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식의 교단일기"

잘났다, 까미!

아내는 설거지 중이었다. 어머니가 과일을 깎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며칠 전, 어머니 집 고양이 까미가 달걀만 한 생쥐를 물어왔다. 까미는 생포한 전리품을 단박에 처치하지 않고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앞발로 툭툭 치면서 장난감 굴리듯 가지고 놀았다. 달걀만 한 생쥐는 죽기 살기로 탈출하려 하고 까미는 잽싸게 제자리에 물어다 놓기를 되풀이하였다. 나중에는 생쥐도 지쳤는지 꼼짝도 않고 앉아… Continue reading

순천 미인

일개미 같은 어머니입니다. 동생을 보낸 뒤부터 당신의 노동은 텃밭으로 옮겨 갔습니다. 맑은 하늘 구름에 앉아 어머니 집을 내려다봅니다. 눈 아래 아득한 성냥갑 집에서 허리 굽은 점 하나가 나옵니다. 그 점을 따라 한참 동안 눈길을 긋습니다. 어머니 발자국이 남긴 실곡선이 텃밭과 마당에 가득합니다. 부엌강아지 같은 어머니입니다. 아직도 목이 늘어진 양말을 기워 신고 밭일을 나가십니다. 내 아들이… Continue reading

책상 줄을 맞추며

얘들아. 맑은 겨울 수요일 아침이다. 교실에는 토수가 제일 먼저 와서 혼자 책을 읽고 있다. 신입 사원처럼 단정한 토수와 인사를 나누고, 휴게실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타서 다시 교실로 돌아오니 우진이와 주환이가 아침 인사를 한다. 둘은 입을 맞춘 듯 내게 “선생님 오늘 뭐 해요?” 하고 물었다. 오늘은 졸업 예행 연습하는 날이라고 대답하니, 둘은 멀뚱한 표정으로 “졸업식… Continue reading

파랑새처럼

아이가 바삐 강당 계단을 올라간다. 깡총깡총 내딛는 발걸음이 얼마나 날렵한지, 파랑새가 실개천을 스쳐 나는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갖지 못한 가벼움의 미학이 있다. 아침이었다. 열한 살 지우양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제 자랑을 쏟아놓았다. “선생님, 우와! 나 어제 대박 났어요.” “뭔데?” “원호가요, 나를 좋아한대요. 문자로 그랬어요.” 덜렁이 원호가 여학생한테 관심을? 그 개구쟁이가? 아무래도 뻥일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 Continue reading

영희이모

어린 시절, 엄마 손 잡고 외갓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두메산골 외갓집에는 외증조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작은 외할머니 슬하로, 입대를 앞둔 큰삼촌부터 여섯 살 꼬맹이 이모까지, 모두 열두 명의 식솔이 와글와글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 영미이모와 영희이모는 참 대조적이었다. 열다섯 살 영미이모는 산골 소녀답지 않게 얼굴이 예쁘장하고 손도 빨라 시키는 일을 척척 잘했다. 하지만 촌스럽게 생긴 열네… Continue reading

탑리역에서

지난여름, 새내기 대학생 딸이 생애 첫 기차 여행을 하였다. 사박 오일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딸은 어느 간이역에서 본 그림 같은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동해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탔어요. 차창 너머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들이 영화처럼 지나고 있었어요. 얼마나 달렸을까. 긴 철길이 들판과 마을 사이를 지나는 곳에 탑리역이 있었어요. 기차가 정차하자 사람들은 분주한 걸음으로 플랫폼을 빠져나갔어요. 그런데… Continue reading

고양이가 사는 법

어머니는 찰떡같이 약속해놓고, 내가 방심한 사이 옷 보따리를 싸 들고 잽싸게 진주역으로 달아났다. 낌새를 채고 역으로 갔을 때, 진주발 순천행 9시 30분 기차는 이미 떠나고 선로에는 장대 같은 빗줄기만 퍼붓고 있었다. 호우주의보가 해제되면 내 차로 함께 시골집에 가기로 한 약속을 어머니는 단박에 깨뜨린 것이다. 오로지 그놈의 고양이들 때문에. 결국 어머니 뒤를 쫓아 시골집으로 차를 몰았다…. Continue reading

그늘 밑 나무 의자에

야영 수련 활동 이틀째, 그 아이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불현듯이 달려들어 반 친구 종윤이를 때린 것이다. 돌발적인 폭력 행사에 놀란 야영 수련원 강사들은 그 아이를 수련원 사무실에 따로 떼어 놓았다. 연락을 받고 서둘러 사무실로 가보니 아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치리라던 다짐이 또 흔들렸다. 아이는 내가 다가가자 “언제 과자… Continue reading

바담 풍 선생

교육도 생물이다. 못난 스승이 ‘바담 풍’이라 가르쳐도, 슬기로운 제자들이 ‘바람 풍’이라고 알아서 깨치는 일도 있다. 이른바 청출어람. 선생치고는 좀 어리버리한 내겐 가끔 있는 일이다. 사춘기 초입 열세 살 인생들에게 젊은 교생 선생님은 그야말로 로망이다. 실습 기간 불과 2주일 만에 아이들은 제가 가진 도토리를 몽땅 드릴 만큼 가까워져, 마침내 헤어지는 날 교실 풍경은 가랑잎 분교 졸업식장을… Continue reading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쿠키

오늘 아침 8시 50분 독서 활동 시간, 기특한 내 아이들은 하나같이 책 읽기에 열중하고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 교실 뒷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옆 반 여선생님 얼굴이 빼꼼 들어왔다. 그 선생님은 우리 반 독서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으로 ‘밖에 누가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가 보니 우리 반 그 아이가 가방을 멘 채, 골마루…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