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잠시 멈춰 서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딸아, 실수불감증에 걸려 더 많은 용기 갖기를

남희한 34세. 항공 SW 엔지니어. 경남 사천시 정동면

이제 세 살이 되는 나의 첫딸아, 아빠는 가끔 햄버거 가게에 가게 되면 혼자서 실소를 머금는단다. 생각하면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우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는,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가는 추억의 실수담 덕분에.

2011년 5월, 아빠와 엄마는 미국 파견 후 2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랜드캐니언을 방문하게 된단다. 가는 도중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맥도날드에 들리게 되지.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에 있는 맥도날드이기에 그네들이 하는 말은 모두 영어였단다.

그곳에서 아빠는 주문을 하게 되지. 세트 메뉴 하나와 음료 하나를 주문하는 데 대략 10여 분 정도 걸렸던 것 같구나. 그네들과 아빠는 모두 영어를 썼지만 서로가 서로의 말을 100%로 이해하지 못했단다. 그네들의 갸웃거림의 횟수와 의문형의 질문들은 셀 수 없이 늘어갔고 아빠 뒤에 늘어선 사람들의 수도 그에 비례해 점점 늘어만 갔단다.

반복되는 Yes와 No의 외침 속에서 드디어 기나긴 주문은 끝이 났고 몇 분 후 아빠의 손엔 햄버거 세트 하나와 해피밀 세트 하나, 그리고 음료 컵 세 개가 들려 있었지. 아빠가 원했던 건 햄버거 세트 하나와 음료 하나였는데 말이지.

그것들을 받고 나니 바로 뒤에 선 한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킥킥거렸는지 알 것 같더구나. 주문한 상품을 받고 당황한 날 보곤 한없이 웃던 그 할아버지와 함께 아빠 역시 너무 허탈해 한참 동안 헛웃음을 흘렸단다.

그런데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안타까운 것이 “왜 저런 실수를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란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저런 실수를 만들고 고치고 또 만들고 고쳤다면 영어든 뭐든 더 많이 배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는구나.

저 사건 이후 유사한 몇 가지 사건의 여파로 한 달여 동안 주문에 노이로제가 걸리다시피 했던 것 같다. 최대한 간단하게, 항상 주문하던 것으로, 그리고 되도록 교과서적으로 말해 줄 것 같은 백인에게…. 한동안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또 다른 계기로 극복하긴 했지만 당시의 소극적인 태도는 1년 넘는 파견 기간 동안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다잡고 적극적이던 아빠를 위축시키곤 했단다.

딸아.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크건 작건 좋건 나쁘건, 아빠는 그 실수들이 네가 좀 더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누구나 실수는 한단다. 그때 누군가는 실수에 겁을 먹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누군가는 실수에서 배우고 해결책을 찾아 ‘실수’를 ‘경험’으로 만들어버리지. 그러니 딸아, 부디 실수불감증에 걸려 많은 실수를 소중한 경험으로 만드는 용기가 샘솟길 바란다.

조금 더 나은 인생을 걸어가길 바라며. 아빠가.

p.s. “A Meal No. 8 and a Happy Meal, please~” 이 주문은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고 두 번째로 그랜드캐니언을 방문했을 때 했던 주문이란다. 정확하게 나왔지. 흠.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크리스마스 토끼>
32×48cm. 종이에 아크릴. 2000.

며느리의 실수에 대처하는 시어머니의 지혜

이명옥 56세. 장애인복지신문, 작은책 객원 기자

어느 해 정초였다.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살짝 놓치는 바람에 밥그릇과 냉면 대접이 깨지고 컵의 귀가 살짝 떨어졌다. 하필이면 떨어뜨린 밥그릇이 바로 시어머님 주발이었다. 당황해서 “어, 밥그릇이 왜 깨지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니는 얼른 다가오셔서 내 손가락부터 살피신 후, 깨진 조각들을 살짝 들어내시곤 “어디 다친 데 없니? 다른 조각이 또 있나 봐라” 하시며 내 손가락을 재차 살피신다. 어머니는 손이 멀쩡한 것을 보시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깨진 그릇을 말없이 다용도실 한켠에 치우셨다.

결혼 후 나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못마땅해 보이기에 충분한 실수를 시도 때도 없이 저지르곤 했다. 바지에 휴지, 손수건, 동전이나 돈을 그냥 두고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다반사. 때론 휴대폰을 놓고 나오거나 버스카드를 잊고 안 가져가 시어머니가 지하철역으로 가지고 나오시게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날이 개면 어김없이 우산을 지하철이나 어느 장소에 버려두고 빈손으로 덜렁거리며 온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덜렁거림이나 건망증에 속상해하며 안달하는 것은 내 자신이었고 시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을 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곤 했다.

“사람 무사히 들어온 것으로 된 거다. 우산이야 누군가 가져다 잘 쓰겠지. 잃어버려야 장사꾼도 먹고살지. 그런다고 잃어버린 우산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라.”

