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며칠 전, 발송자를 알 수 없는 참외 한 상자가 어머니 집으로 부쳐 왔습니다. 단내가 코끝에 느껴지는 노란 참외였습니다. 엄마는 노란 참외를 보다가 당신 가슴속에 있던 70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딸만 둘 낳았습니다. 그것이 멍에가 되어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였습니다. 아들 보자고 딴살림 차린 아버지한테 말대답한다고 발길에 차이고,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 꾸역꾸역 밥 먹는다고, 할머니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낯선 여인이 갓난아기를 업고 왔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화낼 줄도 모르고 소리 내어 울 줄도 몰랐습니다. 얼마 안 있어 작은어머니는 남동생을 한 명 더 낳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저 개미처럼 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해, 학교 갔다 돌아오니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언니와 나는 날마다 울었습니다. 낮에는 엄마 냄새가 나는 무명 치마와 흰 저고리에 부비며 울고, 밤에는 이불을 둘러쓰고 흑흑 울었습니다.

세월이 가면 모든 일이 잊혀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떨어진 지 두 해가 되던 어느 여름 날, 언니와 나는 초록이 넘실거리는 들판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들길에서 아버지 친구분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인사를 하자,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애기들아, 어디 가냐?” “우리 어무니 찾으러 가요.”

비록 열한 살 어린 나이지만 당찬 언니 덕에 집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아버지에게 쫓겨나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산마을에서 내려와, 긴 들길이 끝나는 방죽에 이르자 섬진강이 보였습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강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탔습니다. 뱃전에 앉아 손을 내밀었습니다. 맑은 강물이 엄마처럼 부드럽게 내 손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나루터에 내려 신작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한여름 땡볕에 숨이 막혔지만, 언니와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모가 산다는 동네를 물어물어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걷다가 어느 동네 장마당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장날이 아니라 행인이 뜸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길가에 소쿠리를 놓고 앉아 있는 사람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아!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우리는 “어무니! 어무니!” 하면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모녀가 불쌍해서 어머니를 그렇게 만나게 해준 모양입니다.

어머니 앞에 놓여 있는 소쿠리에는 노란 참외와 겉보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참외를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팔아 곡식을 샀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이모 집 살림을 도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가에 선 채 부둥켜안고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하지만 날이 저물기 전에 우리는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어머니는 이모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엄마가 노란 참외 일곱 개와 돈을 주었습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꾸만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우리는 또 헤어졌습니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그때 아홉 살이던 나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여름날 참외를 보면 우리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노란 참외는 사무치게 보고 싶은 우리 엄마 얼굴입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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