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한 걸음,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기 힘으로 일어서리라 마음먹는 것, 그것이 시작입니다.

저에겐 꿈 같은 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조연희 19세. 학생. 광주시 서구 화정4동

저희 집은 어렸을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옆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잘 집이 없어서 오빠와 함께 교회에 가서 자기도 했습니다. ‘죽을 만큼 돈을 벌어서 오빠를 먹여 살릴 거야’라고 결심한 게 제가 여섯 살 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절실했던 돈의 소중함과 가족의 소중함, 하지만 그것은 커갈수록 돈에 대한 원망과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큰아빠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글 쓰는 걸 되게 좋아해서 글쓰기 대회에 다니면서 상품 받는 재미로 지냈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독서 토론 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왕따로 지냈던 저는 남들 앞에선 말을 못했어요. 역시나 그 대회에 나가서도 입도 뻥긋 못 해보고 들어왔어요. 다음 날부터 선생님의 심한 구박과 아이들의 비웃음을 당해야 했고,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늘어갔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는 동안 저는 허구한 날 가출을 하고, 남의 돈을 빼앗고, 경찰서를 밥 먹듯이 드나드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사는 게 싫었고 저에겐 미래라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어린 우리를 버린 가족이라고 생각했고, 그들과 나중에라도 만났을 때 기뻐하게 될 일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장담했고, 자꾸만 제 자신을 망가뜨렸습니다.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가고 재판을 받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소년원까지 가게 되었어요. 소년원에서 저는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하는…. 결론은 제 자신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였습니다. 그곳에서 책도 읽고 미래도 생각하면서 나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가면 다시 그 생활이 반복될 거라는 생각에 소년원 선생님께 아예 다른 지역 쉼터에 보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년원 선생님들은 제 생각대로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쉼터에서 2년제 고등학교에 다니고 컴퓨터 학원도 다니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월간 마음수련>도 읽게 되었습니다. <마음수련>은 저에게 아주 큰 경험을 하나 하게 해주었습니다. 잡지를 보다가 예전에 제가 상처 준 친구 한 명이 떠오른 겁니다.

사춘기 때, 가출을 했다가 우연히 알게 된 친구였는데, 말도 제대로 안 해 봤으면서 다짜고짜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악담을 퍼부었던 적이 있거든요. 저는 메신저로 미안했다고 사과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 친구는 물론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답장이 왔습니다.

<난 너의 그 말 때문에 그 이후로 친구도 못 믿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도 못 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그 친구가 과연 나의 사과를 받아줄까 싶었지만 막상 그 답장을 받자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여전히 제 욕심만 채우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과를 하면서도 그 친구의 아픔보다는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친구는 제가 한 한마디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거부하며 외롭게 지냈는데 말입니다.

하이경 작. < Don_t frazile>

캔버스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

45.5×53cm. 2007.

너무나 미안하고 더욱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사과를 했고, 그 친구도 결국 제 사과를 받아주었어요. 요즘은 연락도 자주 하면서 지냅니다.

그 일 이후 세상도 아주 달라 보였습니다. 무슨 자격증이든 어떻게 해서든 다 따게 해주려는 쉼터 선생님부터 단골 PC방 아저씨까지, 사람들의 따듯함이 느껴졌습니다.

전 누구 한 사람의, 무엇 하나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이 계절과 이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 앞집 개, 그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크다면 큰 모든 것을 보고 지금 이곳까지 온 거였습니다.

2011년부터는 남들에게 그동안 상처 줬던 나쁜 마음들을 스스로 치료하고 싶습니다. 어른들에게 질리도록 듣던 말이 “사람은 꿈이 있어야 성장한다”였지만 저에겐 꿈 같은 건 없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저에게도 꿈이 생겼습니다. 청소년 상담사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비행 청소년들을 안아주고, 큰 바위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햇볕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나는 늘 아내에게 밥을 지어준다

박의흠 61세. 요리사.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2003년 12월 31일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당시 신제품 개발 업무 총괄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내가 사직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결혼 생활 30여 년 중 20년간을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회사 일 때문에 서울, 양산, 보령, 폴란드, 천안 지역에 부임하여 홀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내가 아들을 출산할 때도, 아내가 난소암 판정을 받아 수술할 때조차도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 수술 후에도 그 아픈 몸으로 아이의 교육까지 떠맡게 했다. 일에 푹 빠져 가족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졸음운전을 하는 바람에 죽을 뻔한 순간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살다가 그런 순간이 한 번, 두 번, 세 번이 되자 내 인생이 돌아봐지기 시작했다. 만약 차 사고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즈음 마침 정년퇴임한 회사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여유롭게 들려주신 여러 가지 말씀 중 그분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느끼면서, 나 또한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여생을 아내를 위해 보내야겠다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요리라는 해답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몸이 안 좋은 아내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생선, 일식으로 정했다.

