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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난 이유, 신나게 살기 위해서지요

“우리가 태어난 이유,
신나게 살기 위해서지요”

강희대 38세. 대구 비젼코리아 헤어아카데미 원장

“항상 신나 보이세요.”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세요?” 요즘 많이 듣는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용 일을 시작했다. 미용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고, 정말 열심히 했다. 그 결과 30대 초반의 나이에 미용실도 몇 개 운영하고, 헤어아카데미 원장, 대학에 강의도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자만심에 빠지기 시작했고, “강희대 변했네~” 하며 사람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났다. 벌여놓았던 사업들도 남는 건 빚뿐이었다. 마음수련을 했다. 돈, 명예, 성공….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들을 모두 내려놓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보였다. 나는 다시 시작했고, 하루하루를 신나게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고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뜬다. 모든 것이 고맙다. 내 곁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이제 출근을 해서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고맙다. 한창 자만에 빠져 있을 때는 일도, 주위 사람들도, 다 내가 잘해서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줘서, 세상이 나에게 그 일을 허락했기에 할 수 있는 거였다. 이제는 몸이 아파도, 일이 안 풀려도 감사하다. 세상은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어려움을 주고, 성장하게 만들어주니까. 19살 때 미용실에 첫 출근하던 날, 그때의 열정, 그때의 첫 마음, 그때의 감사함을 찾은 것에 감사한다.

최고의 직업 미용, 나는 이 일이 정말 정말 좋다

오늘은 프로 미용인 양성, 미용인들의 재교육이 있는 날이다. “몇 개월 전보다 훨씬 발전한 것 같아서 재밌어요.” “이제야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교육받고 나서 열정이 살아났다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신이 난다. 그들은 나에게 다시 활력을 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내가 열심히 가르치려고만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상대가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나만 돋보이고 싶어 했을 때는 참 힘들었다. 사람들 또한 나를 돈 주고 교육을 살 수 있는 강사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이제 진정으로 도와주고자 하니, 그들도 마음으로 따라준다.

나는 후배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키워줄 수 있는 강사의 입장이 되었다는 게 너무나 좋다. 미용사란 사람을 아름답게 해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직업, 그런 미용사가 더 잘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도와주는 것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직업 아닌가.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일,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이 일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일구었을 때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의사에게 오른팔을 더 이상 쓰지 말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몸도 안 좋았다.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가 겨우 이거라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집착과 욕심으로 변질되었음을 처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부족할 때는 사람들한테 다 잘했다. 그런데 내가 기술도 좋아지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도 많아지자 교만해지고 자존심도 세졌다. 고마워할 줄 몰랐고, 내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고, 내 주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잘났다는 교만은 하늘을 찌르는데 그만큼 하루하루는 재미가 없었다. 도저히 신이 나지 않았었다. 그렇게 살아온 날들을 버리고 버리며 뼈저리게 반성했다. 그러자 ‘진짜 내 모습’이 드러났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욕심, 자만, 비교하는 마음에 가려져 있던 나의 본모습. 고개 숙일 줄 알고, 늘 최선을 다하고,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어갔다. 아니, 그것은 바뀐 것이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 뿐인 거였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한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웃는 얼굴로 들어서니 아내가 신기하단다. “예전엔 매일 축 늘어져서 들어오더니, 정말 당신 많이 변했어요. 그렇게 하루 종일 강의하고 돌아와도 힘이 넘치고.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 같아요.” 아내에게는 미안한 것이 참 많다. 아내와는 미용실 후배로 만났다. 아내는 나의 미용에 대한 열정에 반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아내에게 못해준 것이 많다. 너무 미용에만 빠져 있었던 탓에, 아내와 있어도 항상 미용 생각뿐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는 아내한테 화풀이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기다려주었다. 그런 아내가 너무 소중하고 고맙다. 얼마 전에 아내의 생일 선물을 챙겨주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생일 한번 챙기지 않았는데, 아내의 감동하는 모습에 더 미안했었다. 생전 안 하던 주방 일도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게 기쁘다. 소중한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자 할 때는 저절로 신이 나는 것 같다. 일년 전부터는 미용 봉사도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어린이집이나 노인복지시설 같은 곳에 가서, 머리를 잘라드리는 것이다. 예쁜 머리를 매만지며 웃는 모습을 볼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의 나를 돌아본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 동안의 나를 돌아본다. 교육할 때 최선을 다했는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오늘이 가기 전에 비워버린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점검하다 보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발전하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미용 분야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것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듯 매일매일 남음이 없이 마음을 비워내다 보니, 이제는 일을 할 때는 일에, 사람을 대할 때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집중력이 생긴다. 이런 내 모습에 또 한 번 감사하게 된다. 신난다.


