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tagged "마음수련 우명 선생"

가장 편안한 친구, 우리 엄마를 소개합니다

지금도 엄마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만약 명상을 안 했더라면 아마 우리 둘 중 한 명은 이 세상에 있지 못할 거라고….” 그땐 그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다. 나는 어릴 때 문제아였다.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친구들을 괴롭혔고, 부모님 속을 썩였다. 그에 비하면 동생은 정말 양반이어서 항상 비교되었고, “동생보다 못한 놈”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늘 나를 의심하고, 체크하는 엄마가 싫었다.

이창욱. 미국 버지니아주 거주

중학교 때 엄마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고백했었다. 엄마는 당장 헤어지라고 하셨다. 이유는 단 하나, 공부 잘하는 동생은 되지만, 공부 못하는 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난 집에선 항상 무뚝뚝했고, 부모님에게 ‘귀한 아들’이 아니라 문제아에 더 가까웠다. 말 안 듣는다고 동생 때리고, 학교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엄마를 몇 번이나 불려 오시게 했다. 어느 날 엄마가 하신 말씀, “너한테 큰 기대를 가졌었는데, 지금은 아무 기대도 안 한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엄마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남 앞에서는 좋은 엄마인 척, 잘난 아들이 있는 척하다가, 나하고만 있으면 남처럼 대하는 엄마가 너무 싫고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밤늦게 오고 공부도 안 하는 게 친구들 때문이라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셨다. 실시간 전화로 체크하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그 집착이 끔찍했다. 그럴수록 엄마의 말을 더 안 들었다.
한번은 학원 가기가 싫어서, 친구와 오락실 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빠가 오시더니 갑자기 나의 뺨을 때렸다. 집에 와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저 엄마의 전화 한 통, 지금 아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을 거란 얘기만 듣고 그러신 거였다. 그 뒤로 엄마 아빠와 대화를 거의 안 하고 살았다. 엄마는 항상 나를 의심하고 남과 비교했다. 무조건 학원부터 보내려는 엄마의 욕심에 한때는 정말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엄마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말 안 들으면 벌써 회초리가 날아왔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셨다. 몰래 오토바이를 탔던 터라 늘 조마조마했던 내게 “조심해서 타라”고 하셨고, 집 밖에서 친구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릴 때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실 땐 정말 놀랐다. 동생에게 엄마가 왜 저러냐고 물어봤더니 마음수련 명상을 하신다고 했다. 그래도 난 시간이 지나면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모습이 점점 눈에 띄었다. 공부 못한다고 무작정 학원을 보내려던 전과 달리 너 편한 대로 다니라고 하셨다. 어느 순간 진심으로 느껴졌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의 사진을 하나하나 버릴 때마다 홀가분해졌다. 엄마가 나를 미워하고, 의심했다 여겼던 기억과 마음을 버리니 정말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확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자 웃음 없이 우울했던 엄마가 보였다. 나 때문에 속 썩어서 늘 아팠던 엄마, 후회가 많이 되었다. 나를 낳고 시댁에서 이쁨받던 엄마,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면서 힘들어했을 고통이 느껴졌다. 난 너무 이기적이었다.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큰절을 했다. 잘못했다고, 엄마 아빠의 마음을 몰랐었다고, 제가 힘들었던 만큼 엄마의 마음은 더 많이 아프고 힘드셨을 텐데 그래도 아들이라고 밥 챙겨주시고 신경 써주셨던 거 정말 감사하다고…. 그 말씀을 들은 부모님은 오히려 “그동안 너무 큰 욕심으로 너를 힘들게 했다”면서 정말 잘못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명상을 하시고 나서 건강을 회복하셨고 늘 밝게 웃어주신다. 엄마의 변화가 나에겐 더 큰 변화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좋은 친구도 더 많이 생기고, 선생님들도 항상 밝아서 좋다고 칭찬하신다.
지금은 미국 유학 중이다. 낯선 그곳에서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마다 엄마의 전화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전엔 ‘무조건 안 돼’였는데 이젠 ‘그것 괜찮다’ 하시면서 편한 친구처럼 상담해주신다. 지금은 엄마가 내 친구 소식을 더 잘 아실 정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커서 뭘 해야 할 지 몰랐는데, 지금은 꿈이 생겼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를 좋아한 나는 훌륭한 자동차 정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자동차 매케닉 대학에도 입학할 예정이다.
예전엔 엄마 없을 때만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이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항상 명절 때면 찾아가 세배를 올리는 친구들 덕분에 마음 놓고 공부하고 있다. 친구들도 엄마가 되게 많이 변하신 거 같다면서, 친구들 엄마 중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편하다고 한다. 한국에 가게 되면 엄마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2010. 5. May 월간마음수련

“애들과 남편이 그냥 앉아만 있어도 햇살처럼 빛난대요”

엄마들은 늘 꿈꾼다. 자식들을 통해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고,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어 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자녀들이 우울증을 겪으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엄마 정태연(58)씨와, 사랑받고 살면서도 늘 공허하고 우울했던 엄마 정영숙(52)씨는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난 후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풀었다 한다. 환한 미소가 아름다운 두 엄마가 말하는 ‘내 삶의 변화와 감동’ 이야기.

