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대한민력

지난겨울, 어머니와 설장을 보러 갔다. 해가 떴는데도 엄청 추운 날씨였다. 우리는 방앗간에 들러 떡국 쌀 석 되를 맡기고 찹쌀을 빻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다른 장거리를 보러 시장 속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찹쌀가루 봉지를 들고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도중에 서적 좌판을 벌여 놓고 앉아 있는 노인의 특이한 품새가 눈에 띄었다. 노인은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에 두툼한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망건을 쓰고 발목에는 요즘 보기 힘든 각반을 차고 있었다.

나는 잠시 쉴 겸, 찹쌀가루 봉지를 내려놓고 노인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대충 책을 진열해 놓고 앉아 있는 품새가 어찌 시들해 보였다. 장사라면 응당 자신이 진열해놓은 책을 마주 보고 앉아 손님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노인은 토라진 양반 어른처럼 좌판을 등지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책을 꺼내 진열하다 말고 그냥 둔 책 박스가 입을 떡 벌린 채, 하염없이 주인장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르신이 상심하거나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내가 알지 못한 깊은 뜻이 있다는 걸, 지나가는 바람이 일깨워주었다.

그때 시장통으로 얼음장 같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거친 겨울바람은 종이 상자를 휙 날려 보내고, 허술한 천막을 치마처럼 걷어 올렸다. 장꾼들은 허겁지겁 바람에 날리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장마당 사람들 모두 갑자기 들이닥친 돌풍에 잔뜩 움츠려 몸을 피했다. 하지만 노인은 의연했다. 그는 이미 닥쳐올 상황을 예견한 듯, 불한당 같은 칼바람이 달려들자, 어느새 커다란 우산을 펼쳐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어 고쳐 앉았다. 그랬더니 우산은 방패처럼, 등 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주었고, 정면에서 사선으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은 그대로 우산 안쪽으로 모여들었다. 그 평화롭고 안정된 노인의 모습을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자마자, 갑자기 ‘쾅!’ 하는 굉음이 들렸을 때였다. 그 소리의 출처는 노인의 바로 옆이었다. 노인 옆에 생선 좌판을 벌인 젊은 아낙네가, 꽁꽁 언 동태 상자를 해체하기 위해, 동태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려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지나가는 사람이 흠칫 놀라 돌아볼 정도였는데, 노인은 바로 옆에서 터지는 굉음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편안한 자세로 마냥 아침 햇살만 즐기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노인이 파는 책을 사고 싶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좌판에는 꿈 해몽, 약초한방민간요법, 천자문, 화초재배, 명심보감 등이 삐뚤빼뚤 제멋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격 면에서나 부피 면에서나 제일 만만해 보이는 얇은 책 한 권을 골랐다. 내가 계산을 치르자 노인은 또 다른 책을 권했다. 언뜻 보니 ‘한방민간요법’이라는 책이었다.

“요놈도 한 권 사. 총천연색이여. 싸게 해줄 텡게.” 하지만 대부분 책들은 너무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헌책 같은 새 책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차 안에서 책을 펼쳐보았다. 더듬더듬 표지를 읽어보니 ‘계사년 대한민력’이었다. 24절기와 농사, 예법과 명절 등 깨알 같은 한자로 쓴 가정 상식이 잔뜩 들어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 시절에는 한 해를 준비하는 요긴한 책력으로 대접받았을 성싶었다.

안타깝게도 한문에 약한 나에게는 ‘개발에 닭알’처럼 전혀 소용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뜨거웠던 내 충동구매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날 우연히 목격한 노인의 여유로운 일상과 신선한 지혜가 책 속에 오롯이 담겨,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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