아내 황진숙과 두 아들 신광, 신우.
집에서는 가족들과 종종 기타 연주를 하며 가족 음악회를 가진다.
예전에는 집에 와도 언제나 일 생각뿐이라 가족들과 있어도 신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들과 매순간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음악가 김태원, 이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세상 앞에 서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김태원이 아들의 자폐증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대기는 거의 들어 알고 있었으나, 아들이 그렇게 아픈 줄은 몰랐습니다. 힘겨웠던 지난날의 고통들을 이겨내고 지금은 그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의 삶에 끝없이 계속되는 고통은 제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만큼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MBC

아들 우현이는 지금 11살이지만 한 번도 아빠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김태원은 지금도 아들과 대화하는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자폐아에 대해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 때문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으며, 그것이 바로 현재 김태원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에서 살고 있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의 소원은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음악가 김태원으로 하여금, 더 이상 음악적인 자존심만 내세우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만든 것도 아픈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과감히 예능을 시작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목숨 같던 자존심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 엎드림으로써, 그런 자신을 하늘이 굽어보시고 아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들 얘기는 김태원의 작곡 히스테리 때문에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황당한 헛소문을 감수하면서까지, 꽁꽁 감추고 싶던 비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그토록 힘든 고백을 한 것일까요?

김태원은 초등학교 입학 후,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에게 따귀를 연속으로 맞은 적이 있다 했습니다. 그때 받은 충격과 상처 때문에 학교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그는, 아침이면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서서는, 학교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하교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는군요. 여덟 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컸던 고통…. 그렇게 집단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겉돌며 소외당하는 삶은 오래도록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눈에는 소외된 아이들이 보인다 했습니다. 김태원에게 있어 그 아이들은 타인이 아니라, 오래전의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타인이 아니라 힘겨웠던 시절의 자신이라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이의 병을 알게 된 건 아들 생후 2년 만이라 했습니다. 음악가로서 오랜 침체기를 겪은 후 ‘네버엔딩 스토리’로 모처럼 찬란한 빛을 보려던 시기에, 김태원은 다시 한 번 암흑 속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의 병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김태원은 과감히 세상에 발을 내딛었고, 몸과 마음을 완전히 열어젖혔습니다. 그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김태원은 숨어 있어서 드러나지 않을 뿐 생각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는, 그 아픈 아이들을 돕고 싶다 합니다. 소외당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 오래전의 나 자신이라고 여겼듯이, 고통받는 그 아이들은 바로 내 아들 우현이기 때문입니다. 김태원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합니다. 또한 김태원은 편협하고 냉혹한 사람들의 시선이 가족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가를 털어놓음으로써, 그 가족들에게도 한 겹의 보호막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많은 약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어, 그는 자신의 가장 큰 고통을 세상에 드러냈을 것입니다.

불현듯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며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자신보다 상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우리 인간의 진짜 존재 이유 말입니다.


지현정님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간 출판사에 근무했으며 2009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빛무리’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 영화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힘겹게 계단 오르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계단 난간 손잡이 ‘동행’

“저를 잡으세요.
손녀딸이 되어드릴께요”

만든 사람: 김보경(25) 백은하(25) 홍대 프로덕트 디자인과 졸업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없어서는 안 되는 어떤 물건이 있다면, 그 또한 처음 만들어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우리의 일상에서, 불현듯 떠오른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거기에 나보다는 남을 위하는 따듯한 배려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세상을 빛내는 발명품이 되지 않을까. 평범한 사람들의 빛나는 아이디어들을 게재한다.
<편집자주>

이름은? ‘동행’. 항상 어르신들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재잘거리는 예쁜 손녀의 모습을 연상해 작은 참새 모양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어린 시절,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가 나를 키우셨다.

할머니가 시장 갔다 오시면 마중 나가서 짐을 받아 들고 손을 잡아드렸다. 다리가 안 좋으시니까 층계를 오르실 때면 손에 힘을 꽉 주시며 나를 의지하셨다. 그러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할머니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다리도 아프신데 지금은 어떻게 계단을 올라오실까. 할머니 생각이 났다. 손녀딸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 은하와 함께 졸업 작품으로 준비했고, 3월에 시작해서 8월에 완성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난간에 끼워 같이 층계에 오를 수 있도록 해야 했기에, 바퀴를 만들어 달았다.

바퀴는 실리콘 고무 같은 재질을 사용해서 힘을 조금 주면 올라가고 잠시 쉴 때면 마찰력 때문에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했다. 손잡이에 짐도 걸어놓을 수 있다.

하고 싶은 말? 어서 편리하고 튼튼한 제품으로 실용화되었으면 좋겠다.