정리, 사진 김혜균 진행 문진정

난 꽤 괜찮은 여자인데 세상이 몰라주는 줄 알았죠
태연 저는 결혼 전부터 남 앞에서 잘나고 반짝반짝 빛나고 싶었어요. 근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세상이 원망스러웠죠.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가 다섯 형제를 키우셨거든요.
영숙 저는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셨는데 시골에서 ‘교장 선생님 딸’ 하면 알아주니까 커서도 은연중에 남이 알아주길 바랐던 거 같아요. 근데 충족이 안 되니까 외롭고 자신감도 없고, 많이 우울했죠.
태연 옛날엔 나이 차면 빨리 결혼시켰잖아요. 생활이 너무 어려우니까 엄마가 시집가래서 갔어요. 힘든 상태에서 결혼하니까 남편도 안 좋은 것만 보이는 거예요. 첫아이 낳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둘째 낳기는 싫었는데 남편과 친정 엄마가 낳으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설상가상으로 쌍둥이인 거예요. 냉장고, 세탁기도 없고, 남의 집 셋방살이에 갓난아이가 셋이다 보니, 기저귀 빨면서 맨날 울고, 원망하고, 짜증 내고. 이건 사람이 아니에요.
영숙 제 남편은 가정적이었어요. 그런데도 ‘도대체 나는 뭐지’ 하면서 불만이 많았어요. 남편이 직업군인이라 외진 지역에 주로 다녔기 때문에 외로움을 더 탔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애들한테 깊은 사랑을 못 줬더라고요.
태연 쌍둥이 낳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 세상이 참으로 원망스럽더라고요. 주인아주머니가 시끄럽다고, 물 많이 쓴다고 나가라고 한 거예요. 돌아서면 기저귀가 쌓이고, 밤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러다 보니 아기들 한번 따듯하게 안아서 우유 먹인 적도 없어요. 나중에 아이들이 크니까 어릴 때 엄마한테 받지 못한 사랑이 나타나더라구요.
영숙 형편이 좀 낫다 해도 허한 마음은 같아요. 이것저것 많이 배웠죠. 조리사에 가스 점검, 발마사지, 비즈공예, 양재, 근데도 허하더라고요. 명상하면서 보니 그게 다 열등감 때문이었어요.
태연 그런 욕구 불만을 저는 자식을 통해서 이루겠다고 생각한 거 같애요. 남한테 흠잡히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굉장히 심해서 애들도 많이 때렸어요.
영숙 그런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태연 제가 척하는 데 왕이에요. 남들은 저를 절대로 화를 낼 사람으로 안 봐요. 근데 완전히 괴물이었죠.(웃음) 그건 우리 애들밖에 몰라요. 지겹게 잔소리하고 신경질 내고 때리는 엄마였어요. 아이 셋 다 내성적이고 순종적이고 공부도 잘했거든요. 돈 많이 벌어서 아이들을 최고로 가르치겠다, 나 같은 설움, 콤플렉스 없이 키우겠다는 집념만 있었죠. 아들은 대학 보내고 딸들은 돈이 없어서 상고를 억지로 보냈는데, 쌍둥이한테 우울증이 왔어요. 직장 적응 못 하고, 친구 관계도 안 좋고. 아들은 대학에 적응 못 해 군대 가고. 그때까지도 저는 돈 버느라 몰랐어요. 큰딸이 대학에 다시 들어가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에 둘째 딸도 대학엘 보냈는데 얘는 더 심해지는 거예요. 애들과 싸우면서 10년이 지나더라고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태에서 마음수련 명상을 만났어요.
영숙 저는 2006년도 중앙일보에 난 마음수련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1과정을 하면서 혼자 만세를 불렀어요. 업연의 고리를 이제 끊었다 싶었어요. 왜 사는지 알았고, 맨날 외롭다, 나란 존재란 도대체 뭘까, 고민 많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풀리니까 이제 살았구나, 그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태연 그 시원함, 명상한 사람은 다 알죠. 명상센터 가면 조용한 게 그렇게 좋았어요. 집에선 맨날 싸웠으니까요. 한 열흘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한 거예요. 아, 이런 게 다 있나 싶어서 더 열심히 버렸어요. 근데 명상 중에 어릴 때 오빠가 동생들 때리는 걸 본 장면이 사진처럼 딱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애들을 때린 게 거기에서 온 거였어요. 눈물이 많이 났어요. 이 사진 한 장이 우리 세 아이를 그렇게 때리게 했구나. 정말 어렸을 때 찍어놓은 ‘사진’이 전 인생을 끌고 가더라고요. 누굴 원망할 필요가 없어요. 이 사진이 계속 연결되는 고리구나, 이걸 끊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정영숙(52). 2006년 마음수련 명상 시작. 1983년에 남편 국승철씨와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정태연(58). 2007년 마음수련 명상시작. 1977년에 남편 이재홍씨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쌍둥이 3남매를 키우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 ‘사진 한 장’이 평생 좌우
영숙 아까 고리를 끊었다 한 게 바로 그거였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집에 많이 안 계셔서 많이 외로웠어요. 한번은 저녁이 돼서 컴컴하니까 등잔불을 붙였는데 불이 확 났어요.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워서 막 울었거든요. 아무리 둘러봐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서부터 외롭고 두려운 마음이 커졌더라고요.
태연 그걸 대물려 준 거예요. 벗어나지 않으면 아이들도 나랑 똑같은 인생이 되겠구나, 너무나 기가 막히더라고요. 싫었던 내 인생을 애들한테 그대로 강요한 거예요. 혼났던 거, 두려웠던 것들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빠가 아버지한테 맞았던 걸 동생들한테 그대로 했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나는 절대 오빠같이 안 한다 했는데, 제가 그대로 자식들한테 하더라구요.
영숙 애들이 결혼 전에 마음공부를 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자식 낳아도 우리처럼 안 키울 수 있잖아요.
태연 물론이죠. 옛날엔 일거수일투족 잔소리를 했거든요. 왜 이리 늦게 일어나냐, 엄마 힘든데 너는 왜 그리 사냐, 근데 내가 달라지지 않고는 자식보고 달라지라고 할 자격이 없더라고요. 그런 지독한 엄마 밑에서 살아준 것만도 감사하죠. 요즘은 가끔 잔소리를 해도 바로 후회하죠. ‘아직 내가 남아 있어서 잘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반성하고.
영숙 아이들이 많이 좋아졌겠어요.
태연 저희 가정은 다시 태어난 거예요. 아빠하고 부딪치는 것도 손가락 꼽을 정도고, 애들은 거의 웃질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 잘 웃어서 탈이에요.(웃음) 며칠 전엔 큰딸한테 전화했어요. 가만히 보니까 마음으론 회개하지만 실제로는 안 했더라고요.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싶어서 전화했다 하니까 딸이 ‘엄마도 모르고 그런 거니 이해한다’고 하더라구요.
영숙 저는 남편이나 아이들한테 충분히 사랑을 못준 게 미안하고 그 죄책감이 많았어요. 제가 느낀 외로움을 줬잖아요. 그동안 내 안에 갇혀서 외로웠는데, 지금은 그게 다 허물어지니까 하루하루가 정말 새로워요.
태연 남편도 명상하고부터는 먼저 잘못했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잘해요. 남편이 다 내 잘못이라고 할 땐 그 말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다 내 잘못이더라고요.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 말들에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전엔 뭐든지 비교했어요. 누구는 이런데 내 신세는 왜 이러나 하고.
영숙 맞아요. 저도 돈 많고 남편이 잘해주는 친구들 보면 질투도 많이 났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친구들이 여유 있게, 웃고 사니까 좋고요.
태연 제가 시집 식구들에 대한 미움이 참 많았어요. 남편하고 싸울 때 항상 시집 식구들을 걸고넘어지고, 잘사는 형제들이 밉고, 안 도와주는 게 원망스러웠는데 명상하고부터는 친척들은 물론 친구들이 잘사는 것도 감사한 거예요.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못살아도 옆의 사람이 잘살면 그게 더 좋으니, 그렇게 변한 내가 참으로 놀라워요.
영숙 정말 이거 나 맞어? 정영숙 맞어? 하는 거죠.(웃음)

