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해줄 수 없는 선물일지라도 그 마음만은 잊지 말고 전해보면 어떨까요.

한밤의 라디오에 나를 위한 노래가 나왔을 때

나운영
42세. 주부. 일본 치바현 거주

주는 이와 받는 이의 당시 마음을 되짚어 볼 수 있다면 선물은 그 좋은 징표이자 증거일 것이다. 사십 평생 살아오면서 주는 이의 입장에 서서 건넨 선물이 받는 이의 입장에서 받아든 선물보다 많았더라는 사실을 새삼 추억해 보니 처음엔 손해 보고 살았나 싶었다가,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잘한 것 같아 입가에 잠깐 미소가 번진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물 중 하나는 한밤에 듣던 라디오방송에 사연을 보낸 일이다. 고3 시절 특이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다들 공부하는데 그 친구는 맨날 음악을 들으며, 좋은 곡은 녹음해서 들려주기도 하고 빌보드 차트 순위 같은 것을 가르쳐주는 아이였다.

하루는 그 친구와 함께 평소 즐겨 듣던 라디오방송을 그날 밤 꼭 들으라고 당부를 했다. ‘친구 나운영 님을 위해 들려드립니다’ 알고 보니 나를 위해 노래 사연을 보낸 거였다.

그렇게 나를 위한 팝송을 듣던 날, 처음으로 웃으면서 잠들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라디오에 내 이름 석 자를 나오게 했던 그 추억의 선물이 너무도 큰 감동과 행복함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 나도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 한 친구를 위해 사연과 음악을 신청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디제이에게 뽑힐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해서 보낼 때의 설렘과 떨림이란.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방송 매체에 자신의 이름이 나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던 우리들! 지금은 보통 휴대전화의 뒷번호로 소개되는 사연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게 사연을 선물해 주었던 친구는 지금 소식이 끊겼고, 내가 사연을 선물했던 친구는 페이스북이며 카톡 덕분으로 가끔 소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연결 고리는 갖게 되었다. 그 친구 역시 아직도 그 선물을 두고두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은 세 아이라는 선물을 하나님께 받아 잘 키우고 있다. 국경은 넘더라도 나이는 밑으로 넘지 말자,라고 웃는 소리로 했던 슬로건이 그야말로 그대로 적중해 국경을 넘어 일본인 남편과 일본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내겐 매일같이 해외여행처럼 느껴지는 일본 생활. 한국에서 갈고 닦은 일본어 실력을 십분 활용하고 입에서 쉰내가 날 정도로 원 없이 일본어로 살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전공할 때만 해도 인생이 이렇게 진행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은 신의 선물의 연속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좀 심술도 부리고 투정도 부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힘든 고비를 넘고 또 넘고 보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게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사실 돌아보면 선물을 줄 때의 마음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주오~’가 많았던 거 같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하지만 신의 선물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에게 딱 맞는 것을 그냥 주고 계신다. 받은 선물을 어떻게 잘 쓸지는 자기의 몫이다.

하루하루라는 선물! 아이들이라는 선물, 남편이라는 선물, 일본이라는 선물! 그 종합 세트를 손에 들고 있는 이는 바로 나임을 늘 각성하며 오늘 하루도 파이팅을 외쳐본다.

정일 작.
<푸른 여행>
24.5×34cm.
Oil on canvas. 2014.

사장님께 받은 장미꽃 쉰여덟 송이

박만춘
57세. 주부. 충남 보령시 지장골길

딩동~, 누구세요? 네, 꽃 배달입니다. 순간 스쳐가는 생각. 꽃을 배달해 줄 사람이 우리 집에는 없다. 아이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리지아 작은 꽃다발을 선물한 것이 전부이다. 그래도 이야기나 들어보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와, 붉은 장미 쉰여덟 송이가 예쁘게 장식된 꽃바구니다! 카드도 있었다.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 보내신 분은 놀랍게도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이었다. 세상에, 하늘같이 높은 사장님께서 직원들의 결혼기념일을 챙겨주시다니. 고맙기도 하고 남편 직장에 대한 자부심에 기뻐서 두둥실 떠오르는 풍선이 되었다.

남들은 고가의 명품 가방과 옷 신발 등을 사들이며 자랑으로 여기지만 우리 같은 서민은 명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뿐더러 생일이면 쇠고기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여 먹으며 가족 간에 감사의 정을 나누는 것이 전부이다. 꽃은 마음의 꽃으로 대신한다. 생일 맞은 주인공을 가족들이 차례대로 안아주며 생일 축하와 함께 건강한 덕담을 나눈다.