전국 방방곡곡, 전 세계 어르신들이 갖고 다니시며 유용하게 쓰시는 걸 보면 무지 행복할 것 같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만난
조용직(82) 할머니. 제품의 의미를 들은
할머니께서 흔쾌히 사진 촬영에
응해주셔서 참 감사했다.

마음을 전하기에 충분해요, 장미

계절의 여왕 5월은 꽃으로 보자면 ‘장미의 달’이기도 하답니다.
장미는 5월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발하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5월은 이런저런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
바늘과 실이 영원불변의 파트너이듯이 선물에도 꼭 꽃이 따라가기 마련.
대부분의 사람들이 ‘꽃’이라는 단어 앞에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게 바로 ‘장미’라고 합니다.
그래서 장미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때이기도 하지요.
선물을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이 예쁜 장미 화분 하나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데 충분합니다.
자른 장미도 예쁘지만 화분에 담긴 장미는 꽃도 오래갈 뿐 아니라 잘 보관하면 해마다 예쁜 꽃을 계속 감상할 수 있고,
볼 때마다 그걸 선물해 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새록새록 떠오르니, 이래저래 아름다운 날들이랍니다.

햇빛 직사광선 또는 그에 가까운 양지 바른 곳이 좋아요.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흠뻑 주세요.

번식 그렇다고 물을 너무 자주 주면 과습으로 누런 잎이 생기고 뿌리가 상하므로 조심.

비료 주기 포기나누기 또는 꺾꽂이(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가능) 하세요.

관리 장미는 비교적 많은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서 봄과 가을에 2주일에 한 번씩 액체 비료를 주면 튼튼하게 자란답니다. 액체 비료를 물에 섞어 분무기로 잎에 직접 뿌려주면 더욱 좋아요. 꽃이 다 지고 나면 줄기 아랫부분 두 마디 정도를 남기고 바짝 자른 다음 새 흙에 분갈이해주면 이듬해에 더욱 풍성한 꽃을 볼 수 있어요.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고양이와 망아지

내 기억 속의 첫 유행가는 진송남의 히트송 ‘바보처럼 울었다’이다. 고작 아홉 살이었던 아이가 왜 그렇게 청승맞은 뽕짝을 좋아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뽕짝은 온 가족이 함께 즐기던 노래였다.

철물점을 하시던 아버지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얼큰하게 취해서 돌아오는 날이면, 당신은 우리 형제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노래자랑을 시켰다.

부끄럼 많은 열한 살 누나는 이불 속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일찍이 트로트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당당하게 아버지 앞으로 나가 한 곡조를 뽑았다.

‘♪♬ 그렇게 그렇게 사랑을 하면서도 어이해 어이해 말 한마디 못 한 채
바보처럼 바보처럼 그 님을 잃어버리고 고까짓 것 해보건만
아무래도 못 잊어서 아무래도 못 잊어서 바보처럼 울었다. 목을 놓아 울었다 ♪♬’

내 노래가 끝나면 여섯 살짜리 동생 차례였다. 이제 겨우 엄마 앞에서 짝짜꿍이나 할 어린 녀석이 꽤나 조숙했는지 동생도 가요를 불렀다. 내 동생 십팔번은 남진의 ‘가슴 아프게’였다.

‘♪♬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바다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

동생의 노래가 끝나면 아버지는 아주 드러내놓고 박장대소하셨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형인 내가 훨씬 더 멋지게 잘 불렀는데 아버지는 왜 동생 노래에만 열광하실까. 이별의 이유가 바다 때문이라는 그 얼토당토않는 노랫말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눈물짓는다는 멋진 가사와 어찌 비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진짜 불만이었다.

아버지는 특히 막내 동생한테 관대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와 막내 동생과 내가 나란히 누워 라디오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옆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던 일곱 살짜리 막내 고사리 손이 아버지의 헐렁한 러닝 속으로 쓱 들어가더니, 아버지의 가슴께에서 꼼지락 꼼지락대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아니! 아버지 맨살에 손을 대다니!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당신은 막내의 허튼짓에 짐짓 시치미를 떼고 라디오 연속극만 듣고 계셨다. 아! 나는 그때 불현듯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비결을 알아차렸다. 나는 시시탐탐 기회를 엿보았고 며칠 후 기회가 왔다.

그날도 머리맡에 있는 고물 라디오가 웽웽거렸고, 아버지는 두 팔로 뒷머리를 감싸 안는 특유의 자세로 누워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윗목에 밥상을 펴놓고 공부하던 나는 피곤한 척 기지개를 켜고 슬그머니 당신 곁으로 가서 누웠다. 아버지는 여전히 연속극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용기를 내어 아버지 쪽으로 돌아눕고, 한쪽 팔로 당신의 넉넉한 배를 안으면서, 부드러운 콧소리로 “아부지예” 하고 불러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자슥이 와 이라노?” 하는 표정으로 힐긋 보시더니 내 팔을 툭 쳐서 물리치셨다. 나는 쭈뼛쭈뼛하다가 밥상 겸 책상으로 돌아왔다. 아마 그 순간 라디오 연속극에서는 실연당한 여인의 흐느낌과 슬픈 배경음악이 흘렀을 것이다. 으으으…. 뻘쭘했던 장남의 굴욕이여.