인상 좋아져 평생의 보톡스 맞은 셈
태연 전부 다 똑같으면 이 세상이 굴러가지가 않잖아요. 작고 크고 높고 낮고 모든 만상만물이 다 다르니까 완전한 거죠. 그걸 아니까 내가 못났다는 것도, 비교하는 마음도 저절로 없어지더라구요. 솔직히 지금 제가 하는 일이 거리 청소거든요. 명상하고부터는 맨날 즐거워요. 썩은 음식을 치우면서도 감사하고 불만이 없어졌어요. 또 전에는 가족들한테 희생했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명상하고부터는 내가 희생한 게 아니라 온 세상이 나를 지금 여기 살게 해주고 있더라고요.
영숙 잘해야 한다, 돋보이고 싶다 그런 게 없어지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니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대로 보여주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마음도 편안해지고요. 잘해야지 하는 마음도 없는데 정성은 더 들이게 돼요. 마음 없이 하니까 음식도 더 맛있고 뭘 해도 전보다 더 잘 만들어지고. 있는 대로 세상을 산다는 게 대충 사는 게 아니구나, 결과는 더 완벽하더라고요.
태연 거기서 이게 행복이구나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편안한 마음으로 가족을 쳐다볼 때 남편이 예뻐 보일 때. 이런 마음을 찾게 되었다는 게 감사하죠.
영숙 보통 같으면 화나야 할 상황에도 마음이 안 일어나요. 아, 마음을 비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한테 편안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얼굴에 생기가 있고,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오기도 하고. 전엔 얼굴 표정이 나도 모르게 경직됐는데, 애들 말로는 찌푸렸던 미간이 활짝 폈다고 하더라고요. 보톡스 맞은 것처럼.(웃음) 그러니까 엄마들이 진짜 마음을 비워야 해요. 요즘 엄마들 자식 교육 욕심이 극에 달했잖아요. 여유도 전혀 없고, 마음에 빈틈이 없는 거 같아요. 마음을 비운 만큼 아이들과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럼 엄마로서 잘하고 싶은데도, 자꾸만 꼬여가던 많은 문제들의 해결방법도 보일 거예요.
태연 엄마들이 마음의 짐이 많잖아요. 명상하기 전까지는 우리 집에서 제일 골칫덩어리가 딸이었는데 명상하고 나서는 다들 모두를 살린 복덩이라고 해요.
영숙 기적이 멀리 있나요, 이게 바로 기적이죠.(웃음)

2010. 5. May 월간마음수련

인간의 완성의 나라

못 잊을 사연들이 허망한 허상이었고
흐르는 세월도 망상이었구나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허덕이던 수많은 사연의 일들과
무엇을 찾아 가지려고 했는지도
어리석음이라 생각이 나지 않구나
말이 없던 사람도 말 많던 사람도
모두가 흘러간 세월 따라
나 속에 남는 것은 허상인 망상이구나
갈 곳 모르는 사람에게 길인 양 이야기한 것이
모두가 길만 멀게 하고
뜻 의미가 없는 허상의 세계서 방황일 뿐이었구나
가도 가도 목적지 없는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내 마음속서 돌고 도는 생각과 행은
모두가 헛된 망상이었고 헛짓거리였구나
나의 가짐의 마음속에는 거짓인 나가 있어
나는 자존심도 있었다
나는 괴로움도 있었다
나는 돈의 마음도 있었다
나는 가족도 있었다
나는 명예 사랑도 있었다
그 나가 다 죽어 이 자체의 마음이 없고
일체의 나의 마음이 없어졌구나
흐르는 세월도 없어졌고
가야 할 곳도 없어졌고
이루려던 숱한 일이 없어졌구나

돈 사랑 자존심 명예 가족과
거짓의 나마저 없어졌구나
거짓의 나는 없어졌으나
마음의 세상 너머 신의 세상에 내가 나니
내 가진 마음의 세계 속서 신의 세계라
말만 듣던 신은 자유고 해탈이고
이 세상의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났구나
흐르는 강물과 세월 따라 가버리던 세상이 없어지고
자유고 그 세월마저 없어졌으니
흐르는 세월이 아닌 그냥 있는 세월만 있구나
내가 못 이룬 원한도 없어져
해원상생이 되었구나
허인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아
이 몸 마음이 허상임 알면
이것도 내 탓이요 저것도 내 탓이요
허상인 나는 죽어도 싸다
그 허상이 무엇 때문에
원한과 사랑과 가족 돈 사랑 명예 자존심이 있느냐
이 세상의 일체는
허상인 나가 만든 마음에서 있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맞다 안 맞다 수많은 의문의심도
캄캄한 무덤인 자기의 마음의 세상에 있는 것이라
이 세상은 가짜여서 이 세상과 나가 없으면 참세상이고
그 참세상에 나면
나는 다 이루는 완전하고 완성된 존재라

詩_ 우 명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2010. 5. May 월간마음수련

차갑던 마음을 풀어준 햇볕은 마음수련 명상이었죠

강영성 한의사. 2005년에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했다.

다정다감 아빠의 비결
강영성씨와 가족의 대화

컴퓨터 게임 하느라 공부를 등한시했던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던 아빠 강영성(52)씨. ‘인생은 부지런히 살아야 보람차다’는 신조로 살아온 강영성씨는 가족들이 태만해 보이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처럼만 열심히 살아라”는 강요에 아들과 딸은 냉랭했고, 이를 바라보는 아내 조부덕(49)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한다. 틀 세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버지를 부드럽게 변화시킨 건 마음수련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이들 가족의 화해기를 들어본다.