실수로 그릇을 깨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셨다. 단 한 번도 “왜 그렇게 찬찬하지 못하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안 다쳤니? 그러면 됐다” 하셨다.

이미 저질러진 일을 가지고는 절대 야단을 치지 않으시는 시어머니. 내가 시어머니를 존경하는 몇 가지 이유 중 첫 번째가 바로 지혜로움이다. 삶에서 묻어나는 지혜로 가득하고, 부지런하시고, 남 험담을 하지 않으시며, 상대방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 분이다. 결혼 후, 가난한 집 맏며느리인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정 파탄의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 그때마다 가정이라는 틀을 지키게 한 것은 아이와, 한없이 지혜로우신 시어머니였다.

내가 시어머니의 인품에 더 반하게 된 것은 시장을 같이 다니면서부터였다. 시어머니는 장을 보실 때 절대 물건값을 깎아달라거나 덤을 요구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한 주먹 더 얹어주려 하면 “그렇게 더 집어주면 뭐가 남겠느냐”며 손사래를 치시곤 하셨다.

그렇게 지혜로운 어머니와 20년을 넘게 살면서도 난 여전히 아들아이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금세 “야, 너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혹은 “너 그렇게 덜렁거릴래?”라며 야단을 치거나 똑같은 잔소리를 해대곤 하니 인생 수업 열등생인 셈일까?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혜를 닮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날을 꿈꿔본다.

요즘은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거동도 불편하시고, 자주 편찮으셔서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 그 지혜 모두 배워 저도 지혜로워질 때까지 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1학년 달>
31.5×49cm. 종이에 아크릴. 2014.

실수를 통해 알게 되는 그 사람의 온기

이영미 55세. 서예가, 사회복지사. 충북 청주시 흥덕구

어릴 적 앓았던 병으로 나는 청신경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지 않으면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증세까지 같이 겪게 되었다. 그래서 10년을 가르치거나 20년을 아는 관계라 해도 며칠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수십 번 다녀왔지만 아직도 엄마와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오직 한 개만 있는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도 매주 쓰지 않으면 외우지 못한다. 부모님 기일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생일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한번은 비영리민간단체 대표가 되어 방콕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꼭두새벽 4시에 청주에서 출발해서 인천공항에 갔다. 그런데 아뿔싸! 여권을 놓고 와버렸다. 동행들은 예정대로 탑승해서 출장을 갔지만 내 비행기 표는 취소하고 그날 마지막 비행기 표를 다시 예매했다. 안 그래도 일행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무처 직원들은 나 때문에 더욱 분주해졌고 나는 여권을 가지러 다시 인천에서 청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몇 시간 후 비행기에 올랐다. 방콕에 먼저 간 일행은 나를 세미나장으로 안내할 사람을 섭외해서 보내주었다.

‘WELCOME! 이영미!’ 그들은 이렇게 영어와 한글이 함께 쓰인 큰 피켓을 들고 공항에 나와 있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주최 측에서도 나 때문에 신경을 쓴 셈이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럽고 미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세 평안해진 것은 건망증으로 인한 내 실수에 대해서 아무도 개의치 않고 모두들 그런 경험이 있다고 토닥거려준 것이다. 그 경험으로 인해서 여권에 관해서는 건망증이 재발하지 않게 되었다.

한 번은 문하생들이 전국 공모전에 내는 작품을 열 개 정도 넘겨받았다. 가로 140센티와 세로 70센티의 작품들이었는데 마감을 끝낼 때 작품을 선별해주고 내 딴에는 도와준다고 내가 이왕에 가는 김에 작품을 접수하려고 작품과 원서와 출품비를 받았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마트로 가서 시장을 보았다. 마트의 빨간 카트에는 작품들이 들어 있는 긴 비닐종이와 부식들이 담겼다. 나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고 분주히 저녁을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뭔가 허전했다. 아뿔싸! 작품 열 개를 모두 카트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부랴부랴 마트로 다시 갔고 마트의 분실물 보관소와 폐지를 버리는 청소함 모두 샅샅이 뒤졌으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주최 측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마감을 하루 늦춰달라고 했고, 문하생들에게도 연락해서 차선 작품을 가지고 오게 하거나, 하루 더 작품을 제작해서 가지고 오게 했다. 그렇게 해서 열 명이 다시 작품을 만들어서 무사히 제출했는데 두고두고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문하생들은 내 실수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었다. 내 마음의 온기를 알아주는 문하생들은 때로는 나의 울타리가 되기도 하고 스승의 역할도 한다. 서로의 실수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은 마치 허리 잘린 산도 보듬어 안고 날마다 변하는 달도 품는 호수처럼 서로가 아직도 따스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아 무척 고맙다.