이솝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느 집에서 날마다 집주인의 귀여움을 듬뿍 받고 사는 고양이를 부러워하던 망아지가, 주인이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고양이처럼 아양 피우다가 쫓겨난 이야기. 일곱 살짜리 막내 동생이 하던 어리광을 초등학교 육 학년이던 내가 따라했으니, 생각하면 그날 실컷 얻어터지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진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자고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에휴~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내 인생의 멘토, 동생 덕분에 감사함 알게 되었죠

박정윤 33세. 푸드코디네이터.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

1999년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비보가 날아들었다. 동생의 갑작스런 사고였다.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간호하기 위해 나는 군에 있는 장기자랑, 체육대회 등 온갖 행사에 다 도전했다. 1등을 하면 2~3일간의 포상휴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 후엔 부모님과 번갈아가며 동생을 돌보기 시작했다.

처음 동생을 간호할 때 무엇부터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척추를 다친 동생은 어깨와 손목을 움직이는 것 이외에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끔 동생이 침대에서 자고 있을 땐 휠체어를 타고 다녀보기도 했다. 동생이 어떤 점을 불편해하는지를 잘 알아야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두 달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어떤 점이 불편하고 힘든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두 발로 다닐 때 몰랐던 것들이 점점 눈에 띄었다. ‘녀석이 얼마나 힘들까….’ 힘들게 병마와 싸우는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나는 웃기 시작했다.

동생의 사고는 나의 의식을, 나의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었다. 대개 사람은 몸이 멀쩡할 땐 혼자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몸이 아프면 상황이 달라진다.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것이라는 걸 저절로 깨닫게 된다. 우리 가족 역시 그동안 도와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재활 치료를 도와주신 분들, 보조기를 맞춰주신 분들, 병원에서 만난 가족 같은 보호자분들, 재활원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감사함 때문일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는 게 맞다.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게 보이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가끔 친구가 화났던 일을 이야기하면 난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우리는 화를 낼 수 있어 좋잖아.” 그리곤 웃는다. 세상에는 화내고 싶어도 화낼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다 보니 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주어진 조건에 그냥 감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화가 나지 않는다. 아니, 화를 낼 수 없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폭이 넓어지는 거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 좋아야 웃지만, 나는 별것 아닌 일에도 잘 웃는다. 다행히 동생도 각고의 노력 끝에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고, 직장에도 다니고 있다. 그리고 오는 5월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앞두고 있다.

행복이란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인 거 같다. 뭔가를 열심히 하다 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듯이, 욕심을 내기보다 작은 것의 소중함도 알고 고마워할 줄 알 때 마음도 편안해지고 즐거워지는 것 같다. 만약 동생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돈만 좇아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어떤 일을 할 때도 이웃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작년 6월, 호텔에서 요리하던 친구 두 명과 동업으로 친환경 식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한식, 일식, 양식 요리사들이 함께하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다양한 음식 색깔을 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음식을 파는 게 아닌 손님과 소통하고 나누는 식공간으로 꾸려나가고 싶었다. 좋은 식자재를 찾던 중 친환경 먹을거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막걸리도 대기업보다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좋은 품질의 지역 막걸리를 소개하는 데 그 뜻을 모았다. 어려운 우리 농가도 살고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은 전통주 파티를 열어 가게에 오신 손님들끼리도 서로 인사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끼리도 가족 같고 친구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연스레 의미 있는 일들을 함께 계획하기도 한다. 고생하시는 홍대 환경미화원분들에게 녹두전을 부쳐드리기도 하고, 일본 지진 피해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

음식을 통해 손님들과 소통하고, 무언가를 나누다 보니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기분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외된 아이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요리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음식은 좋은 감성을 키울 수 있다고 믿기에…. 그 꿈이 이뤄지는 그날까지 신나게, 파이팅이다!