정리, 사진 김혜균


당신은 ‘인상파 강영성’이었어요
아들 우리 집이 정말 화목해지긴 했나 봐요. 이렇게 잡지에도 나오고.(웃음)
아빠 이게 다 우리 아들 덕분이다. 니 덕분에 우리 식구가 모두 마음수련을 시작했고 아빠도 많이 바뀌었잖니.
엄마 당신은 얼굴부터가 확 펴졌어. 전엔 집에 들어오면 인상부터 썼잖아.
아빠 전에야 당신 마음에 얼마나 안 들었겠어. 무슨 말 한두 마디만 하면 ‘됐다, 그만해라’ ‘알았다, 그리 안 할게. 끝!’ 했으니까.
엄마 ‘그리 안 할게’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뭐 있나 하면서 자기가 잘못한 걸 인정한 적이 없었지.
아빠 맞다, 맞다. 내는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무조건 열심히 사는 게 제일 잘 사는 거라 생각했어.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으니까 잘못한 게 없다 생각했지.
엄마 당신 인생의 목표가 ‘열심히’였잖아.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고 일요일 날 한 번도 집에 있는 걸 못 봤어. 하루에 세 번 정도는 나갔다 들어와야 하고, 쉴 새 없이 움직여야, ‘보람찬 하루였다’ 했잖아.(웃음)
아빠 한 시간이라도 몸을 땅바닥에 붙이면 보람찬 하루가 아니었지.(웃음)
아들 내가 다섯 살 때, 처음으로 배운 말이 ‘보람차다’였어요. 아빠가 하도 그러시니까 제가 보람차다가 뭐야? 물었더니, ‘하루를 억수로 한 일 많게!’라고 설명해주신 게 기억나요. 그래서 저도 맨날 일기장에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라고 쓰고.(웃음)
아빠 아빠도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농사를 지었는데 내내 일하고도 한 번도 아프다고 드러누운 적이 없으셨어.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열심히 살아야겠다가 몸에 밴 거지.
엄마 옛날엔 먹고사는 게 제일 큰일이었지만 요즘 애들은 원하는 게 다르잖아. 내가 당신은 애들한테 너무 해주는 게 없다고 하면 첫마디가 “내가 할 일 안 하는 게 뭐 있노. 일 열심히 해서 돈 벌어주는데” 했잖아. 항상 12시 넘어서 들어오고, 일찍 들어오는 날은 자기 공부하고, 애들하고 같이 놀아준다는 거 자체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게 불만이었던 거라.
아들 저도 아빠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같이 있으면 불편하니까 밥도 잘 안 먹고, 용돈 달라는 소리도 잘 못했어요.
아빠 그래. 니들하고 진짜 오순도순 이야기해 본 적이 없던 거 같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할 건데 그걸 못 참아서 이래라 저래라 야단만 쳤지. 니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아빠하고 대판 싸운 거 기억나나?
아들 그때가 학원 다니다가 가출했을 때였잖아요.

강태규. 2005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서 명상을 시작했다.

아빠랑 대화하면 TV랑 하는 것 같았어요
아빠
중학교 때는 공부해야 된다는 개념이 딱 들어 있었거든. 근데 공부 안 하지, 컴퓨터 게임도 많이 하지, 야단치고 혼내도 바뀌지 않으니까, 아빠도 너무너무 힘들어서 퇴근하기가 싫었어. 집에 오는 게 꼭 감옥소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지.
아들 저도 아빠가 집에 오는 게 싫었어요. 배가 좀 차가지고 깨작깨작 먹으면 아빠가 밥상 엎으면서 “왜 밥을 그래 먹노!” 하고…. 제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혼내고 화내시니까요. “왜 꼭 그래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빠랑 대화하면 TV하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대화가 안 통하니까.
아빠 다행히 그 무렵에 마음수련을 하게 됐지. 엄마가 잘 가는 미장원 원장님이 니가 오락에 빠져 있다고 하니까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 보내라 한 거야. 부모부터 해야 한다고 하기에 아빠도 했지. 근데 수련을 해보니까 아빠가 정말 잘못한 게 많더라. 한 번도 니들이나 엄마 말을 수용한 적이 없었어. 미안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엄마 당신 바뀐 거 보고 나도 너무 놀랐어. 나보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라고 하고, 애들한테 너무 해준 게 없다 하고.
아빠 수련하고 처음 한 달 동안은 정말 마음이 편안하데. 근데 또 아들이 게임을 하면 속이 디비지고, 딸내미까지 친구하고 문제가 있어 학교를 휴학하겠다고 하니까 마음수련을 계속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아들 아빠를 이해하면서도 나한테 강요하는 게 싫었어요. 저도 수련하면서 아빠에 대한 마음 버리면서 울기도 했는데, 아빠에 대한 연민 같은 게 느껴져서였어요. 아빠가 틀에 매여 사는구나, 그래서 아빠도 괴롭고 주변 사람도 괴롭구나, 하고요.
아빠 그래 맞다. 작년에는 너하고 아빠하고 엄청 다퉈서 결국 문짝 다 부숴지고, 엄마가 보기에 이러다 진짜 아들하고 애비하고 원수가 되겠다 싶어 니가 원룸 구해서 집 나갔잖아. 그러고 나서 아빠도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나. 그렇게 불같이 성질을 내고 보니까 너무나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데. 진심으로 제대로 버린 게 없었구나 싶었어. 그때부터 수련을 정말로 열심히 했어. 그랬더니 어느 순간에,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나로 인해서 비롯됐다는 걸 깨닫게 됐지. 그래, 우리 가족부터 100% 수용해보자 다짐을 하고, 일단 너희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엄마 그래도 아빠가 아들한테 얼마나 공 많이 들였노. 아침 먹다가 아들 좋아하는 거 있으면 엄마한테 그것 좀 싸라 해서 아빠가 차에서 아침 먹이고, 학교도 데려다 주고.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잖아. 그러더니 니가 거짓말같이 게임 안 하고 올해 2월부터 공부하겠다 했잖아.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생긴 거지
아들
이제 게임 그만하고 공부해야겠다 결심했을 때 그냥 눈물이 났어요. 왜 울었는지 몰라도 속으론 기뻤어요. 제가 공부 안 해도 겉으론 되게 편안해 보이니까 친구들이 속세를 떠난 도인 같다 했거든요. 근데 어느 날부턴가 쟤들은 저리 열심히 하는데 나는 뭐하고 있지 이런 생각도 들고.
아빠 공부하겠다 하고는 휴대폰도 컴퓨터도 다 끊어버렸잖아. 집에도 다시 들어오고.
아들 나갈 때 아빠 얼굴 죽을 때까지 안 볼 거다 하고 나갔는데, 아빠도 바뀌고 있고, 올해 아빠가 화내는 건 한 번도 못 봤으니까요. 밤늦게 컴퓨터 하다 아빠한테 들켜도 그냥 들어가라고만 하시고. 아빠가 옛날엔 전부 부정이었으면 요즘은 항상 긍정인 거 같아요.
엄마 태규가 어느 날 우리 가족 중에 아빠가 제일 힘들겠다고 한 거, 당신 알아요? 자기는 공부하기 싫으면 안 하고, 엄마도 우리 보내고 나면 맘대로 할 수 있는데 아빠는 우리를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해야 되고, 돈 벌어야 한다고 하면서.(웃음)
아빠 우리 아들이 그런 소리를 했나?(웃음)
아들 아빠는 보면 은근히 정이 많으신 거 같애요. 친척 분들이 어려우면 아빠가 많이 도와주시잖아요. 항상 엄마도 아빠는 저 작은 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책임지냐고, 그런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아빠도 힘드니까 우리한테 신경질 낼 수도 있는 건데, 그걸 이해 못 했던 게 반성이 됐어요.
아빠 수련하면서 우리가 다 서서히 바뀐 것 같애. 당신도 그랬잖아. 세상 살면서 어떻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애들이 다 그렇게 클 수 있겠냐고. 애들한테 너무 바라지 말자,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아, 맞다 내가 애들한테 너무 집착해서 내가 바라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했구나,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데.
엄마 내도 참 잘못한 게 많았지. 당신하고 사이가 안 좋다 보니까 애들한테 당신과의 자리를 못 만들어준 거 같애. 늘 당신은 바쁘니까 하고 제외시켰으니까.
아들 전엔 대학 갈 생각이 없어서 공부도 안 했는데 요즘은 목표가 생기니까 좋아요. 한번은 나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해 보는데, 장점은 못 적겠더라고요. 그때 내가 진짜 안될 놈이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엄마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생긴 거지. 전엔 지겨워서 일부러 학교에서 잤는데 지금은 잠 올까봐 밥도 조금 먹고 수업 다 듣고 한다며. 공부한 지 한 달 만에 성적도 많이 올랐고.