하이경 작. <Visit… sometimes>

캔버스에 오일 및 아크릴. 145×120cm. 2010.

처음 2년 동안은 일식과 복어 자격증을 따기 위해 횟집에서 청소며 설거지까지 밑바닥 일부터 시작해 배웠다. 쉰이 넘은 나이에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의 지도를 받으며 배우는 일은 쉽진 않았다. 하지만 결심이 확고했기에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06년 살던 집을 리모델링하여 음식점을 내며 아내에게 약속했다. 이제는 당신을 위해 살겠다고. 암 수술 때조차 곁에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을 갚아주고 싶었다. 그 이후 나는 고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출근하기 전 늘 새 밥을 지어준다. 다시는 부엌일을 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30년여 만에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다. 꾸준한 식이요법과 등산을 병행한 결과 아내도 지금은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길이 있겠지만, 나는 새롭게 시작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처음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낸다고 했을 땐 아내도 놀랐다. 하지만 큰 병을 앓으며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기에 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다. 아내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보듬고 살았으면 좋겠다.

애들이 우리 엄마가 달라졌대요

유은경 44세. 호수인터내셔널 대표.

러시아 모스크바 거주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나는 교통이 혼잡한 사거리의 교차로 한가운데 홀로 내팽개쳐진 채로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남편은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업을 한 터였다. 나는 남편의 회사를 계속 유지하면서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변화를 막아보려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돈이 벌려도 돈이 없었고 돈이 안 벌려도 돈이 없었다. 항상 쫓기는 기분이었고 누구에겐가 주시를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술을 먹기 시작하였고 약에 의존했다.

회사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교제하기도 꺼렸다. 동정받기도 싫었고 쓸데없는 관심으로 인해 쏟아지는 여러 가지 말들이 상처가 되었다. 폭풍이 몰려오면 그 폭풍이 쓸고 간 잔재까지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잔인함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밉고 무서웠다. 대신 아이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아빠가 없는 자리가 티가 안 나도록 해주려고 기러기 가족이 많다고 하는 곳으로 이사도 하여 보았고, 학교도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겨 보았다. 그러면 상쇄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나의 착각이었다. 모래 위의 성처럼 이 어설픈 노력들은 나와 아이들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지켜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망가뜨려갔다.

할 만큼 하는데도 상황은 더 악화되자 아이들과 나는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할퀴며 극도로 지쳐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마음수련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 자가 들어간 것이라면 뭐든 다 싫은 때였는데도 마음수련 오리엔테이션을 받아보고는 이거다 싶었다. 살아온 삶의 기억들과 그에 묻어 있는 오래된 감정들과의 해원, 그리고 버리기, 그리고 나의 참 본성을 찾아가는 마음수련은 너무도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수련을 하며 어쩌면 나 자신의 모습을 이리도 모르고 살 수가 있었을까, 기가 막혔다. 남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회사 일을 해도 인정을 못 받을까 봐 전전긍긍해하며 자존심을 세웠다. 남편에게 하던 예우 이상으로 내게 안 하면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 아버지 역할까지 해서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버거워 ‘내가 누구 때문에 이방인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하며 아이들에게 폭군 노릇을 했다. 나는 항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온 세상에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절절히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나 때문에 너무도 지쳐버린 엄마와 아이들에게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마음의 변화는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하였다. 화가 날 때 화난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일단 멈춤을 하고 시간을 가진다. 아이들이 이젠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라며 웃는다. 감정이 앞서지 않고 짜증이 현격하게 줄었으며 말투가 온화해졌단다. 이젠 엄마의 관심이 집착이 아닌 진짜 사랑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봐주고 기다려주고, 나의 노력에 마음의 문을 열어준 가족에게 감사하다. 이제 보다 순한 얼굴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을 듯하다.

 

하이경 작. <오후 5시 39분>

캔버스에 오일. 72.7×91cm.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