신바람 난 사람들의 신나는 제안 하나

‘한번 이렇게 해보세요’
신바람 난 사람들의 신나는 제안 하나

좋아하는 것을 무조건 해보자

자기 생을 진정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나 역시 일에 파묻혀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다가 내 나이 40줄에 들어서면서 부정맥, 우울증, 공황장애 등 한꺼번에 병이 닥쳐왔다. 죽음은 거꾸로 삶을 생각하게 했다. 가장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시면서 조금은 더 즐겁게 살아야겠다고 자각하게 됐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체면 때문에, 눈치 보느라 하고 싶어도 못 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천문학, 식물, 여행, 역사 등 세상엔 흥미로운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마다 화훼 농장에 가서 식물을 본다. 식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가고 관련 책도 보면 단순히 ‘꽃이 아름답다’에서 보고 아는 즐거움이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직접 해보자. 오히려 회사 일도 더 잘되고, 삶이 즐거워진다. 덕분에 마침내 고난과 고통을 넘어 <즐거운 인생 맛있는 삶> 이라는 책까지 출판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송인섭 60세.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예쁜 식사 매너로 점심시간을 활기차게

내게 점심시간은 동료들과 또 다른 만남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날 오후 근무도 더 활기차게 보낼 수 있다. 가끔 원하는 점심 메뉴가 아닐지라도, 가고 싶지 않은 식당일지라도 만면에 미소를 짓는 것은 기본. 식당에 가면 동료들을 위한 찬란한 서비스를 위해 손을 깨끗이 닦는다. 냅킨을 한 장씩 앞자리에 깔아주고, 젓가락과 숟가락을 가지런히 신속, 정확하게 직급 순서대로 놓아드린다. 개인 기호에 맞게 너무 차갑거나 뜨겁지 않게 물을 따라주고, 간혹 천천히 먹는 동료들을 위해 템포 맞추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모두 식사를 마칠 무렵 커피를 뽑아 대령한다. 식후 근처를 산책하고 수다를 떠는 것도 아름다운 마무리. 사실 동료들과 식사하는 건 너무 흔한 일이고 이런 일들은 사소해서 그냥 넘어갈 때가 많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쓰면 오전의 피로는 싹 풀리고 오후 근무까지 즐거워진다.

이진욱 34세.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노송동

일기 쓰며 나만의 시간 가져요

신나게 즐겁게 살고 싶지만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자기 계발서류의 책을 봤지만, 내 것이 되진 못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생각 바꿔 먹기’이다. 어렵고 힘든 일을 겪으면 액땜이려니, 일이 더 잘되려고 이러나 보다, 하면서 더 잘되기 위한 인생의 전환점으로 봤다.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가 몰려오면 생각을 바꿔 먹는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럴 땐 일기를 쓴다. 지극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몸, 마음을 쉬게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나의 감정과 스트레스에 처한 상황을 풀어서 쓰다 보면 내 자신이 객관화된다. ‘이래서 내가 아쉬워하는구나, 힘들어하는구나’도 알게 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하게 된다. 충분히 내 자신에 대해서 바라볼 시간을 주면,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힘을 얻게 된다.

임솔 25세. 인천시 남구 주안동

화분에 이름 지어주기, 그리고 선물하기

우연히 식물 관련 책을 보다가 필이 꽂혀 책상에 화분을 놓고 키우게 되었다. 깜찍한 모양새를 떠올리며 예쁜 이름도 지어주었다. 꽃 모양이 마치 참새가 노래 부르는 듯하여 ‘짹짹이’ 동글동글 완두콩 같아 ‘콩콩이’….^^ 하루하루 잎이 커지고 꽃을 피워 ‘방가방가’ 이름을 지어주니, 녀석들을 볼 때마다 생기가 났고, 그 기분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졌다. 동료들 역시 대부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보내고 있는 터라 귀염둥이 화분들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잘 키운 화분을 ‘눈의 피로를 풀어보라’며 동료 책상에 사뿐히 놓아주고, 이왕이면 ‘싹싹이’ ‘똑똑이’ ‘(귀염)둥이’ 동료와 꼭 닮은 이름도 지어주면 정말 좋아라 한다. 화분에 물을 줄 때도 동료들의 화분도 같이 챙겨주면 물을 촉촉이 머금은 화분을 대하며 신나 한다. 생명과 마주하는 순간, 그 싱그러움은 누구에게나 전염되는 것 같다.

김미현 42세. 경남 김해시 삼계동

 

‘해야만 하는 일’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이경재 마음코칭센터 대표

우리는 하루를 맞이하면서 ‘오늘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떠올린다. 생존을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만 하다 보면 그 하루는 힘들고 벅찰 것이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의무로 꽉 채워진 삶에서 보다 여유롭고 신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 오늘 내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가령, 산책이나 친구와의 만남 등 작은 것이라도 좋다.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걸 선택하고 해 나가다 보면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2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해서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다든지, 관련 분야 책을 읽는다든지 자기 계발을 하도록 한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은 금물. 무언가 더 가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편안하게 할 수 있다.