조부덕. 1989년도에 강영성씨와 결혼해서 남매를 키우고 있다. 명상은 2005년에 시작했다.

아빠가 매사 긍정적이니 집안이 화목해요
아빠
니 얘길 들어보니까 아빠가 자꾸 내를 돌아보듯 너도 똑같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잘못인지 스스로 찾고 해결하려 하고.
아들 아빠가 매사 긍정적이 되니까 집안 자체가 화목하게 돌아가잖아요. 옛날엔 불화의 원인은 아빠라고 생각했는데.(웃음)
아빠 (웃음) 맞다. 아빠가 바뀌니까 모든 게 순리대로 되잖아. 아참, 올 초 니가 고3이라고 보약을 지어줬는데, 너는 괜찮다고 아빠 힘드니까 아버지 주라는 얘기 엄마한테 들었을 때, 아빠가 얼마나 짠했는 줄 아나.
아들 약 먹기 싫어서 그런 건데요.(농담^^)
아빠 하하하. 그 말 들었을 때 아빤 정말 행복했다. 우리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열리고 있구나 싶었어.
엄마 언제부턴가 아들이 아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전에는 무늬만 가족이었잖아. 근데 수련하고 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가족이 됐다는 게 너무 고마워.
아빠 알다시피 아빠가 얼마나 잘난 척하고 자존심 강하고 남한테 굽히는 거 억수로 싫어했나. 그런 내를 니들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해준 거라. 요즘 나는 진짜 근심 걱정이 없고, 누가 조금만 우스갯소리 하면 그냥 웃음이 나고 그래. 요즘은 환자들이 “같은 사람 맞습니까?” 그런다니까. 전엔 사람들이 “저 한의원 원장은 완전 얼음이다. 사람 보고 가지 말고 병 나으러만 가라”고 했다잖아.
엄마 맞어. 당신 진짜 많이 달라졌어.
아들 다 제가 복이 많은 아이라 그런 거예요.(웃음)
아빠 그래. 니가 복덩이다. 엄마 아빠 마음수련도 하게 해주고.(웃음)

우는 남자가 아름답다, 중년 남성의 눈물 바람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는 말이 있다. 울고 싶어도 아무나 울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나마 울 수 있으면 다행이다. 특히 남성들은 눈물을 흘리지 못해 병난다. ‘울 수 있는’ 방을 만들어 남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곳이 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울 수 있는 공간에서 한바탕 울고 난 중년 남성들은 ‘울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안해지는 것인지 몰랐다’고 말한다.