실수란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거울처럼 반영해주고,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집중하고 노력하게 해주는 아주 쓰지만 고마운 감초 같은 것이다. 또 나의 실수 또는 타인의 실수로 인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좀 더 진솔하고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상적으로 일으키는 건망증이 없어지기를 그렇게 바라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생기는 건망증과 내 신체적 장애 때문에 생기는 기억 장애가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애로가 있는 현실로 인해서 나는 반복 학습을 쉼 없이 하고, 그 덕분에 나도 모르게 이러한 반복 행동은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 내 삶의 목표를 향해 제대로 가는 거름이 되고 있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카밀라의 꿈>
24×35.5cm. 종이에 유화. 1989.

재산이 된 나의 실수들

최정숙 43세. 음식점 운영. 대구시 남구 대명3동

농사일로 바쁜 엄마를 도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들에 나가 피곤해할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저녁이라도 지어놔야겠다고 마음먹은 어느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밥은 했는데 반찬은 무얼 할까 고민을 하다 남은 감자조림 반찬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름 연구를 해서 똑같이 만든다고 만들어 보았다. 처음 만든 것치고는 그럴싸한 모양새에 나름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맛보시던 아버지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으니 간이 하나도 안 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금이나 간장으로 한 간은 눈에 안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도전 정신만큼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중학생 때였다.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해서 마늘 심는 날이라고 수업 마치는 대로 일찍 오라는 당부가 있었던 토요일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집에 와보니 새참으로 내어갈 모양인 칼국수가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삶아 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엄마는 한창 일하느라 바쁠 테니 내가 끓여 가야겠다 싶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국수 삶기에 돌입했다. 국수가 삶아지면 양이 많아져 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여야 한다는 사실을 중학생이 어찌 알았겠는가. 삶고 보니 많아 보이던 국물은 다 어디로 갔는지 국수만 찜통 가득이었다. 그래도 알아서 국수도 다 삶아 온다고 엄마가 대견해하시리라 생각하며 국수가 가득 담긴 찜통을 들고 논을 향해 걸어갔다. 중간쯤 갔을 무렵 바쁜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오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 국수 삶으러 가? 갈 필요 없다. 내가 벌써 다 삶았다. 한번 봐라.” 득의양양한 내 표정은 아랑곳 않고 미심쩍음 가득한 얼굴로 찜통을 열어본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가 니보고 국시 삶아 오라 하드나? 내가 삶으러 가는데 뭐하러…. 다 망쳐놨네, 국물은 다 어디 갔노? 할 수 없다. 뭐 지금 우짜겠노. 더 퍼지기 전에 빨리 가자.”

칭찬을 기대했던 나는 원망만 잔뜩 듣고 순간 서운함에 울 뻔했지만 하는 수 없이 엄마 뒤를 따라 논으로 갔다. 한창 배고플 시간에 국수를 한 그릇씩 받아 든 동네 아주머니들께서는 시무룩해 있는 나를 향해 “숙아~ 맛있다 맛있어. 우리 숙이는 우예 못하는 기 없노. 그라고 젓가락 쓸 필요도 없고 숟가락으로 떠먹으마 되고 좋다 좋아.” 이러시며 한바탕 웃음으로 위로해 주셨다.

고등학생 때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살림까지 도맡아 하며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한번은 식혜를 어떻게 하느냐고 엿질금 물을 밥통에다 붓고 취사 버튼을 누르는지 보온 버튼을 누르는지 모르겠다며 묻는 것이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취사 버튼을 누른다고 말해주었다. 엄마가 자주 식혜를 만드시는데 그렇게 하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했다.

다음 날 친구는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방 안 가득 흘러넘친 엿질금 물이랑 밥알을 닦아내느라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했다고 했다. 친구한테 미안했다.

이 에피소드 말고도 음식과 관련된 나의 실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른다, 못한다 하며 몸을 사리기보다 한번 해보지 하며 도전하다가 생긴 실수들이다 보니 다음에 할 때는 더 잘하게 되었고 요리를 하며 살아가는 나의 삶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안녕, 꼬마 물고기>
29.7×21cm. 종이에 오일. 1989.

월간 마음수련 6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 앙드레 단(André Dahan, 1935~)입니다. 그의 동화책 <안녕, 꼬마 물고기> <피에로가 된 자파> <내 친구 달>은 프랑스 옥토곤상(1991), 앙굴렘 국제만화 대상 등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슬로바키아, 일본 등지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고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등에 꾸준히 초청되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그의 작품은 인종과 천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전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앙드레 단의 한국 첫 개인전 <My Dear Friends- 앙드레 단 특별전>이 롯데갤러리에서 열립니다(4.30~5.23). 초창기 원화부터 앙드레 단의 도서 49권의 대표 원화, 판화 100여 점이 전시되며, 전시 진행은 앙드레 단이 평생 즐겨 썼던 친구(사랑), 달, 별, 해, 꿈, 성장이라는 소재들로 구성됩니다. 자료 제공 롯데갤러리 02-726-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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