                    3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받으려고만 하기보다 나보다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있는지 주위를 살피고 도와주자. 주는 즐거움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힘들어하는 동료에게 활력이 될 만한 일이 뭐 없을까. 데이트를 신청하거나, 따듯한 커피 한잔을 타다 주는 것도 좋겠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오늘 내가 의무로 해야 하는 일과 선택한 일들을 적어보자. 이들 중에 먼저 해야 할 일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한다. 하루가 의무적인 일들로만 채워지지 않게, 자신이 선택한 일들을 함께 해 나간다면 보다 신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너무 계획을 많이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우도록 하자. 살다 보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고, 계획을 지키느라 오히려 지칠 수도 있다. 계획을 세울 때에는 그 모든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와 공백도 함께 포함시켜야 한다.

이경재 님은 마음코칭센터 대표이자, 한국리더십센터 전문위원, (사)함께여는교육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장사는 아니지만 베풀면서 살자던 시어머니 말씀 따라요

세상 물가 다 올라도 국밥 한 그릇에 2,000원

서울 종로구 낙원동 권영희씨네 국밥집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

치솟는 물가. 커피 한잔 값도 5천 원이 훌쩍 넘는 요즘, 단돈 2천 원에 따뜻한 한 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세상 물가가 다 올라도 여기는 안 오른다’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 국밥집 ‘소문난집 추어탕’이다. 간판은 ‘추어탕’이지만 지금은 소뼈와 우거지로 푹 고아낸 국물에 손두부를 넣어 끓인 ‘우거지얼큰탕’ 한 가지만 팔고 있다.

“추어탕은 없고, 우거지얼큰탕~ 2천 원이에요. 맛있어요.”

매일 새벽 4시에 문 열기, 하루 종일 손님에게 해장국 떠드리기 40년째라는 권영희(65)씨가 바로 이집 주인. 허술한 건물에 싼값이라고 맛까지 허투루 본다면 섭섭한 말씀이다. 예술가, 탑골공원에 바람 쐬러 나오신 어르신들,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친구와 자녀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 너무 싼 가격에 반신반의하며 들어온 손님들까지, 담백하고 얼큰한 국물 맛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워낙 오랜 단골이 많아 20년 된 손님 정도는 ‘얼마 안 됐다’며 겸손해지게 만드는 곳이니, 새내기 손님들은 그야말로 엄지를 치켜들 뿐이다.

“국물이 얼큰한 게 진짜 맛있어요. 가격도 고맙고(웃음). 밥은 먹어야겠고, 돈은 별로 없고, 그럴 때 이렇게 한 끼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워요. 특히 겨울엔 우리같이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덜덜 떨거든요. 그럴 때 여기 와서 우거지탕 한 그릇 먹으면 속이 뜨듯하면서 살 것 같죠.” (퀵서비스 기사 이승용, 56세)

권영희씨의 식당 이야기를 듣자면 시어머니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57년 전, 한국 전쟁 때 피난을 온 시어머니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추어탕 집을 시작한 것.

시집오자마자 어머니를 도와야 했던 권영희씨에게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식당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한다. 당시 추어탕 가격도 400원으로 다른 식당의 절반 수준이었다. 배고픈 시절을 겪으셨던 시어머니는 ‘우리가 비록 대단한 장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웃에게 베풀면서 살자,그게 다 훗날에 복이 된다’며싼 가격을 유지하셨다. 시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은 권영희씨는 어머니의 그 뜻까지도 이어받고자 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이 물가가 계속 오르자, 권영희씨는 추어탕에서 우거지얼큰탕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비싼 미꾸라지 대신 새벽같이 도매시장에 직접 가서 구할 수 있는 걸로 국밥을 만들면 단가를 낮출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격 올리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어르신들, 어려운 분들이 많이 오시니까.”

미안해서 못 먹겠다며 가격 좀 올리라는 손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천오백 원을 유지했다. 그러다 작년 가을 배추 한 포기가 만 원을 넘으면서 어쩔 수 없이 지금의 2천 원을 받게 되었다며 미안해한다. 대신 맛있는 국밥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권영희씨. 그녀에게는 무섭게 오르는 물가도, 나의 수고에 대한 대가나 이익도 아랑곳없어 보인다.

그 마음 안다는 듯 손님들은 직원을 자청한다. 인건비라도 줄이라며 직접 국밥을 나르고, 휴지도 메뉴판도 알아서 주고받는다.

“에구,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갖다 준다니까.” “됐다고요~ 나도 손 있다고요~”

식당 안엔 미소가 번지고, 권영희씨의 국밥 푸는 손은 더욱 바빠진다.

“내가 만든 음식, 맛있게 먹어주고 팔아주니, 내가 더 고마워해야 되는데 손님들이 나보다 더 고마워하니까 그게 보람이죠. 언제까지 할지는 나도 모르지. 힘닿는 데까지 해야죠.”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8)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8)

효녀 심청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지만 심성 곱게 자란 심청이는,

지극정성으로 앞 못 보는 아버지를 부양합니다.