취재, 사진 정하나

“난 여태 울어본 적도 없고, 울 새도 없었어요”
말쑥한 양복 차림의 50대 남성이 굳은 얼굴로 들어선다. 중소업체의 대표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 증상으로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아, 내가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은 뛰는데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하고 아무래도 안 되겠는 깁니다. 괜찮아지는 약 있으면 좀 줘보이소.”
“언제부터 그런 증세가 있으셨어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갓집 다녀오는 길에 그럽디다. 밀리는 차 안에서 가슴이 답답~ 해지는데, 갑자기 숨을 못 쉴 것 같고 이대로 죽을 것 같더라고. 마음이 심약한 것도 아닌데, 나는 사막에 던져놔도 사는 사람이란 말이요.”
“그런 증세는 열심히 살아오신 분들한테 많이 나타나지요.”
“그렇죠. 열 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장남인데 그때부터 안 해본 게 없어요. 지금도 나를 따르는 사람도 많아요.”
“그렇게 힘들게 사시면서 마음이 괴로울 때는 없으셨어요?”
“참, 나도 사람인데 왜 그런 게 없겠습니까? 내 마음은 아무도 모르지….”
“….”
“아버지 돌아가신 날 울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요번에 친구 아버지 돌아가시는 것 보는데 아버지 생각도 나고. 이러다가 죽으면 우리 노모와 자식들도 결혼 안 했는데 어떻게 죽나 싶고. 거 참….”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이 있으셨나 보네요.”
“그런 순간이 많았죠…. 말해 뭐합니까….”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흠, 흠 헛기침을 하며 눈물을 감추려 하자 김성미 원장이 다시 말을 잇는다.
“힘드신 거 있으면 얘기를 하세요. 사장님도 사람인데 어떻게 한 면만 보이며 살아가시겠어요. 울고 싶으면 우세요.”
“내가 여지껏 한 번도 울어본 적도 없고, 아버지 죽은 후로는 울 새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상갓집 갔다 오는데 그렇게 눈물이 납디다. 인생이 이게 뭔가 싶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리막길밖에 없구나, 인제 죽는구나, 너무너무 불안하고 외롭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6남매 맏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며,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심경을 토로하던 그는 마침내 눈물을 보이고야 만다. 봇물이 터진 눈물은 이내 흐느낌이 된다.
“우세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사장님이라고 울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 못 운 거 지금 우세요. 여기서는 괜찮아요.”
한참 동안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진정이 될 즈음, 조용히 지켜보던 원장은 그를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김성미 원장은 <마음과마음> 정신건강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가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의 방을 만든 것은 6년 전이었다. 상담하다 보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남성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억누르려 하거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처음부터 울 생각으로 오는 분은 안 계세요. 그런데 상담하다 보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동안 참 외로우셨겠다, 하는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시고요. 한번 울고 나면 무장해제가 돼요. 나중엔 함빡 웃음을 지으면서 울 수 있는 게 이렇게 편해지는 것인 줄 몰랐다고 하세요.”

“그동안 참 외로우셨겠어요.” 자기의 감정을 돌아볼 새 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중년 남성들은 이런 공감의 말 한마디에도 금세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로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꼽는 김성미 원장은 영화는 ‘파이란’, 소설은 조두진의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추천한다.

자기 감정조차 잘 모르는 ‘마음 난독증’
처음엔 정신과를 찾아온 것만 해도 남자들에겐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다. 게다가 의사가 여성인 것을 알면 눈물을 흘리기는 더욱 어려운 조건이 되니, 이런 상황에서 한동안 흐느끼다 보면 자연히 자신의 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 된다.
“40~60대의 중년 남성들이 특히 많이 찾아옵니다. 그것도 회사의 중견 간부급이나 경영자,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지요. 이분들은 대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뒷골이 댕긴다, 머리가 아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라며 신체 증상을 호소하지만 결국 마음에서 기인한 병이라는 것이다. 열심히 앞만 보며 살아오다가 이제 어느 정도 정점에 선 단계가 되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건강마저 예전 같지 않으니 불안이 크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호르몬의 변화가 큽니다. 회의감 위기감도 잘 느끼고, 슬프고, 허전하고, 마음도 약해지지만, 직장이나 가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도 많은 거지요. 나약한 모습을 어디 호소할 곳도 없고 겉으로는 더 강한 척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남성 중엔 마치 난독증처럼 자신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감정을 억압만 하며 살아오다 보니 진짜 자기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지식에 대해서 늘어놓는 것에는 능숙하지만, “오늘 기분이 어땠어요?”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김원장은 때로 다음과 같은 말로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바꾸어 말해준다고 한다.
“위장병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화가 날 일이 많다고 이야기하세요”라고 말하고, “위장이 아픈 것은 화난 것을 참아서 아픈 것”이라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얼굴이 자주 화끈화끈해진다” 하면 “사람들 앞에서 바보 취급을 당할까봐 두려웠다 이야기하세요”라며 신체의 증상이 아닌 감정이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너무 자기 감정을 억압하지 말고 어릴 때처럼 잔잔하게 이야기하세요”라고 하면서.

남편이 울 땐 부끄럽지 않게 격려해주세요
사람의 마음을 보살피는 정신과 전문의인 김성미 원장도 한때는 눈물을 흘리는 환자를 보면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니 중증이구나’ ‘이제 좀 덜 울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남자들의 울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다. 이십대 후반의 젊은 의사인 그녀는 환자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보다는 의학 서적을 파고들면서 진단명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었다.
어린 시절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 많은 아이였지만, 성인이 되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매진하는 그 시간은 눈물을 잊고 산 세월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 세 명을 낳고, 쉴 틈 없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다시 눈물을 되찾게 되었다.
“전투적으로만 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 후 환경이 바뀌면서 몸도 아프니까 예전만큼 활동할 수가 없었어요. 뭔가 이렇게 숨 가쁘게 사는 게 다가 아닌데 하며 저를 돌아보게 된 거죠. 그러면서 흘린 눈물이 많았죠.”
그 눈물은 진정으로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환자가 무슨 이름의 병이냐를 찾기에 앞서 환자의 상처나 아픔에 대해서 귀 기울였다. 그리고 ‘눈물’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
“결국 환자들 이야기가 제 얘기죠. 이제는 울면 성공이라 생각해요. 울 수 있다는 것은 꼭 흑백TV를 보다가 칼라TV를 보는 느낌처럼, 세상이 바뀌는 거더라고요.”
김성미 원장은 가정에서도 아빠나, 남편이 눈물을 흘릴 때 편안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말한다.
“중년이 되면서 마음이 약해지니까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을 흘려요. 그럴 때 아내들이 ‘와 우노, 보기 싫다, 애들 보는데 빨리 들어가라’ 그러세요. 남편이 약해지면 자기 울타리가 무너질까봐 겁이 나는 거죠.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남편이 울면 드디어 저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었구나, 귀한 기회로 보시면 좋겠어요. 손수건 갖다주면서 옆에서 등을 쓸어준다든지, 부끄럽지 않게 격려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저 어릴 때는 잘 울었어요. 이 마루는 누나들하고 놀던 시골 들마루 같네요.” 눈물방에 들어간 남성들은 그 공간을 무척 편안해한다.

“울고 싶어진다는 것은 약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인 거죠.”

