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도전해 본다면….

 

‘난 약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마음부터 무조건 버려보겠습니다

정진미 33세. 인천시 계양구 작전동

정신없이 살다 보니, 2012년도 이제 바로 코앞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2012년 1월 주제, ‘무조건 무조건’ 꼭 지키고 싶은 것을 편지글로 써봅니다. 이렇게 다짐이라도 하면, 약한 제 자신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저는 남편 없이 세 살 된 딸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입니다. 결혼 전 사무직 일을 하며,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사는 그런 여성이었던 저는 결혼해서 아이 키우며 그렇게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 후 생각지도 못했던 고비가 찾아왔어요. 시댁의 무리한 요구, 작은 스트레스조차 견디지 못하는 남편, 그런 여러 일들이 맞물리며 아이가 돌도 되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맞춰서 살려고 했던 저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요.

그때부터 아이를 키우며 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우선 학원에서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워, 올해 4월, 언니와 함께 가게를 차렸어요. 한부모 가정이어서 받을 수 있는 대출 등등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하여 차린 거지요. 숫기도 없고,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성격도 아닌 제게 주변에서 절대 장사는 못 할 거라고 했지만, 먹고살아야 하기에 힘을 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던 저는, 가게를 하며 몸살도 많이 났어요. 물을 많이 만지다 보니, 손가락에 물혹이 생겨서 수술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이렇게 약한지. 하지만 몸이 아파도 가게 문은 열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게 문을 엽니다. 청소를 하고, 웃으며 손님을 맞습니다. 물혹 수술 후 손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붕대를 풀고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인데, 아이한테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꾹 참습니다.

아프면 쉬고, 눈물 나면 그냥 울던 저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이제는 의지할 곳도 없고, 아이와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저의 몫이 되었으니, 그렇게 뒤늦게나마 철들게 만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신세를 생각하면 온갖 걱정이 올라올 때가 많습니다. ‘슬프다. 맘이 너무 아프다. 죽고 싶다. 그럼 아기는 어쩌지. 참자.’ 또 어떻게든 해보려 하지만, 늘 나의 하루는 ‘할 일이 많다. 나 혼자 어떻게 하지. 왜 나 혼자 해야 해! 몸만 건강했어도 견뎌냈을 텐데. 슬프다’로 결론이 날 때가 많았어요. 이런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내 문제가 뭘까 곰곰이 돌아보니, 늘 ‘몸이 약하다, 아프다’라는 생각이 문제였음을 알았습니다.

2012년에는 이런 마음을 무조건 버리고 싶습니다. ‘난 몸이 약해. 늘 아프고 기운이 없어.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마음. 항상 엄마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엄마가 해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는, 울 아기 태희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살 수가 없어요. 때로 힘들어서 아이를 밀쳐내고, 힘들고 아픈 몸이라 겨우 안아주는 게 아니라, 온전히 태희를 사랑하는 엄마의 맘과 몸으로 안아주고 싶습니다.

예전에 마음수련을 잠깐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마음을 버릴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는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결국 못 하고, <마음수련> 책이나마 보고 있네요. 책에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버리고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도 벗어나고 싶다 생각하며 울컥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제 자신을 극복해볼게요. 나중에 아이가 크면, 아이와 함께 마음수련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이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부터 받은 상처가 많을 것 같아서입니다. 무조건 하다 보면 할 수 있겠죠. 시작해 보겠습니다.

 

김점선 작 <닭> Oil on Canvas.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 무조건 사직서를 내다

송영대 행복경영연구원 원장, ‘배워서 남주기’ 웹진 발행인

무조건 저지르는 것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나의 인생이 바로 그러했다.

2010년 7월 31일, 나는 15년간의 직장 생활을 무조건 그만두었다. 전혀 준비된 것은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99%의 사람들이 반대했다. 그동안 쌓아온 IT 전문가로서의 경력, 그리고 대기업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게 아깝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희망을 전하는 스토리텔러 강사로서, 칼럼니스트로서, 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1인 기업가로서 활동을 한 지 16개월이 되었다.

이렇게 내 인생을 바꾸게 된 데에는 2009년 8월, 소설가 김홍신 선생님의 <인생사용설명서>라는 강연회를 듣게 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첫째,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것이다. 둘째, 남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셋째, 나를 위한 삶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살아라.”

김홍신 선생님의 그 말씀이 어쩐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았나? 어떻게 살았나?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았나?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잦은 다툼을 보며 자랐다. 부모님의 다툼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퇴근 후, 유흥가를 배회하며 술자리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술자리를 찾는 횟수가 늘어갔다. 회사, 술집, 또 다음 날이면 회사, 술집, 당구장, 그다음 날은 또 술, 술…. 낮에는 철저히 일을 했기에 경력이 쌓이면서 IT 분야의 엔지니어로서 인정도 받았지만 날이 갈수록 내면의 갈등은 커져갔다.

