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니스트 지현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내 방문을 열면 베란다에서 시작하여 방문 틀로 솟구쳐 올라가는 달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달을 보는 것이다. 이스터섬에 들어앉아 변함없는 세월을 보내는
모아이 석상처럼 살아가는 나에게는, 뜨고 짐을, 그리고 차고 기움을 거듭하는 저 달의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자 내 마음을 투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달처럼 높이 솟아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을 반복하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면….   지현곤 카투니스트

내 작은 방에서는 왼쪽 방문을 통해서야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그걸 담고 싶어 오른팔로 상체를 의지하고 보다 보니, 자연스레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옆의 작품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한순간 세상으로 나온 나의 모습이다. 작은 기계에 의지하여 자유로이 넘나드는 꿈. 동그라미들은 달이자 온전함의 상징.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갑자기 허리에 신경마비가 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힘이 없어져 버렸다. 척추결핵이라는 병. 그 이후 나는 이 작은 방에서 바위처럼 머물며 살아왔다. 내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된 내가 그 분노를 삭이는 유일한 방법은 만화였다.

처음엔 동생이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허구의 세계가 상상의 나래로 날아 제 의지를 자유분방하게 펼쳐내는 만화가 좋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책장을 넘기며 동경하던 세계, 휠체어를 타고 전망 좋은 곳으로 가보기, 바닷가에서 사진 몇 장 찍어보기…. 마음속 소망들을 자유롭게 한 장의 사각 틀 안에 채워나갔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 장 안에 모든 내용을 담는 카툰 형식은 나에게 딱 맞는 것이었다.

<나> 처음으로 나의 상황을 표현한, 나를 위해 그려낸 진실된 한 점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인파의 물결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과 외따로이 떨어진 내가 아니라,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나. 휠체어로 대변되는 장애에서 벗어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시도이자 용기였다.

한 장, 한 장 그림이 쌓여가자, 사보나 만화 잡지의 독자란에 그림을 보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이삼 년가량 독자란에 꾸준히 실리기도 했다. 나도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구나! 기뻤다. 그러다 1991년, 서른 즈음에 <주간만화> 신인만화공모전 카툰 부문에 도전, 가작으로 입선을 하면서 나에게도 카툰작가라는 호칭이 붙었다.

나는 매일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연습장에 그 소재를 가득 채워놓고서, 다시 보면서 좋다, 안 좋다, 일일이 표시했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풍자적인 표현에 긍정적인 그림, 극한 상황에서의 마지막 유머나 상황 반전’이었다.

어떻게 완성도 있게 작품을 마무리할 것인가. 원숙함이나 노련함의 부족함이라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꼼꼼하게 채워 넣는 방법이었다. 면을 한 색으로 덮는다 치면 잉크로 채워버리면 그만인 것을 나는 잔선을 끊임없이 겹치고 덧대면서 채워 음영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내 그림은 원본 크기로 보는 게 가장 좋은 작품이 되었다. 세밀히 관찰하면 실수로 떨어뜨린 잉크 방울까지도 다 드러나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주제도 좀 더 넓어져야 되지 않나 싶었다. 그중 눈을 주게 된 것이 전쟁, 그리고 테러였다. 오늘날에도 이 세계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크든 작든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의 참상 속에 남은 자들은 모두 죽어가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그 폐허 속에서, 빨래를 널고, 비닐 속에서라도 자식을 키우고,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이어가는, 그런 생명력을, 삶에 대한 의지를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평화와 화해, 작은 것에서 희망을 찾고 기뻐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음, 행복한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고 싶었다.

점차 내 작품을 사랑해주는 분들이 생겼다. 2007년에는 처음으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주최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그다음 해 3월에는 한국 카툰작가로는 처음, 미국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 초청으로 전시를 열었다. 내 그림이 뉴욕에서 전시되다니! 이게 정말로 나에게 벌어진 일이 맞나 싶었다. 작품도 팔리고 실질적인 수익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번 것이다.

<탱크와 포신에 빨래 너는 아낙1>

완전 무장한 탱크의 포신에 태연히 빨래를 널고 있는 아낙네들. 그 소박한 행동에 군인들이 망연자실하다. 전쟁보다 삶이 더 소중하다.

나는 내 스스로를 ‘무인도에 사는 허수아비’로 생각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소멸되기 전까지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그래서 어느 순간 불리는 이름과 따스함을 전하는 눈빛들이 낯설고 어색했다.

나는 나의 이름 부르기를 꺼려왔었다. 매순간마다 서러움과 유아적인 미움, 그리고 혼자 있음을 느끼고는 말할 길 없는 초라한 서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정작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공주대학교 만화학부의 임청산 교수님, 그분을 빼고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교수님은 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준 분이다. 어디 그뿐일까. 내가 힘겨움에 비틀거리는 순간에 나를 잡아주신 분도 바로 그분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폐렴에 가까운 증상에 빠져,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괴로움을 겪었을 때, 몇 번이고 찾아와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방문 간호사님. 그리고 내 작품을 인연으로 몇 년 이상을 꾸준히 연락을 해주시는 안민수라는 분도 있다. 한 번은 그분에게 어렸을 적 존경한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에서 일지매가 멋지게 산줄기를 타고 넘는 장면을 보며, 나도 그 산 능선을 따라 오르고 싶었다는 말을 메일로 전한 적이 있다. 그 후 취미가 등산이었던 이분이 자신의 산행 기록들을 내게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 산속을 훑어보는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나는 결국 혼자가 아니었고,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 이어지고, 그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장애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왜 그 사실을 감추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장애가 있는 나도 장애가 없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 나름의 역할을 품어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장애로 인해 내 자신이 고통을 받았으면 받았지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으니 좀 더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 더 솔직해지고, 나를 옥죄던 어리석었던 생각들과 내 삶을 속박하는 틀에서 자유로워지기로. 그런 마음으로 그린 것이 <나>라는 작품이다.

온전한 자의라고도, 철저히 타의라고도 할 수 없는 내 삶의 여건은 본의 아니게 면벽 수련이나 다름없는 인생을 내게 내밀어주었다. 내 인생 기록에는 서서히 고조되는 갈등도, 커다란 클라이맥스도, 드라마틱한 결말도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지현곤(52)씨는 1991년 <주간만화>에 카툰으로 데뷔했다. 그 후 문화체육부장관상 수상, 대전국제만화영상전 대상, 국제서울만화전 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8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의 초청으로 단독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그림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기에 믿기 어려운 경지”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후 그의 작품은 교과서에도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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