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마을의 희망, 고 이태석 신부가 남기고 간 이야기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2010년 4월 KBS스페셜로 방영된 후 9월에 영화로도 개봉한 <울지 마 톤즈>의 첫 장면에 나오는 글이다.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 20년이 넘는 내전으로 오랜 굶주림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곳, 그곳의 유일한 의사로 주민들과 함께 희망을 일구었던 고 이태석(1962~2010) 신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내가 이태석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케냐 나이로비 UNEP(유엔환경계획)에 파견 근무를 나갔을 때였다. 신부님은 내 인생에도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주었다. 나에게도 꽃이 되어준 사람, 이태석 신부를 기리며….

이재현 환경부 정책관,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 사진 제공_KBS

“톤즈에 한번 와보세요.”

2003년 1월, 이태석 신부는 우리 가족에게 톤즈에 와볼 것을 제안했다. 작년에 이은 두 번째 권유였다. 당시 나는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다. 간곡한 권유에 약속했지만 막상 가려니 막막했다. 아프리카 최고의 오지인 데다 전쟁 중인 톤즈. 폭탄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이상한 병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왔고, 주변 사람들도 적극 만류했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를 두고도 고민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하서방님(하느님) 빽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출발하세요.”

그의 말대로 오로지 하느님 빽만 믿기로 하고 2003년 3월 4일 톤즈로 향했다. 다음 날, 톤즈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섭씨 55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 톤즈강의 오염된 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려 있었다.

그날부터 신부님과 그곳의 참모습을 만나기 시작했다. 허름한 신부님의 진료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에 보통 2~3백 명의 환자가 오는데 그를 만나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며칠씩 걸어서 오는 이들도 많았다.

“나을 수 있지만 그저 팔자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다”는 신부님은 진심으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져주는 의사였다.

매주 한 번씩은 병원에 오기 힘든 사람들을 찾아 여든 개가 넘는 유목민 마을을 직접 방문을 했다. 특히 이신부가 심혈을 기울인 곳은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이었다.

병으로 인해 손가락 발가락이 잘려나가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의 사람들, 차마 똑바로 보기조차 미안했지만 그들에게서는 너무나 따스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신부가 오고 나서 환자들도 많이 감소되었다며, 그들은 진심으로 신부님께 감사하고 있었고, 신부님 또한 “가진 건 없어도 감사할 줄 알고 기쁘게 사는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전율이 일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그냥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부끄러웠다. 하나를 가진 톤즈 사람들의 기쁨은 그 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아홉을 가진 나의 고통은 그 하나가 없다며 불평할 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신부님께서 왜 그렇게 톤즈로 오라고 하셨는지, 그 뜻도 조금씩 헤아려졌다.

이태석 신부는 알면 알수록 바보 같은 분이었다. 워낙 능력이 많아 한국에서 의사가 되었다면, 쉽게 부와 명예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사제가 된 후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선택했다.

“부족하지만 나의 모든 것도 하느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야지요. 저는 이곳에 도움을 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살러 온 사람이에요.”

신부님은 진심으로 이들과 함께할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벽돌 한 장 없던 이곳에 톤즈강에서 모래를 퍼와 벽돌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병원을 만들고, 학교를 지었다. 20년 넘게 내전을 치르며, 상처받을 대로 받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드럼, 트럼펫, 기타…. 음악으로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어 하셨다.

“쫄리, 쫄리, 쫄리!” 어느 곳을 가더라도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외쳤다. Fr(Father) John Lee. 이신부의 영어 이름 ‘존 리’를 빨리 부르다 보니 쫄리가 된 것이다. 가진 자로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민과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누던 이신부는 이 지역의 희망이었다.

나에게도 삶의 가치를 가르쳐준 이태석 신부님, 그분의 모습 중 가장 닮고 싶은 것은 ‘부드러움’이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나는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신부님은 어떤 어려운 여건에서도 항시 유머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딱 부러지지도 않았고, 어찌 보면 하는 둥 마는 둥 보이는데도 누구보다 많은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자신이 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2008년 10월, 한국을 방문했던 신부님에게 말기 암 선고가 내려졌을 때,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신부님은 항암 치료를 받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톤즈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톤즈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라는 책을 출간했고, 2009년 12월에는 두 명의 톤즈 아이들 한국 유학을 도운 것이다.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든 다시 톤즈로 돌아가려 했던 신부님, 하지만 2010년 1월 14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선종하셨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하지만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수단 아이들의 교육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해서 후원을 해나갔다. 다행히 2010년 4월, <울지 마 톤즈>가 다큐로 또 영화로 만들어지며 수단어린이장학회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인터넷 카페 회원이 19,000명까지 늘었고, 후원자도 봉사자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어떻게든 공부해서 신부님처럼 되고 싶다”며 한국으로 유학 온 톤즈의 아이도 더 생겼다.

우리는 신부님을 통해 저 먼 톤즈와 연결되었고, 또 그렇게 감동받은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맺었던 그 따뜻한 ‘끈’은 계속해서 이어져 널리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로 퍼져나갈 것이다.

“톤즈 하면 생각나는 두 가지 빛이 있어요. 하나는 무수한 밤하늘의 별이고, 또 하나는 유난히도 빛나 보이는 아이들의 큰 눈동자이지요.”

톤즈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맑은 미소를 띠던 이태석 신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착하고 정 많은 톤즈의 아이들은 신부님의 바람대로 톤즈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수단어린이장학회 http://cafe.daum.net/WithLeeTaeSuk

이태석 신부의 한센인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다.
아무리 치료를 해도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상처가 번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환자들의 발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그려 맞춤 신발을 만들어주었다.

이재현씨는 톤즈를 방문한 후 톤즈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사진은 2008년 11월
서울 상도동에서 열린 ‘수단 어린이를 돕기 위한 음악회’에서의
이태석 신부(왼쪽)와 이재현씨(오른쪽).
2005년 1월, 북수단과 남수단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에 처음으로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의 등장은 남부 수단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단숨에 유명 인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