퇴근하는 딸이 거실을 환하게 밝혀주는 장미꽃 다발을 보며 “아주 탐스럽고 멋진 꽃다발이네요. 엄마가 사셨을 리는 없고 누가 사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카드를 보더니 “퇴직을 앞둔 아빠를 위로하는 꽃다발인가 봐요?” 하고 묻는다.

그렇구나! 3월 17일 결혼기념일도 축하할 겸 퇴직 기념 꽃다발이구나. 남편은 3월 27일 38년간 다니던 발전소 엔지니어 일을 마감하게 된다. 58세가 되어 정년퇴직을 하게 된 것이다. 늘 그 모습 그대로고 마음만은 이팔청춘이건만 이제 회사 일은 그만하라니 섭섭하다. 그렇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어서 한 자리라도 내어주는 것이 원활한 순환을 위하는 것이리라!

여보,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교대 근무 하면서 때로 잠도 설치고 밤에 일 나가야 할 때는 안쓰러운 적도 많았어요. 혹시나 위험한 일이 있을까 마음 졸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늘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일한 당신이 존경스럽습니다. 38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당신 좋아하는 산도 실컷 다니며 좀 쉬세요. 앞으로 더 재밌게 살아봐요.

발전소 사장님 감사드립니다. 빠알간 빛의 장미 향기처럼 남에게 도움을 주고 기쁨을 선물하는 멋있는 가족으로 행복하게 지낼게요. 남편의 평생직장이었던 발전소 또한 사고 없이 더 좋은 직장이 되길 바랍니다.

정일 작.
<story garden>
62×93cm.
Oil on canvas. 2005.

한결같이 선물을 주던, 선물 자체였던 그 아이들

이지은
26세. 부산시 영도구 청학로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 또는 준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다.

선물 하면, 내게 2년간이나 선물을 주었던 그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엔 꽃을, 언제쯤은 편지를, 또 다른 날엔 그림을, 또 갑자기 인형을…. 어쩌면 한결같이 변함없이 선물을 주던지. 그 덕분에 언제나 마음은 봄처럼 설렘 가득했다.

내 나이 24살, 처음으로 어린이집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늘 주눅 들고 살아서, 나는 그렇게 안 하리라 다짐하며 유아교육과를 갔다.

아이들을 정말 긍정적으로 밝게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매일매일 밝게 웃으며 “사랑해” “좋아해”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준 것의 몇 배 이상을 돌려주었다. 이틀 주말을 지내고 오면 “보고 싶었어” “그리웠어” 드라마 대사같이 달달한 말들을 눈을 반짝거리며 해온다.

출근해 어린이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그 순간, 저만치서 토끼마냥 깡충깡충거리며 달려와 품에 쏘옥 안긴다. 그러면 또 다른 아이가 또 다른 아이가 대롱대롱 일곱 마리 아기 양들처럼 품속에 파고든다. 아이들과 따스한 포옹, 그것이 나에겐 선물이었다.

자연에서 키우자는 모토를 가진 곳이라, 매일 숲에 갔다. 봄에는 벚꽃 잎이 흩날리는 그 길을, 여름에는 수풀 우거진 그 길을, 겨울에는 싸리눈 내리는 그 길을 같이 걸었다. 아이들은 강아지마냥 뛰어가며 좋아한다. 표정이 어떻게 저렇게 밝을 수 있을까. 계절을 마음껏 느끼는 아이들이 나에겐 선물이었다.

한번은 한여름 숲속 나들이길. 한 아이가 내 허리를 톡톡거린다. 뒤돌아서 아이를 바라보았더니 무언가를 내민다. 숲길을 걸으며 이건 양지꽃, 이건 강아지풀, 저건 아카시아잎 하며 가르쳤던 내게, 그 꽃들을 하나씩 모아 손바닥만 한 꽃다발을 만들어 건넨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꽃다발을 받은 나는 행복한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은 내 생일이었다.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등원하면서 아침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어머님께서 “선생님, 생일이시죠?” 하는 말을 듣더니, 아이가 다시 밖으로 뛰어가 자기가 타고 온 차에서 무언가를 가져온다. 손때가 묻어 노랗게 빛나는 아기 곰 인형을 부끄러운지 발간 볼을 하고 내민다. 아이가 아끼며 놀던 그 곰 인형. 유독 짓궂게 굴었던 아이가 줬던 거라 더 감동적이었다. 이 인형에게 빨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빨아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인형은 아직도 내 침대맡을 지켜주고 있다.

