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결혼한 후배 화니에게

백일성

조금 전에 새색시와 포장마차에서 대합탕에 소주 한잔 한다며 전화했었지. 그렇게 한참 깨 볶을 신혼인 너한테 결혼 17년 차 인생 선배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하나 해줄게…. 그냥 며칠 전 있었던 내 하룻밤 사이의 평범한 일상이야. 언뜻 들으면 뭐가 슬퍼? 하겠지만, 너도 세월이 흐르고 잘 곱씹어 보면 너무 슬픈 이야기니까 들어둬.

우리 부부 며칠 전에 한바탕했어. 큰 싸움은 아니고 그냥 17년 차 부부들이 하는 그런 부부 싸움. 다음 날 아침이면 잊히는 싸움이 있고 며칠이 지나도록 쌓이는 싸움이 있는데 이번 부부 싸움은 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아내에게는 조금 심각하게 다가왔나 봐. 그래서 아내가 한 3일 꽁하니 입을 닫고 있었어. 슬픔의 시작이지.

그러다 금요일 밤에 멍하니 혼자 TV를 보고 있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방문을 빼꼼 열고 누워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어. “형우 엄마~~ 어디 바람 쐬러 갈까?” 이 말에 아내가 반응을 보이며 부스스 일어나더라고. “뭐 어디 갈 데는 있어?” 3일 만에 아내가 입을 열었어. 참 슬픈 일이지.


이렇게 먼저 다가와 줄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을 아내의 마음을 알기에 내가 평소보다 조금 오버를 하고 말았어. “강릉 가서 물회나 한 그릇씩 먹고 올까?” 우리 집 안양인 거 알지? 그리고 시간이 새벽 한 시였거든. 난 당연히 아내가 거기까지 언제 가냐고 가까운 연안 부두나 서해안으로 가자고 할 줄 알았어. 근데, “그럴까? 오랜만에 동해 바람 좀 쐬고. 진짜 물회 먹고 싶다.” 일이 커진 거지 참, 슬픈 일이야.

주차장에서 강릉 주문진항을 찍었더니 소요 시간이 3시간 가까이 나오더구나. 아내는 토요일 쉬지만 난 출근하거든. 참 슬픈 일이지.

그리고 출발한 지 15분 만에 아내는 잠들었어. 난 나머지 2시간 훨씬 넘게 내비 아가씨랑 이야기 나눴어. 오랜 시간 말을 나눴더니 강릉 도착해서는 내비 아가씨한테 말 놓으라고 하고 싶더라고. 참 슬픈 일이지.

주문진항에서 딱 한 군데 그 시간에 문 연 횟집을 찾아서 아내가 좋아하는 물회 한 그릇씩을 하고 서둘러서 올라왔어. 나 출근해야 되니까. 우리 나이에 새벽에 갑작스러운 동해 바다 보러 가기가 생각보다 로맨틱하지는 않더구나. 이런 것도 너무 슬픈 일이야.

그런데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얘기를 들었어. 조금 열린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아내가 얘기하더라. “자기야, 우리 이런 바닷가에서 살까? 자기는………… 배 타고.” 나더러 배 타래. 나이 마흔셋에 배를 타래. 나 결혼 생활 17년 동안 직장은 두어 차례 옮겼고 그냥 박봉에 월급쟁이지만 그래도 일주일 이상 놀아본 적 없어. 근데… 결국 배를 타라네…… 참 슬픈 일이지.

화니야~ 너도 지금 제수씨와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와 대합탕에 소주 한잔 하고 있지만, 언젠가 너도 꼼장어랑 대합 직접 잡아 오라며 배 타라고 할지 몰라.

새신랑 화니야~ 가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으면 슬픈 영화나 책이나 인간극장 같은 거 보지 말고, 주위에 결혼 생활 10년 넘게 한 직장 상사 한 분 잡고 소주 한잔 하자 그래 봐. 그리고 한마디 물어봐. “행복하시죠?” 그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얘기 들을 수 있을 거야.


마지막으로 화니야~~ 신혼인 너한테 이런 슬픈 얘기해서 미안하니까 선배가 한 가지 알려줄게. 너도 몇 년 후에 나같이 이런 사소한 일에도 슬픔을 느낄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 아내의 눈을 찬찬히 한번 봐! 아내도 참 슬픈 눈을 가지고 있단다. 자신이 슬픔을 느낄 때 배우자는 더 큰 슬픔을 품고 산다는 거 잊지 말고, 먼 훗날 결혼 생활에 슬픔이 다가올 때 거울 안의 너를 보지 말고 아내의 젖은 눈동자에 비춰진 너를 보렴.

참! 그리고 형 며칠 연락 안 되면…… 배 타러 간 줄 알아라~.

올해 마흔세 살의 백일성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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