김홍신 선생님의 강연은 그런 내 삶에 큰 충격을 가한 것이다.

더 이상 술로 인생을 허비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대신, 내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점차 나의 동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술집 대신 강연장이나 서점을 찾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동선을 단순화하면서 내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고민하던 중,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매주 월요일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지인들이 한 주를 활기차게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의 좋은 문구, 유머, 내가 들은 강연의 내용을 담았다. 2009년 11월부터 시작해 한 주도 빠짐없이 하여 108회를 했다. 이제는 월요일이 기다려진다, 글을 읽으며 동기 부여가 된다고 응원해주는 분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이장우 박사님의 자기 계발을 위해서는 SNS(트위터, 페이스북 등)를 해야 한다는 말씀에, 트위터를 시작했다. 트위터 또한 내가 먼저 다가가고, 먼저 들어주고, 먼저 글을 인용하고 도와줄 때 오히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어느새 십만 팔로워가 넘는 파워트위터러가 되었다.

김홍신 선생님의 강의 후 1년 동안 나의 인생 사용 동선을 바꾸어보면서, 나는 나의 인생의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전혀 다른 분야에 새롭게 도전을 하였기에 아직 수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수익이 없기에 당연히 배고픈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 꿈을 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기에, 그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이 있기에 행복하다.

일전에 같이 직장에 다녔던 분들을 만나면 눈빛이 달라졌다고 한다. 활기 넘쳐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혹시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드리고 싶다.

“오늘은 내 남은 삶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늦은 시간이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셨다면 지금 바로 무조건 시작하세요!”

 

김점선 작 <Spring has come> Digital printed. 49×39cm. 2004.

 

열정과 욕심 사이, ‘무조건 도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

정선아 24세. 대학생.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2012년, 이제 곧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나의 대학 4년간은 어쩌면 무모하리만치 많은 활동과 시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학창 시절 참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 눈치, 입시에 대한 압박으로 많이 참아야 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이것저것 재지 않고 해보기로 했다.

1학년 때는 우선 신문방송학과라는 과의 특성을 살려 광고연구회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학교생활에 재미가 붙었는지 모의국무회의, 과 축구소모임, 행정고시준비반 등등 여기저기 들어오라는 대로, 재밌어 보이는 것은 무조건 무조건 들어갔다.

그러고 2학년이 되어, 1학년부터 쭉 해오던 광고연구회 활동과 함께 학교 졸업준비위원회 취업국장, 과 대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고연구회에서 광고 공모전을 나가기 위해 팀 구성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나는 팀장을 맡게 되었다.

학교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공모전 도전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급기야 동시에 세 개를 진행할 때도 있었고, 일년 동안 열세 개의 공모전에 나가기도 했다. 덕분에 수면 시간은 2시간, 집에 들어왔다 잠시 자고 다시 나가는 게 일상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뭐 하나라도 소홀히 하긴 싫었다. 팀에서 같이 무슨 자료를 찾아오자 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100%가 아니라 200%를 찾아서 갔다. 한번은 SK에너지 공모전 준비를 할 때였는데, 인터넷만으로 조사하는 게 부족해서, 직접 시청의 담당자들을 찾아가서 실태를 조사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주유소에 서서 소비자들에게 어떤 점이 좋은지, 안 좋은지 인터뷰를 하며 기획안을 짰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그냥 그 일에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젊을 때, 뭐든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SK에너지와 삼성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을 때는 너무 기뻤다.

물론 열심히 해도 떨어질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성공률이 5%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열정을 다해 이것저것 무조건 시도를 해보면서 나에게도 잠재된 능력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을 느껴갔다. 그저 대충 하다가 힘들면 쉬고, 그런 게 나인 줄 알았는데, 나도 ‘하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해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때로, 왜 이렇게 바쁘게 이것저것 다 맡아서 힘들게 사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한 곳에 집중 안 하고 여기저기 모임에서 얕게 있다가 사라지는 날 보며 좋아해주지 않는 선배들도 있었다. 어쩌면 처음에는 나의 이런저런 시도는 억눌렸던 것의 표출, 그리고 나를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덕분에 점차 욕심과 열정 사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고, 앞으로 내가 정말 집중할 수 있는 그 한 곳을 찾아가고 있었기에.

 

김점선 작 <나들이> Silkscreen. 82×65cm.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