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밀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여섯 가지 비밀 이야기.

 

그 겨울, 대학 입학 원서비 유용 사건

유연철 33세. 직장인.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1998년. 혹독하게 힘들었고 너무나도 길었던 고등학교 3년이 끝난 후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또래에게는 수능을 보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동안의 억압된 청춘의 로망, 이성 교제를 하는 것이 유행이자 희망이었다.

나 역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수능 점수 발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저녁, 친구에게서 소개팅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게 됐다!

동네 근처-떡볶이 집, 빵집은 말도 안 되고ㅋㅋ-호프집에서 당당히 만났다. 2:2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는 평범했지만 맘에 들었고 계속 만나는 관계로 급속도로 진행이 되었다. 그동안 못 해본 연애의 한풀이를 하듯 매일 만나 놀러 다녔다.

하지만 돈이 어디 있었겠는가! 당시는 IMF까지 터진 마당이라 집안에도 돈줄이라고는 말라붙은 상황이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궁색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아르바이트 월급날은 아직 멀었고. 그런 나를 강하게 유혹한 건 대학 입학 원서 비용이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 원서를 낸다며 돈을 받아, 한 건 한 건 유용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가정통신문을 위조하던 실력으로 원서 접수증을 훌륭하게 만들어 집에 보여드린 것이 7~8건. 금액으로 보면 50만 원 정도 되는 큰 액수였다. 그 돈으로 데이트를 할 때 밥값을 내고, 마음껏 놀러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을 참 힘들게 보낸 나는, 노력해도 될 것 같지 않은 세상 앞에 ‘될 대로 되라지’였다. 대학은 가서 뭐하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런 허무주의로 가득 찬 나였기에 그런 거짓말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시 모집하는 대학들이 마감될 때쯤, 그래도 안전장치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의 모 전문대학에 입시 원서를 넣었다. 장학금이나 받아서 다니다, 나중에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이었다. 슬슬 원서 접수했다고 거짓말한 대학들의 합격자 발표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겐 일부는 떨어졌고 일부는 과가 마음에 안 든다며 거짓말을 했다. 점점 들키면 어떡하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 괴로운 건 떨어졌다고 하면 너무나 순진하게 믿으며 안타까워하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친구들이 하나씩 합격되어갈 때쯤 유일하게 넣었던 원서, 모 전문대의 발표 날이 다가왔다. 충격! 100점이나 하향 지원을 했는데, 전체 장학생은커녕 과 장학생도 못 되었다. 당시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하향 지원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후회가 몰려왔다. 어려운 형편에도 그 비싼 원서 비용을 마련해준 부모님과 누나에게 죄송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소개팅녀와는 100일을 앞두고 자연스럽게 헤어졌고, 그 달콤한 유혹의 대가는 내 마음의 빚과 비밀로 남게 되었다. 대학 생활도 재미있을 리 없었다. 여전히 나는 세상을 향해 냉소적이었다.

그러다 대학 1학년 가을, 어머니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더욱 후회가 몰려왔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 이제 제대로 살아보자.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비밀 같은 건 만들지 말고 살자.

어느덧 10년이 훨씬 지났다. 한동안은 말할 용기가 안 나서 못 했고 시간이 지난 후엔 잊혀져간 사건이 되어버려서 못 하고, 지금까지 비밀로 묻혀 있던 그 일.

아버지, 누나! 죄송해요. 철없는 막내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용서를 비네요. 어쩌면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도 들었어요. 늘 묵묵히 봐주시고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몬드리안 작. <큰 빨강 색면과 노랑, 검정, 회색, 파랑의 구성> 캔버스에 유채. 59.5×59.5cm. 1921년. 헤이그시립미술관

 

제가 먹어도 살찌지 않는 이유, 그 비밀을 밝힙니다

유윤서 26세. 직장인.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나는 키 169cm에 몸무게 50~51kg의 늘씬 날씬한 26살 처자이다. 나에게는 가족에게도 말 못 하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4.4kg의 우량아로 소위 ‘떡대’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못 먹는 것 없이 잘 먹고 일주일에 3번 이상은 고기를 먹을 정도로 육식을 사랑하는 대식가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키 161cm에 50kg이 넘는 장신(?)이 되더니, 고등학교 때는 키 169cm에 몸무게 74kg의 거구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같은 학교 농구부 오빠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안 보던 거울을 보며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유행하는 다이어트는 다 해보며 끊임없는 살과의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먹던 습관과 생활 패턴을 바꾼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 힘들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운동까지 잘하던 그 오빠는, 나 같은 외모의 아이가 접근하기에는 너무 높아 보였다. 그렇게 고백도 못 한 채 졸업하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외모 콤플렉스가 깊이 자리 잡았다. 육지로 나와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인생의 숙제와도 같은 다이어트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굶는 것부터 줄넘기, 달리기, 테니스, 스쿼시, 수영, 킥복싱…. 운동이란 운동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좌절, 실패, 좌절, 실패…를 반복하던 중 점차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요가 자격증을 따서 강사 생활까지 하다 보니, 몸매는 균형이 잡혀갔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늘씬한 외모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그것으로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나만의 비밀을 고백하고 싶다.

