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있게 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평범한 대한민국 고3이 되기까지

한나경 고등학교 3학년.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나는 이제 수능을 바라보는 고3이 되었다. 때론 동정심, 때론 존경심으로 바라보던, 평생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고3이 내게도 다가온 것이다. 10대의 끄트머리에서 나의 공부 인생을 돌이켜보니 참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겹기도 했고 잠깐 놓다가 부여잡기도 했고 후딱 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코앞에 다가오니 불안해 미치겠고 시간이 딱 1년만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처음 고등학교에 올라왔을 땐 정말 혼란스러웠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는 멘붕. 내가 생각해왔던 성적과 성적표에 적힌 수준이 너무 달랐다. 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는 ‘이건 내 점수가 아니에요!’라고 외칠 뻔했다. 이렇게 성적도 떨어져 가는데 난 꿈마저 흔들려 버렸다.

분명히 자기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꿈꿔야 한다고 배웠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오니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좀 보랬다. 안정적인 게 최고라고, 공무원만 되면 된다고.

드라마 작가를 꿈꾸고 있는 나를 정신 못 차린 철부지로 취급해 버렸다. 중학생 때와는 너무 다른 성적이 나오고 꿈도 의심하게 되자 의욕이 사라져 나태해졌다. 잠 오면 자고 하기 싫으면 ‘야자(야간자율학습)’도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엄마가 한마디 하려고 하면 알아서 한다고 빽 소리쳐버렸다. 그러다 한 날은 또 알아서 한다는 나에게 엄마가 모진 말을 던졌다. 그 말에 너무 자존심이 상한 나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렸다.

“엄마도 나한테 그런 말 할 만큼 공부 잘한 거 아니잖아요.”

말해놓고 아차 싶었는데 다시 주워 담기도 전에 엄마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

“그래, 엄마도 공부 놓쳤었다. 근데 그래서 말하는 거다. 엄마는… 정말로 네가 엄마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가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두 분은 내게 충분히 잔소리하고 간섭할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해주시는 분들이니까. 그걸 알면서, 누구보다 잘 알면서…. 엄마랑 내가 아빠 옷 좀 사라며 옷집에 가면 아빤 항상 엄마와 나의 추천을 모두 거절했다. 결국 아빠가 예쁘다며 사자고 한 옷은 늘 세일코너에 있던 옷. 또 평소에는 돈 몇 천 원이라도 아끼려고 항상 머릿속에 계산기가 존재하던 엄마도 나 공부할 때 필요한 거라 말만 하면 문제집이든 인터넷 강의든 가격도 안 보고 구입해 주시고 더 해줄 것이 없냐고 꼭 물어보시는 분들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런 배려가 본의 아니게(?) 내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다. 이것은 ‘웃픈(웃기지만 슬픈)’ 추억이다.

김현아 작.

<소풍> 10×10cm

Mixed media / 2010

< With tea> 34.8×27.3cm

Mixed media / 2009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였다. 영어, 국어 시험을 쳤던 날 난 펑펑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한 과목에서 찍은 것보다 못한 점수가 나온 것이다. 밥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우는 나를 보며 아빠는 조심스레 위로를 해주셨다.

“나경아, 국어를 망쳤는지 영어를 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나경이 믿는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 아이가. 솔직히 수학은 한 번 떨어지면 복구가 힘들지만. 에이, 수학만 아니면 된다. 괜찮다니까. 수학도 아닌데 뭐. 그만 울어도 된다.”

내 울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던 이유를 아빠는 그땐 몰랐다. 내가 망쳐버렸던 과목은… 영어도 국어도 아니었다. 뒤늦게 매긴 수학이었다. 아빠가 복구가 힘들다던 수학.

하지만 세상에 불가능은 없는 법! 겨울 방학 내내 수학만 파고든 결과 2학년 첫 시험에서 94.8점으로 우리 반 일등이라는 쾌거를 얻어냈다. 물론 운도 좋았지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그날 밤 우리 가족 모두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이럴 땐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지 싶다. 그러다가도 때론 공부가 다가 아니라며 괜히 세상 탓을 해보기도 한다.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이시다.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라도 보는 날엔 “그래. 공부가 뭐가 중요하노. 이렇게 따뜻한 집이 있고 가족이 있다는 게 행복이지. 나경아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다가도 성적표가 나오는 날엔 “니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오는 거가? 이래서 뭐 될래!!!!!!”라고 하신다. 부모님도 나도 참 변덕쟁이다.

