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 있어 아내는




어제 출근하여 업무를 보던 중 전화로 늦은 부음(訃音)을 받았습니다. 내용인즉슨 한 때 절친했던 선배님이 그만 열흘 여 전에 작고하셨다는 것이었죠. 그것도 자연사가 아닌 스스로 음독에 의한 자살의.

“저런~ 그럼 고인이야 그렇다 쳐도 남은 자식은 어쩌라고 그런 무책임의 방종(放縱)을 했단 말인가요?” 전화를 건 선배님의 즉답이 이어졌습니다. “그야 뭐 내가 알 노릇이 있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데. 하여간 유추하건대 그 친구의 사인(死因)은 애초 그 친구의 아내 가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보네!”

한때 장사가 잘 된다며 술 좋아하는 제가 찾으면 공짜 술과 푸짐한 안주까지 아낌없이 퍼 주시던 ‘식당 사장’ 선배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처복은 없었던지 하여간 첫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만 그 형수님은 야반도주를 했다고 후일 타인에게서 들었습니다.

그것도 빈손이 아닌 선배의 얼추 전 재산을 몽땅 챙겨서 말이죠. 그로부터 선배님은 삶에 의욕을 잃고 술에만 탐닉하는 나날을 이어갔지요. 대저 남자란 건 철썩 같이 믿었던 아내가 배신의 칼을 날리면 금세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입니다.

아무리 불신의 파고가 갈수록 더욱 높아지는 즈음이라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세상에서 그래도 가장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여전히 조강지처일 테니까 말입니다. 평소 자연 다큐 프로그램을 애청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동물들의 지고지순한 모정(母情)이죠.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며 새끼들을 돌보다 죽는 가시고기는 논외로 친다손 쳐도 다른 동물들 역시도 자식사랑의 현주소는 ‘명확’합니다. 그 어떤 동물도, 새도, 심지어 짐승들조차 자신이 낳은 새끼를 버리는 부류는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람 구실을 못 하는 이를 일컬어 우린 이구동성으로 “짐승만도 못 한……!” 이라고까지 마구 욕을 하는 것이죠. 예식이 있어 결혼식장에 가 보면 지금도 여전히 주례 선생은 부부란 백년해로를 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더불어 부부의 사랑의 결실로써 낳은 자식을 오롯하게 잘 키우라고도 하시죠. 그래서 말인데 자신의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을 버리고 심지어는 남편의 재산까지 빼돌린 그런 악처는 과연 그 뱃속이 어찌 생겨먹은 걸까요?!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곤 하더라도 여전한 건 바로 이것 아닐는지요. 남자에게 있어 아내는 신뢰의 대상임과 동시에 영원한 동지이며, 또한 모두가 날 버려도 아내만큼은 우직한 황소 그 이상으로 의리까지를 겸비한, 어쩌면 유일무이의 우뚝한 태산이라고 말입니다.

가련한 선배님의 명복을 삼가 빌면서 새삼 천착하게 됩니다. 남자에게 있어 아내는 과연 무엇인가? 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