나는 또다시 히말라야를 보러 갈 것이다. 히말라야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에.

강예신 작.
<얼룩얼룩 꿈꾸기>
60×45×4cm. Mixed media. 2013.

모르는 이들의 집과 차를 나누다, 공유 여행

신기철 26세. 대학생.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작년 여름 우연히 공유 여행과 관련된 공모전을 알게 되었다. 평소 여행을 자주 다녔던 나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공모전에 지원했다. 운 좋게 여행 지원금을 받아 4명의 대학 친구들과 함께 공유 경제를 활용한 전국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공유 경제의 사전적 의미는 ‘물품을 소유가 아닌 서로 대여해 주고 차용해 쓰는 것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카풀’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남과 함께 나누어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 여행은 한마디로 모르는 사람과 집과 차를 공유하며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와 친구들 역시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었기에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계획을 짜나갔다. 모두 호텔관광경영학을 전공하는 같은 과 친구들이라 여행의 테마는 ‘축제’로 했다. 작년 여름 축제가 계획돼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서울-제주-부산-대구-여수-순천-서울로 돌아오는 6박 7일 일정을 계획했다.

출발 전 ‘비앤비히어로’ 사이트를 통해 각 여행지마다 숙소를 모두 예약해 놓고 마음 편히 제주도로 출발하였다. 비앤비히어로란 여행지 주민이 제공하는 숙소를 연결해주는 사이트다. 개인 소유의 집부터 기존 게스트하우스 등의 남는 공간을 여행자들이 쉽게 검색하고 예약, 결제할 수 있다. 제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 주인아주머니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셨다. 아들처럼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제주도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과 곳곳의 숨은 맛집에 대한 고급 정보도 상세히 알려주셨다.

제주도에서 다시 공항으로 이동할 때는 ‘티클’을 이용했다. 티클은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같이 이동할 수 있도록 ‘카풀’을 중개해주는 서비스이다. 티클을 통해 제주에서 근무하는 어느 여성분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공항 가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외에도 대구에서 홀로 사시는 할머니 집에서의 하룻밤, 4명의 따님을 모두 서울로 보내신 후 떡집을 운영하시는 여수의 딸 부잣집, 축제 홍보위원이었던 한 아주머니네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에서 묵기도 했다. 모두가 자식들을 타지로 보내신 정 많은 부모님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 맺는 일을 좋아하는 분들이었다.

“이왕 사는 김에 조금 더 샀다”며 4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먹을 양의 고기를 구워주시기도 하며 친자식처럼 살뜰히 챙겨주시던 분들.

공유 여행은 단순히 저렴한 비용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가치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정’을 나누는 것이었다. ‘모텔이나 펜션을 예약하고, 렌트카를 탔더라면 돈만 더 쓰고 좋은 사람도 못 만났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선지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순간의 기억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잊히질 않는다. 그 후 함께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모두들 공유 기업을 적극 활용하고 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알리고 있다.

여행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목적지보다 여행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하고 느끼고 배우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테마와 방식으로 여행을 해보면 비슷한 장소라도 전혀 다른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방학이 다가오는 지금, 공유 여행을 계획해보는 건 어떠신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직도 좋은 분들이 많구나, 따듯한 정을 많이 느낄 것이다.

강예신 작.
<히치하이크-나를 데려가줘>
89×130cm. Oil on canva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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