눈물은 진정한 자기와 만나는 신호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원장은 집에서도 자신의 우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단다. 친구나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좋은 교육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잘 우는 막내아들에 비해 맏딸은 참 씩씩하지만 강한 척하고 눈물 안 보이려고 해서 걱정이라는 그녀다.
“가족이든 친구든 또는 환자든 울고 싶을 때는 참지 말고 울 수 있는 공간에서 울라고 조언합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면 되거든요. 물론 제 자신에게도 해당되고요.”
때로는 그녀도 뭔가 너무 꽉 찼다 싶을 때는 혼자만의 장소를 찾는다. 차 안이나 가까운 절을 찾아간다. 두 아름 정도 되는 산벚꽃나무와 냇물이 흐르는 그곳에서 실컷 울고 나면 개운해진단다.
자신을 만나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성공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 앞만 보고 질주할 것이 아니라, 가만히 멈추어 서서 자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진정한 자신을 만나는 첫 시작인 것이다.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그런 상황과 마주쳤을 때 외면하거나 부딪쳐 싸우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 들어줄 사람을 찾아 울거나, 혼자만의 장소를 찾아가 우세요. 울고 싶어진다는 것은 약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인 거죠.”

2010. 6. June 월간마음수련

행복하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제목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1남 2녀의 막내이자 장남이었다. 아버지가 중학교 때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 누나들과 함께 아버지가 하시던 와이셔츠 공장을 이어받아서 열심히 운영했다. 덕분에 생활은 큰 걱정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들이라는,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컸다. 빨리 돈 벌어서 자수성가하여 어머님을 잘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유일한 희망이고, 소원이었다.

89년 6월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기준치보다 많이 나가서 면제를 받게 되어 그해 9월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일본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연고는 없었지만 그곳에 가면 뭔가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공장을 어머니께 맡기고,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도 잘 모시고, 주위에 자랑도 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일본어과를 졸업한 후 광고 회사에 취직하여 돈 모으는 재미도 알았다. 한국에 큰 아파트도 살 수 있었고, 외국인으로서는 흔치 않게 7년 만에 팀장급으로 승진도 했다.
일을 하느라 외롭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18년이 흘렀다.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고 이제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맞겠다 싶어 서른일곱에 한국으로 돌아와 광고대행 회사에 들어갔다. 이젠 따듯한 가정도 꾸리고 싶었다.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된 것은 큰누나의 권유였다. 2008년 2월, 어머니와 함께 논산 메인센터에서 수련을 하면서 마음을 하나씩 버려나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가족을 위한답시고 돈만 바라보고 산 내 인생이, 이 몸 하나만을 위하여 참된 자신도 모른 채 살아온 내 인생이 슬퍼서 눈물만 나왔다. 할머니 장례식도 못 가고 친구들 결혼식도 못 가고 엄마의 생신도 못 챙겨드리고 조카의 돌잔치도 못 가고….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것에 후회와 참회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나는 늘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휴가 때 제대로 놀러가 본 적도 없었다. 돈만 부모님께 갖다드리면 효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원한 것은 물질이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결국 내 명예를 위한 거였다. 가족들의 마음은 헤아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너무 미안했다. 명상을 하고 돌아와 어머니께 제일 먼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며 “그래도 열심히 살았잖아”라고 말씀해주셨다.
예전에는 돈만 드리면 다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어머니 발이라도 한번, 손이라도 한번 잡아드리며 따스하게 말하게 되었다.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는 친구도 동생도 누나도 형님도 많이 생겼다. 전에는 외톨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어느새 주위에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 있었다. 또 전에는 이 사람이 나한테 득이 되는가를 따졌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고 그저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 남의 말도 잘 듣는다. 내 생각에만 매여 있으면 잘 못 듣게 되기 마련인데,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니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게 된다.
평생의 반려자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알고 보니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화가 잘 통했다. 지난해 봄에 결혼한 나는 아침이면 출근하는 아내를 위해서 아침밥을 챙겨주고, 오후에는 가게에 나간다. 저녁이면 같이 명상센터에 간다. 행복하다. 참 평범하지만 그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함께 마음공부를 하고 있으니 상대방을 마음 없이 대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며 사랑하니까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20년 전,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면제 판정을 받았을 때 검사관은 “군에 안 가면 뭐 할거냐”고 질문했었다. 그때 무심코 했던 말이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짐을 내려놓자 마음이 따뜻해졌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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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

순리의 마음

순리의 마음

사람이 흘러간 추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억의 마음만 있고 그 감정의 마음이 없어서이라
어릴 때의 마음은 마음에 이런저런 마음이 없어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라
다사다난한 인간의 마음에는 흘러간 과거가 그리움으로 변하였다
세상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
사람의 마음대로 하려는 인간마음에는 세상이 움직여지지 않는 법이라
인간의 마음이 세상이 되어 사는 자는
세상이 되어지는 대로 순리의 마음이라 고통과 수고의 마음이 없이 살 것이다
어리석음이라 고통도 가지고 살고
어리석음이라 미망도 가지고 살고
어리석음이라 무거운 짐도 지고 산다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마음수련 우명 선생의 특별대담

2002년 9월, 우 명 선생은 미국 알라바마주 헌츠빌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의

찰스 메르시에카 박사를 만난 바 있다. 미국 뉴욕의 UN본부를 방문하여 당시 한승수 UN총회의장을 만나

세계 평화의 실현 방안에 대해 논의한 뒤의 일정이었다.

 

메르시에카 박사는 우 명 선생을 만난 뒤 마음수련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세계 평화의 대안이라 확신했고, 당시 인간 본성 회복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우 명 선생에게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여하고, ‘세계 평화 대사’로 위촉했다.

 

그리고 2011년 가을, 9년 만에 다시 만남을 가졌다.

2시간 동안 진행된 대화는 인간 완성과 세계 평화가 실현 가능한 것임이 확인된 의미 있는 자리였으며,

‘지구촌에는 여전히 전쟁과 차별, 굶주림이 존재하지만, 이제 마음수련이라는 해법이 있으니

평화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고 메르시에카 박사는 기뻐했다.

 

인류 내면의 성찰과 영원한 행복에 대해 나눈 두 거장의 대담을 특집으로 싣는다.

대  담  우 명 선생 마음수련 창시자, 저술가, 시인

찰스 메르시에카 박사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 회장, 정치학, 철학 박사  

일  시 2011년 10월 11일 미국 알라바마주 헌츠빌

정  리 최창희 발행인

메르시에카 박사: 연락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정말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우명 선생: 우리가 처음 만났던 9년 전보다 마음수련은 엄청나게 성장했지요.