항상 내 안에는 다시 살이 찌면 어떡하지, 예전으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이 깊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안함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때문에 자유롭게 먹는 것 같아도, 먹은 만큼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있다. 누가 조금이라도 살이 찐 것 같다고 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아무도 몰래 당장 운동을 한다.

2년 전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와서도, 나는 가족들 몰래 운동을 하고 있다. 하루에 많게는 네 시간, 적게는 두 시간씩, 가족들이 일어나지 않은 새벽과 가족이 모두 잠든 깊은 밤 시간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나의 이런 피나는 노력을 모르는 지인들은 “체질이 변했네” “먹는 만큼 살이 안 쪄서 부럽네” 등등 나를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복 받은 사람으로 분류하여 버렸다.

하지만 나는 먹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다. 그럴수록 나에게 아침 운동과 밤 운동은 쉴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을 오픈하고 싶지만 열심히 운동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매일매일 아무도 모르게 나 자신과 싸움을 한다.

“운동을 그렇게 했는데 그것밖에 안 빠졌어?” “운동을 하는데도 살이 찌네” 라는 소리를 듣는 게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정말 가벼워지고 싶어, 용기를 내어 <마음수련>에 처음으로 고백을 해본다. 이 글이 실린다면, 괜히 말했나? 하는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정말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졸리면 자고, 운동하기 싫을 때는 좀 안 하기도 하고, 살에 대해서 그냥 편하게 말하면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다른 것들에도 집중하며 살고 싶다.

 

몬드리안 작. <백합> 종이에 수채. 25×19.5cm. 헤이그시립미술관

 

다시는 비밀 같은 거 만들 일 없기를

팔천사 50세. ‘팔천사’ 블로그(blog.naver.com/a508004) 운영

지난 6월의 일이다. 운전 중 옛날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의 딸이 주유소에 일하고 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어라, 이 시간이면 학교에 있어야 하는데 왜 저 아이가 주유소에 있지? 이제 고등학교 2, 3학년 정도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 직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란다.

주변에 수소문해 보니, 그 직원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 매일 술이나 마시고 폐인이 되었다 한다. 참 성실했던 친구인데 자기 사업하면서, 부도도 맞고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겨우 집 전화를 알아내 부인과 통화를 했다.

부인에게 큰딸아이는 학교에 잘 다니냐고 안부처럼 물었다. 부인은 은정이가 가출한 지 5개월이나 되었다며 울었다. 아빠는 매일 술이나 마시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학교생활도 할 수 없어서 자퇴를 하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가슴이 시려왔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은정이 밑으로 둘이나 더 있는 아이들과 겨우 생활하는 듯했다.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 함께 주유소로 가서 은정이를 만나게 했다. 얼싸안고 우는 모녀를 보니, 나 역시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은정이가 동생과 아빠의 안부를 묻는다.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서 검정고시도 보고 대학도 들어가겠다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저렇게 맑고 착한 아이가 있다니,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하지만 아직 부모의 그늘에서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은정이를 한 시간 동안 설득해서 타협을 봤다. 일단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고, 은정이는 근처에 있는 이모네 집으로 가, 이모 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원에도 다니기로 약속을 했다. 내 덕분에 아이를 찾았다고 감사해하는 부인에게 은정이 아빠는 기술이 있어, 마음만 잡는다면 살아갈 능력이 되니까 둘이서 다시 좋은 아빠로 만들어 보자고 했다.

우리 셋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나는 은정 아빠와 통화를 했다. “일 좀 해볼래?” 하니 바로 대답을 한다. “안 그래도 형님 한번 만나서 의논 좀 할라고 했습니다.” “내가 자네 소문은 들었어. 일단 일주일 동안 금주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지방 건축 현장에 기사로 보내줄게.”

나의 약속에 은정 아빠는 지금 너무 힘들게 살고 있다면서 꼭 금주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몇 번씩 이야기를 했다. 큰아이가 자기 때문에 가출까지 했다며 울었다. 그것이 더 괴로워서 계속 술로 살았다고 했다. 나는 마음잡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아이도 함께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일주일 후에 만나기로 했다. 부디 일주일만이라도 버텨주기를 바라며.

일주일 후, 그는 정말 술을 먹지 않고 나타났다. 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모로서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라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지방에 일자리를 마련해 보내주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보았다. 다행히 그는 술을 뚝 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은정이와 은정이 엄마와의 비밀을 털어놓았고, 지금은 은정이와 가족 모두가 그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오순도순 예전처럼 살고 있다.

“형님 고맙습니다.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가정을 다시 꾸릴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나에게 그 친구가 나직이 속삭인다. 괜시리 눈물이 핑 돌며 돌아서는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은정아, 은정이 어머니, 다시는 우리끼리 비밀 같은 거 만들 일 없게 행복하게 사세요.’

 

몬드리안 작. <그리드 5의 구성: 색채 마름모 구성> 캔버스에 유채. 대각선 84.5cm. 1919년.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국립박물관

몬드리안 작. <그리드 3의 구성: 마름모 구성> 캔버스에 유채. 대각선 121cm. 1918년. 헤이그시립미술관

그림 출처_ <피트 몬드리안>(수잔네 다이허 | 마로니에북스)

<몬드리안(재원 아트북 24)>(재원아트북 편집부 |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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