그러다가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도 있다는 말에,

공양미 삼백 석을 받는 대가로 뱃사람들의 제물이 되기로 하지요.

짙푸른 바닷물 앞에 선 심청이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아버지 어두운 눈 밝게 하시어 이 세상을 보게 하소서.”

하고 하늘을 향해 간절히 빌고는 인당수에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심청이의 크나큰 효심에 감동한 용왕님은 심청이를

다시 살려주라 하고,

임금님의 눈에 뜨인 심청이는 황후가 됩니다.

어질고 아름다운 심황후가 바로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 심봉사는

너무나도 벅찬 기쁨과 환희에 찬 나머지 기적처럼 두 눈을 뜨게 되지요.

작가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리의 이야기.

원래 심청이 이야기를 쓴 이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다면,

지금까지의 나 자신은 다 버려라. 그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하는 참된 길이다.”

과연 나는 돈을 잘 쓰고 있는가?

돈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2)

정리 문진정

우리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굳게 믿으며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벌이에 소모한다. 그리고 ‘친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으니까’ 등의 정신적인 가치를 핑계 삼아 무분별한 소비를 한다. 그러나 돈에 대한 나의 감정과 경험들을 되돌아보면 결코 돈이 개인의 행복이나 진실한 인간관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돈을 버느라 하루하루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 전에,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얼마의 돈과 맞바꾸고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 돈을 쓰고, 어떤 소비에 만족하며,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지’ 소비 실태를 종이 위에 낱낱이 꺼내 보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눈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돈이 아쉽고 쪼들렸던 생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될 것이다.

* 실제로 내가 버는 돈은 얼마일까?

 대부분의 직장인은 월급이 곧 버는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가는 돈’을 월급에서 빼야만 실제로 내 손에 들어오는 수입이 된다.

① 직장에 다니느라 필요한 모든 것(출퇴근, 정장 구입, 점심 식사, 스트레스 해소, 휴가, 병원 치료, 자녀 보육, 파출부 고용 등)에 들어가는 비용과 모든 시간을 계산한다.

② 비용은 월급에서 제하고, 시간은 근무 시간에 더한 다음, 계산된 총비용을 총시간으로 나누면 시간당 실제로 버는 돈을 알 수 있다. → 자녀 보육비, 점심 식사비, 퇴근 후 술자리 비용 등을 제하고 나면 실제 수중에 들어오는 수입은 월급보다 훨씬 적다.

* 돈이 가치 있게 쓰이고 있을까?  

우리가 쓰는 돈은 곧 삶의 에너지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돈을 버는 데 쓰기 때문이다.

돈을 수명으로 바꿔 보면 그 가치가 달라진다.

① 자신만의 소비 패턴을 알아낸 후 주거비, 식비, 피복비, 교통비, 의료비 등의 항목별로 나누고 항목마다 하위 범주를 세세하게 구분한다(예_식비 : 집에서, 회사에서, 간식, 외식, 술, 커피, 건강식품 등).

② 세부 항목별 지출 금액을 ‘시간당 실제 임금’으로 나누어 시간으로 환산한다. 예를 들어 시간당 실제 임금이 4천 원인 사람이 퇴근 후 맥주로 스트레스를 푸는 데 월급 중 20만 원을 사용한다면 한 달에 50시간은 술을 먹기 위해 인생을 소모하는 셈이다. →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서 실제 몇 시간 동안 일을 했는지, 그 시간의 인생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소비였는지 돌아본다.

* 삶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 질문

지출 세부 항목마다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 소비 습관을 바꿀 수 있다.

① 내가 투자한 에너지와 시간에 걸맞은 만족과 가치를 얻었는가? ② 내 가치와 인생의 목적에 부합하는가? ③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면, 과연 그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가?

돈을 주지 않아도 기꺼이 시간을 투자할 만큼 만족스럽고, 인생의 목적에 맞는 소비였다면, ‘+’를, 그렇지 않다면 ‘-’를  표시한다. →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다 보면 나의 쇼핑 습관이 얼마나 충동적이며 중독성 있는지 알게 된다. 습관적으로 혹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지출을 한눈에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가 자동으로 줄어든다.

