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가을, 스치는 바람이 고맙습니다

도회지 생활은 바빴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나이 사십을 넘어가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나를 채우고 싶었습니다. 운명처럼 지리산행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산 지 14년이 되었습니다. 농사는 단순하지만 농사가 일깨우는 것은 다양합니다. 논이나 밭을 지날 때 그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연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갑니다. 농사의 깊은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드는 나는 행복합니다. 고된 육체노동이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음을 푸근하게 해줍니다. 스치는 바람이 고맙고 살아감이 고맙습니다.

사진, 글 이창수

명품 농부

모심기 전 논에서 해야 할 일은 가래질과 쟁기질과 써레질입니다. 가래질은 논둑을 다지는 일이고, 쟁기질은 묵은 땅을 뒤집는 일이고, 써레질은 흙을 잘게 부수어 고르는 일입니다.

논을 보아 하니 쟁기질은 끝나고 써레질은 아직 남았습니다. 담배를 문 아저씨가 등허리 빠지게 논둑을 다지고 있습니다. 논농사에서 제일 힘든 일이 가래질입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며 힘이 빠진 논둑을 다지고 다져야 합니다. 쥐 새끼나 뱀이 낸 구멍으로 논물이 빠지지 않게 잘 다져야 합니다. 귀농해 논농사하는 후배에게 물었습니다.

“아침에 들판서 보니 어떤 이가 논둑을 방바닥 미장하듯 공들여 하던데.” “아이고 형님, 어디 논둑은 혓바닥으로 핥듯이 해놨어요. 저는 힘들어서 절대 안 해요. 이쪽 분들이나 하지 우리 같은 놈들은 못 합니다.” ‘이쪽 분’은 원래부터 살던 ‘명품 농부’이고 ‘우리 같은 놈’은 귀농한 약간 젊은 ‘짝퉁 농부’를 말합니다. 농부나, 흙이나, 물이나 쌀 한 톨 만드는 데 참으로 노고가 많습니다. 밥 한술 뜨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어 그냥”

해거름 들길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디 다녀오세요?” “어~어 논에.” “다 저녁에 무슨 논예요?” “어~어 그냥.” 대개 길에서 만나는 어르신과의 대화는 기름기 없는 담백한 말이 이어집니다. 지난밤 내린 비가 논에 가득합니다. 이른 아침 비 그치기가 무섭게 아랫마을 아저씨는 논에 들어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어~어 그냥”입니다. 내가 농사짓는다고 떠들고 다녀도 실패한 농사꾼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어 그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도회지 출신이라 잡생각 많고, 이유도 많아 그들의 무심한 마음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농사는 마음으로 짓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내게는 참으로 멀고 먼 길입니다. 둔덕에 앉아 조용히 그를 바라봅니다. 그의 내딛는 발끝마다, 풀 뽑는 손끝마다 동심원이 일어 건너편 산 그림자가 깨집니다. 깨진 산 그림자는 그의 뒤를 따라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여름 해에 벼가 소리 없이 익어갑니다.

쨍한 햇빛

스치며 지나치는 길에 나무 사이로 농부를 보았습니다. 장마 중에 잠시 햇빛이 나니 서둘러 논에 나왔나 봅니다. 비는 벼도, 잡초도 무럭무럭 자라게 합니다. 비는 무엇에나 동등합니다. 자연이 그러하니 농사짓는 이는 제 노동만큼 결실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꾸부정한 자세로 잡초를 뽑아내는 농부의 모습에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가을 빛 잔치

먼 길 달려 온 햇빛이 논에 내려 빛 잔치를 벌입니다. 건너편 둔덕에 앉아 빛 잔치에 젖어듭니다. 현란한 가을빛에 눈을 감습니다. “너는 지난여름 무엇을 했는고?” 감은 눈에 비친 밝은 빛이 묻습니다.

뜨끔합니다. 고추도 심고, 가지도, 토마토도 두루 심었건만 근무 태만에 결국 잡초로 뒤엉킨 밭을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할머니의 다랑논은 이삭이 충만하지만 근무 태만인 우리 밭은 잡초가 충만합니다. 개미의 논에도 베짱이의 밭에도 빛은 고루 비추나 결국 준비된 사람만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합니다. 자연은 분별함이 없으니 모두 제 할 따름입니다.

사진가 이창수님은 1960년생으로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17년간 사진 기자로 근무해왔습니다. 1999년 지리산으로 내려가 수시로 산과 들을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현재 지리산 악양골에 살면서 내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히말14, 희망14>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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