우여곡절 끝에 난 아직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고 꿈도 다시 확고해졌다. 만약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게 철부지라면 나는 평생 철부지로 살기로 했다. 길고도 험한 길이었지만 안 믿는 척하면서도 늘 맹목적으로 믿어주시는 부모님이 있기에 난 평범한 대한민국 고3이 될 수 있었다. 그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밤하늘의 은은한 별빛처럼 그렇게

조정훈 42세. 직장인. 광주시 북구 두암동

4년 전 어느 날,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그야말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바로 ‘이혼’이라는 사건이었다. 나의 불찰로 인해 행복했던 가정에 상처를 주고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들은 정말 참기 힘든 나날이었다. 아무리 날씨가 맑아도 정작 내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낀 것 같았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모두가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나만 홀로 부표에 매달려 표류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괴로움….

다른 것은 그래도 참아낼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1년여의 유배 생활의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행히 1년이 지나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지만 이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충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딸아이는 불안 증세를 보여 12시가 다 되어서야 어린이집에 가서 4시만 되면 찾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러기를 6개월. 당연히 직장 생활은 거의 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카드 명세서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이의 정서적인 안정이 우선이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이 전달이라도 된 것일까? 이혼의 이유가 아빠 탓이라는 고백에 5살 딸은 되레 큰소리를 쳤다.

“지난번에 잘못했다고 말했잖아. 잘하면 되지. 이제 그런 소리 그만해.”

공기 좋은 산자락에 있던 30평대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공장 소음이 가득한 동네에 있는 13평의 작은 원룸으로 옮겨온 후 전쟁터 같은 생활이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원빈이가 잠자리에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한 날이 있다.

“이빈아, 지금 이런 원룸에 사는 것도 다 추억이 된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정말 좋은 기억이 될 거야. 물론 예전 아파트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셋이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사는 것도 오빠는 재미있다. 아무나 해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니거든….”

가슴이 뭉클했다. 아빠에게 싫은 감정을 쏘아대던 아들이 어느새 커서 나를 위로하고 동생을 다독여주는 것이 아닌가? 막상 학교를 다녀보니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았고, 처음엔 자기도 힘들었지만 잘 극복했으며 지금은 애들을 상담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절대 자신의 상황을 누구에게 말하는 것조차 내게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그리고 얼마 전, 우리 가족은 비록 월세지만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점점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좋아했고, 순간순간 기쁘고 즐거운 일들을 감사하며 경험하고 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아빠를 챙기는 것부터,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더 깊어만 간다. 아빠가 커피를 많이 마시면 건강을 챙겨야 한다며 조금만 마시라며 사랑스러운 잔소리를 하는가 하면, 빨래와 설거지를 할 때면 도와주겠다며 의자를 들고 옆에 자리를 잡곤 했다. 어느 날 차에서 잠든 딸을 깨워 집으로 업고 올라가려고 했더니 끝까지 업히지 않겠다는 딸. 그러면서 “아빠. 힘들까 봐 그러지. 우리 아빠가 얼마나 고생이 많은데…”라면서 어깨를 토닥이면서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안마를 해준다. 천사를 업고 가는 경험이란 이런 것일까. 아빠 때문에 흔들린 행복의 울타리를 도리어 천사 같은 아이들이 다시 묶고 조이며 단단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정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넘쳐서….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아이들 덕분에 흘리는 감사의 눈물은 내게는 소중한 보석이 되어서 마음에 새겨지고 있다.

김현아 작.

<당신을 위한 기도> 27.3×22cm

Mixed media / 2013

며칠 전, 아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망할 줄 알았어요. 빚도 많고 상식적으로 이미 쓰러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이겨내고 우리를 키워주시는지 놀랍기만 해요. 정말 존경합니다.”

많은 월급을 받았을 때는 적은 월급을 받는 사람들을 조금은 무시했고, 내 가정이 화목할 때는 불우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솔직하게 말하면 약간 차별을 두고 살았고, 부끄러운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남의 잘못에 조금은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기도 했었다.

아마 계속 그렇게 살았더라면, 나는 지금 아이들과 친구처럼 삶을 나누는 이런 축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우월 의식 속에 살아가는 껍데기만 번듯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빠의 부족한 점들을 아이들에게 용납받고 따뜻한 격려를 받으면서 나는 비로소 남들의 연약한 부분을 이해하는 심장의 온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삭막한 겨울을 살아가는 우리 어른의 품에 온기를 전달하는 신비한 난로요, 어두운 길을 헤매며 가는 부모의 길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램프의 요정이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작년 여름 우리 세 가족은 보름 동안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중국 동쪽의 5개 도시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행 이후로 우리 가족은 스스로를 ‘별빛가족’이라고 부른다. 고요한 밤하늘에 은은하게 빛을 내는 별빛처럼 그렇게 행복의 빛을 내며 알콩달콩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추락하는 별똥별이었던 내가 다시 힘을 얻고 저 하늘의 영롱한 빛을 내는 별이 되어가고 있다. 떨어지는 운석이 빛나는 별이 되어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분명 천사 같은 우리 아이들 덕분이다. 바로 내 존재의 이유!