나의 소비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많은 돈이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순간 마음에서 큰 만족감이 생길 것이다. 모든 물건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고 내 것을 이웃과 나누는 기쁨도 알게 된다. 그때부터 돈은 예전의 돈이 아니다. 그동안 돈을 벌고, 빚을 걱정하느라 소모했던 에너지를 가치 있게 사용할 방법을 찾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가치와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참고 도서  <돈 사용설명서>  비키 로빈 ·조 도밍후에즈 · 모니크 틸포드 / 도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어요

국지혜 25세. 직장인.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착한 아이로 통했다. 친구들은 뭐든 부탁을 해왔다. 하나둘 들어주다 보면 숙제도 조별 과제도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아끼는 옷이나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빌려줬다가 망가져서 돌아온 물건 때문에 부모님께 혼도 났다. ‘난 못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힘들었다.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마음수련을 하면서 초등학교 시절의 사건이 떠올랐다. 단짝 친구와 나 사이에 새로운 친구가 등장하면서 나만의 솔메이트를 빼앗겼던 일. 나는 이제 누구랑 놀고 버스에서는 누구랑 앉나…. 어린 마음에 한참 동안 울며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 후 그 단짝 친구는 메신저로 사과를 했고 오해는 풀렸지만, 그때의 상처와 열등감은 마음에 그대로 남았다. 혼자가 된다는 것이 두려웠고 친구를 잃을까 봐 불안했다. ‘남을 위한답시고 베풀었던 호의가 친구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한 일이었구나.’ 내가 생각했던 바름, 예의, 배려의 기준과 틀을 버려나갔다. 친구를 잃었다는 상처도 두려움도 다 버리고 나니 인간관계에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지혜롭게 부탁을 거절하는 방법도 안다. 그것은 스스로 투명해지는 것이다. 도와주고 싶지만 못 하는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면, 친구도 이해를 해주고 나도 마음에 앙금이 없으니 편안하다. 예전에는 겉으로만 웃었다면 지금은 마음이 자유롭게 웃는다. 아무런 바람 없이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인 것 같다.

수면제, 소화제와 헤어지다

이정아 41세. 직장인. 서울시 서초구 서초2동

99년도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던 나는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그때쯤부터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버거웠고 “장녀도 아닌데 왜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하느냐”며 가족에 대한 원망과 화가 끓어올랐다. 잠을 푹 잘 수가 없으니 두통이 심했다.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위장이 바늘로 찌르는 것같이 아팠다. 어쩔 수 없이 진통제와 소화제를 매일 들고 다녔다. 몸이 아프니 짜증도 많이 났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학생 수가 줄면 줄어서, 늘면 늘어서 스트레스였다. 불면증 약을 먹어보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 잠이 잘 온다고 해서 헬스클럽에 등록하기도 하고, 새벽까지 동대문 쇼핑센터와 새벽 시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수면 사이클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7년을 버티다가 너무나 힘이 들어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지인으로부터 마음수련을 소개받은 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경제적 압박감과 불안을 버려나갔다. 자리에 누우면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는데, 버릴수록 그런 현상이 점점 없어졌다. 부모님을 떠올려보니 자식을 위해 평생 헌신하신 것밖에 없었다. 잠깐 돈 좀 번다며 그렇게 유세를 떨었다니…. 너무도 부끄러웠다. 한 달쯤이 지나자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잠이 오기 시작했다. 두 달째부터는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예민하던 성격이 부드러워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규칙적으로 아침 식사를 하니 위도 튼튼해졌다. 1년 전부터는 회사를 다니는데, 하루 종일 일을 하지만 숙면을 취해서인지 활력 있어 보인다, 부지런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무기력했던 나를 건강한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준 신기한 빼기 방법. 마음을 버릴수록 빼기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신경을 안정시켜줘요, 돼지고기 달래무침

돼지고기를 데쳐 채소와 무치는 요리는 되도록 얇게 저민 고기를 사용합니다.
샤브샤브용으로 얇게 썰어진 것을 구입하거나 즉석에서 냉동 고기를 얇게 썰어달라고 주문합니다.
보통은 삼겹살이 일반적이나 간혹 앞다리 살이나 뒷다리 살도 얇게 썰어줄 때가 있습니다.
달래는 비타민C와 칼슘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효능이 있어 잠이 잘 오게 합니다.

이양지 자연요리 연구가

재료 준비

돼지고기(앞다리 살) 200g, 달래 100g, 홍고추 1/2개, 상추 7장, 김(김밥용) 1장, 무침 장(고춧가루 1.5큰술, 설탕 0.5큰술, 간장 3.5큰술, 생강즙 1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레몬즙 1작은술, 참기름/통깨 조금씩)

만들기

① 돼지고기는 끓는 물에 한 장씩 흩어서 넣어 삶아 체에 밭쳐 물기를 빼면서 식힌다.
② 달래는 머리가 굵은 것은 반으로 갈라 3~4cm 길이로 썬다.
③ 홍고추는 씨를 빼고 얇게 채를 썰고 상추는 한입 크기로 뜯는다. 김은 잘게 찢는다.
④ 볼에 무침 장 재료를 넣어 섞고 ①,②,③을 전부 넣어 살살 버무려낸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