길 가다 선생님 생각이 났다며 주운 예쁜 모양의 돌, 나뭇잎, 구슬, 아끼는 색종이. 심지어 비비탄 총알…. 아이들이 준 선물들은 무궁무진하다. 한 아이는 매일매일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차를 그려서 선물을 해주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불꽃이 센 자동차” “엔진이 무려 3개나 달린 자동차”라면서. “내가 어른이 되면 차 사줄게요. 스포츠카!” “집 사줄게요.” 아이들의 약속만 지켜지면 난 집도 차도 참 많은 사람일 것이다.

아이들은 뭐든지 주려고 한다. 아이들은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뒤끝도 없다. 때로 혼을 내도 돌아서면 다시 다가온다. 그래서 동심으로 돌아가라 하나 보다.

아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경청과 격려를 해왔던 수많은 시간들. 처음 만난 아이들과 있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선물이었다. 잊지 못할 그 선물 말이다.

정일 작.
<Story garden>
260×194cm
Oil on canvas. 2005.

생일 선물로 받은 수학 문제집

한나경
20세.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요즘 나의 하루는 늘 똑같다. 그래서 다행이다. 만약 지금 내가 흥미진진하고 매일 새로운 일상을 살고 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재수생, 아니 일명 죄수생이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기상. 잠에 취해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며 가는 버스 안. 학원. 아침 특강. 수업. 밥. 수업. 밥. 자습. 조금은 답답하지만 이런 생활이 내게 바람직하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3월 3일, 그날만큼은 조금 울적했다. 바로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수생에게 생일은 무슨 생일, 의미 없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축하받기는커녕 말 걸기도 미안한 상황이라니. 사실은 많이 외로웠다. 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살고 있는데, 평소랑은 조금 다른 일이 일어났다.

이제 대학생인 친구가 나의 재수 학원 쉬는 시간에 맞춰 찾아온 것이다. 손에는 간식과 문제집을 가득 들고서 말이다. 유난히 수학에 약한 나를 위해 자신이 전에 보던 수학 기본서들뿐만 아니라 서점에 들러 또 몇 권의 수학 문제집들을 더 사온 것이다.

“생일 선물로 문제집 주는 거는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다른 거 살까 했거든? 근데 이게 지금 니한테 제일 필요한 거 아이가.”

마음속으로는 감동 먹어서 눈물 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진짜 많다며, 이걸 언제 다 풀겠냐며 괜히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실 수학울렁증이 있는 나에게는 약간(?) 많은 양이기는 했다. 내가 샀더라면 어쩌면 또 작년처럼 풀다가 지쳐 ‘수학은 내 인생의 걸림돌이야!’ 하고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책을 덮고 싶어도 친구의 얼굴이 떠오를 테니 말이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지만 우리가 얼굴을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15분이었다. 15분을 위해 버스로 왕복 1시간이 넘는 이곳까지 와 준 친구. 그 친구가 내게 선물한 것은 문제집이나 수학 점수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얻은 건 믿음, 가장 못생기고 초라한 지금의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 친구가 다녀간 후에도 몇몇 친구들이 학원으로, 집으로 찾아와 선물과 응원을 안겨주고 갔다. 또한 내 휴대폰은 진심이 가득 담긴 축하 문자와 전화들로 가득 찼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대학을 가서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러한 축하와 선물들이 지금만큼 고마웠을까? 내가 이렇게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까? 고작 스무 해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 삶을 돌이켜보니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매일 집에 가면 “오늘도 고생 많았지. 우리 딸~” 하며 꼬옥 안아주는 부모님, 서로 밥 사주겠다며 아옹다옹하는 친구들, 너라면 꼭 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며 말해주셨던 친척들, 언니가 짱이라는 사촌 동생들과 후배들, 그 외에도 나를 믿어주시는 분들,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인생의 선물이다. 그들을 생각하니 나는 더 이상 혼자 밥을 먹어도, 혼자 공부하고, 혼자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어도 외롭지가 않다. 열~심히 해서 1년 뒤에는 그들에게 받았던 응원, 격려, 사랑을 다시 되돌려줘야겠다.

정일 작.
<그리움>
45×54cm
Oil on canvas. 2012.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