이미 전 세계에 3백여 개의 수련원이 있고, 3년 안에 1천 개의 수련원이 문을 열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어떻게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나요?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우명 선생: 마음수련은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우주에서 다시 나면 영원한 우주마음으로 살게 되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그러면 이 세상이 진정으로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이 일에 열정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것은 알았지만 마음수련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우명 선생: 이제 더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가속도(momentum)가 붙겠지요. 마음수련의 이런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우명 선생: 진리를 깨친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많은 사람이 완성이 되어서지요.

마음수련은 인간 완성을 이루는

Total Education입니다.

마음수련 방법은 인간완성을 이루는 Total Education

 

메르시에카 박사: 처음 여기 오셨을 때 그걸 알 수가 있었습니다. 다른 이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명 선생: 9년 전 그때 메르시에카 박사가 나보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맞습니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못 보던 것을 보게 하시고 되게 하시니 그게 카리스마지요.

일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내시는지요?

우명 선생: 그래요. 한국은 워낙 잘되고 있기 때문에 잘 안되는 지역을 방문하고 있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국에서 이미 이루신 그 업적이 유산이 되어

잘되고 있다 생각됩니다. 이미 그 정도의 업적을 이루신 분이 솔선수범하여

직접 현장을 다니시는 것이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걱정해주는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우명 선생: 나를 알리는 것이 무슨 뜻과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진리 만드는 일이 중요하지 명성을 알리지는 않아요.

메르시에카 박사: 개인의 명성을 추구하셨다면 이룰 수 없었겠지요.

안 그러셔서 이루신 것입니다. 개인의 명성을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묵묵히 뒤에서

받쳐주는 분이 더 성공하는데 우 명 선생님이 그러신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내 나라, 네 나라 없이 되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래야만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지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는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온 세계가 나의 나라라고 했을 때”라고요.

우명 선생: 맞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지금까지는 그런 세상이 왜 오지 않았을까요?

우명 선생: 완전한 존재가 세상에 안 왔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본성을 회복했을 때 그런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이 세상 모든 교육 제도가 우 명 선생님의 마음수련 철학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우명 선생: 학교 공부가 먹고사는 공부가 되어 인간성을 상실했어요.

메르시에카 박사: 맞습니다. 특히 미국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육 제도에 마음수련이 필수 과목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우명 선생: 인간마음이 우주마음이 되고 거기서 모두 나면 하나가 되어 내 나라, 네 나라가 없지요.

세계 각 곳에서 연설을 할 때도 완전한 대안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안 태어났어도

우주는 있었고, 당신이 마음세계를 다 없애서 거기서 다시 나면 우주마음이 되고 완전해질 수 있다’,

마음수련은 방법이 있어 가능합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동안은 방법이 없었는데, 이젠 방법이 있어 빠르게 성취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지금까지는 사람이 성인(聖人)이 되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렇습니다.

우명 선생: 지금은 이 방법이 되니까 센세이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 방법대로 되어지고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깨쳐서 그런 것이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아주 인상적입니다. 뜻하신 바를 다 이루실 것입니다.

우명 선생: 세계는 지금도 종교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지 않고 갈라져서 그런 것이지요.

우명 선생: 허상인 자기 마음속에 가진 허상의 예수도 허상의 마호메트도 없애 우주마음이 되면

하나가 됩니다. 마음수련은 오직 빼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더하기만 해왔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예, 맞습니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우명 선생: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비워진 마음(empty mind)이 됩니다.

마음의 실체를 알고 빼기하는 것이 세계 평화의 대안

 

메르시에카 박사: 선생님의 저서는 책 제목도 아주 좋아요. ‘살아서 하늘 사람 되는 방법’은

100% 진실입니다. 그동안 마더 테레사도 이 말을 진실로 생각하고 살았어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는데 이젠 눈이 뜨이는 것 같아요.

우명 선생: 이런 종류의 책이 열 권 나왔지요. 9개 국어로 번역 중인데,

이것이 이상 문학(idealistic literature)이에요.

메르시에카 박사: 이 책을 읽으면 제게 아주 큰 유익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인간이 자기의 마음세계를 벗어나 고통 짐을 벗고 완성이 되는 방법이 있으니 그러하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사람이 고통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이게 기적이고 내면의 평화가 실현되는 것이지요.

우명 선생: 마음수련이야말로 인간을 완성시키는 전인교육입니다.

이걸 하면 하나가 되고 완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맞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벗어나 진리가 될 때 세상이 참으로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수련은 세계 평화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 대안입니다. 저희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는 우 명 선생님과 마음수련을 적극 지지합니다. 진리와 평화에 관한 말씀,

앞으로도 자주 듣고 싶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림 우명

우 명 선생과 마음수련은…

우 명(禹明) 선생은 1996년 마음수련을 창시하여 마음과 진리에 대한 일깨움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2002년 9월,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IAEWP;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하고 세계 평화 대사로 위촉되었다. 저서로는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 영역본 등 다수가 있다. 2011년 11월 현재 전 세계 312여 개 지역에서 마음수련 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순리대로 살아가는 행복한 삶으로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찰스 메르시에카 (Dr. Charles Mercieca) 박사와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는…

찰스 메르시에카 박사는 전 미국 알라바마주 A&M대학 정치학 및 철학 교수이며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의 회장이다. 1967년 여러 중남미 대학교에서 북미와 남미의 단합을 논의한 후, 세계 모든 대륙을 돌며 국가 간 이해와 교육을 통한 국제 평화에 대한 교육자들의 관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강연 투어에 착수했고, 1969년 알라바마 헌츠빌에서 열린 세계교육자회의를 계기로 이듬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IAEWP)가 창립되었다.

IAEWP는 비영리단체로서 세계 시민 교육을 통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73년 UN 경제사회이사회와 유엔공보국(UNDPI)의 비정부민간기구가 되었으며 1990년에는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와 공식적으로 연계되었다. IAEWP는 유엔 자문 자격을 가지고 80개 이상의 국가에 설립되어 있으며 평화에 대한 중요한 공헌을 인정받아 1987년 유엔 평화 메신저로 지정되었다.
 
대담 안에는 계속되는 세계의 종교 전쟁, 서로 하나되지 않고 서로를 사이비다 이단이라 규정하며 갈라져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있다. 자기 것만 맞다며 주장하는 것 못지 않게 온갖 분야에서 진짜와 비슷한 사이비들이 판을 치며 혼란을 야기하는 일들이 많다. 대담에 이어 지금 시대에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수련 우명 선생의 사이비에 대한 글들을 소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