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저를 바람둥이 취급합니다

저녁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서 빈둥대고 있는데 아내가 쌀이 떨어졌다며 마트 쇼핑을 원합니다. 내일로 미뤄 보지만 당장 내일 아침쌀도 없다며 차 키를 던져 줍니다. 차로 20분 정도 거리의 대형 마트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저것 생활용품을 고르고 있는 아내의 뒤를 카트를 끌고 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아이들 먹을 시리얼 코너 앞에서 아내가 무엇을 고를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서 아내 옆에서 같이 시리얼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셋이서 자리를 조금씩 이동하며 고르고 있는데 두 아가씨 중 한 명이 맨 위 칸의 시리얼을 빼서 보고 다시 넣어 두는데 약간 위태롭게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 칸의 시리얼을 꺼내는 순간, 그 위태롭던 시리얼이 마침 아래 앉아 있던 다른 아가씨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순간 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튕겨 나가 시리얼을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아가씨의 놀란 비명, 제 손에 쥐어진 시리얼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연신 감사하다는 두 아가씨의 인사를 받으며 저는 별말 없이 괜찮다는 손 인사를 하며 시리얼을 제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잠시 후 아내가 건넨 시리얼을 카트에 담고 라면 코너로 향하는데 관자놀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집니다. 곁눈질로 보니 아내가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가 더 따갑게 느껴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엄지손가락이었습니다. 좀 전에 시리얼을 낚아채다 선반에 엄지손가락을 부딪치면서 금방 멍이 들고 까진 자국이 눈에 띄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본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아주 영웅 나셨네. 30분 전에 소파에서 일어날 때는 열대우림의 나무늘보 같더니 좀 전에 시리얼 낚아채는데, 당신은 아주 거 뭐냐 색깔 변하는 도마뱀… 어?” “카… 멜레온?”

“그래, 맞아. 카멜레온이 혓바닥으로 파리 낚아채듯 눈 깜짝할 새 아가씨를 구하셨네. 그것도 부상 투혼까지 당하면서. 어디서 갑자기 그런 스피드가 나오디? 어? 고르라는 애들 시리얼은 안 보고 아주 첨부터 아가씨들 동선을 쫓아갔으니 그런 찰나의 위험에서 어린양들을 구하셨겠죠?”

이때 라면 코너에서 좀 전의 두 아가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아가씨들은 다시 눈인사를 하고 지나쳤습니다. 저도 짧게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습에 아내가 제 옆에 붙더니 나지막이 속삭입니다. “바람둥이 아저씨. 잘 봐… 혹시 저 위에 라면 박스라도 떨어질지 알아?” 깐죽이는 아내에게 꿀밤 시늉을 했습니다. 아내가 머리를 더 들이밀며 말합니다. “젊은 것들은 구해주고 늙은 건 줘 패냐?”

집에 와서 아내가 제 엄지손가락에 약을 발라주며 한마디 합니다. “이거 봐, 아무리 젊은 애들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해도 결국 약 발라주는 건 마누라지? 그러니까 한눈팔지 마세요. 바람둥이 아저씨~” 저도 아내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형우 엄마. 그 아가씨 머리 위에 떨어졌으니까 내가 손으로 낚아챘지. 만약에 당신 머리 위에 떨어졌으면 낚아챌 여유가 어디 있겠어. 내 몸을 날려 당신 덮었겠지….” 아내가 물끄러미 절 쳐다봅니다. 그리고 딱 한마디 하네요. “공구통이라든지, 통짜로 된 바둑판 같은 게 떨어져도?” 통짜 바둑판 세 변이 모이는 꼭짓점 생각에 대답이 약간 늦었습니다. 바로 엄지손가락이 꺾였습니다.ㅠㅠ

백일성(44)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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