절망의 끝에서 만난 따듯한 사람들

윤정희 45세. ‘아름다운 피부관리실’ 운영.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6년 전 나는 한 톨의 희망도 없어 보였던 막장 주인공. 파산한 남편은 도망자로, 두 아들과 나는 이삿짐을 싸놓고 갈 곳을 찾아야 했다. 암담했다. 몇 개월간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 집을 전전하다, 지인의 도움으로 보증금 500만 원의 월세방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갈 곳이 없다가 생긴 집이라 그런지 천장에 비가 풍선처럼 고여도, 그래도 좋았다.

“너는 끝이다, 이제 어디서도 도움받을 수 없고, 더 이상 올라갈 수도 없을 거야”라는 모진 소리까지 들었던 그 시절. 혼자 힘으로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던 그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그 절망의 끝에서 내가 느낀 건 주변의 따듯함이었다.

세상이 냉정하다고 하지만, “내가 이런 상황이니까 도와주세요” 절박하게 이야기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한부모가정으로 채택되어 국가의 도움을 받게 해준 분들. 남편 대신 제2의 채무자가 되어 들어왔던 정말 막막했던 통장 압류 사건도 국세청 분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2009년 나에게 찾아왔던 인생의 터닝 포인트. 바로 아름다운재단에서 지원하는 ‘저소득 여성 가장을 위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이다. ‘희망가게’라고 이름 붙인 이 사업에서는, 최대 4,000만 원의 창업자금을 무보증, 무담보로 대출해주었다. 대출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체계적인 교육과 상담도 제공해주어서, 안정적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나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고, 과감히 지원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채택이 되어 그해 가을, 피부관리실을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창업을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막상 열고 나니 한숨만 나왔다. 어떡해야 손님이 우리 가게를 찾을까? 처음 해보는 사업이었기에 두려움도 많았다.

고민을 하며 이제부터 나와의 싸움이 아니라 세상과의 싸움임을 인지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줄까? 고민했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살 때 아무래도 가장 행복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좋은 품질의 서비스를 저렴하게 받을 수 있게 해드렸다. 점점 입소문을 타며 고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여가 흐르며 가게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사업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김현아 작.

<도시의 낭만 1> 65.1×53cm

Mixed media / 2012

그동안 위기도 많았다. 가장 큰 것은 최근에 6년 전의 어떤 문제로 다시 통장 압류가 들어온 것이다. 비싼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들 친구의 부모님이 변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선뜻 찾아가지는 못하고, ‘네 부모님께 상담을 받아야 하는데’라고 말만 던졌는데 변호사님이 직접 먼저 나를 찾아주셨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보자 하셨다. 그냥 형식적인 말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상담을 받고 돌아가시는 길에 그분께서 다시 전화를 해주셨다. “?? 어머니, 포기하지 마세요.” 그 한마디가 정말 하나님의 음성 같았다. 눈물이 저절로 났다. 나를 다시 일으켜주는 한마디였다. 이렇게 세상에는 따듯한 사람들이 많았다.

앞으로 나는 우리 가게를 사회적기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업장으로 만들고 싶다. 나의 인생은 쉽지 않은 여자의 길을 가고 있지만 내가 겪은 일들을 통해 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싶다. 어렵고 힘든 일을 겪는 분들을 만나면 나의 일처럼 마음이 아프다.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같이 들어주고 알아봐 주고 눈을 맞춰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그분들에게 꼭 드리는 말씀이 “좌절만 하고 있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지만, 내가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하려고만 하면 반드시 도와줄 분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희망은 절망의 끝에 있다. 예전에는 무책임한 남편이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남편이 오히려 고맙다. 남편의 파산 이후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도전이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내가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극적이던 성격도 너무나 적극적으로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두 아들과 나는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 남편의 그늘에 있었다면 내 안의 잠재돼 있던 또 다른 나 역시 계속 잠자고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재단, 국세청 분들, 자존감을 회복하게 도와준 학교 선생님들과 교회 분들, 진실을 위해 내 편이 되어주셨던 변호사님과 직원분들, 그리고 순간순간 나타나 나를 도와주신 나의 천사들, 어려운 시기에 사춘기를 보내며 힘들었을 텐데도 참 착하게 잘 커준 두  아들…. 끝없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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