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살개육종연구소 하지홍 교수가 들려주는 우리 삽살개 이야기

내가 삽살개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경북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목장을 하셨고 그곳에는 목장을 지키는 개들이 여럿 있었다. 넓은 목장 마당에 몰려다니던 개들은 나의 휘파람 소리에 우르르 달려오곤 했다. 그중에 삽사리도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몰랐었다. 어느새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의 토종개라는 것을.

신라 시대 왕궁에서 기르는 개였던 삽살개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동물이다. 삽살이, 삽사리로도 불리는 삽살개의 이름을 풀어보면, 살(煞)은 액운 즉 사람을 해치는 기운을 말하며, 삽(揷)은 퍼낸다, 없앤다는 뜻을 지녀, 말 그대로 악귀 쫓는 개를 뜻한다.

삽사리가 그렇게 여겨졌다는 것은 각종 조각상이나 그림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삽살개 상이나 그림을 액막이용으로 놓거나, 99칸 대가(大家)의 액막이용 동물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 황희 정승은 “삽살개의 눈빛은 워낙 강해 웬만한 동물들은 눈빛만으로도 기가 꺾이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을 만하다”고 했다.

한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섬기며,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주인을 구한다는 충절과 의리에 대한 민담도 많이 전해진다. 술에 취한 주인이 산에서 잠이 들었는데 산에 불이 나자, 인근 저수지로 가서 자신의 털에 물을 묻혀와 몸으로 불을 끄고 주인을 구한 후 결국 자신은 죽었다는 ‘의구총’의 전설 또한 삽살개를 두고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삽살개는 또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고도 불리며, 대단히 신령한 동물로 여겨졌다. 긴 털을 바람에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또 먼 하늘의 구름을 보고 짖으며 멀리서 올 손님을 예견하는 삽살개는 그렇게 여겨질 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전쟁에서 쓸 견피(犬皮)를 얻기 위해 일제는 매년 수십 만 마리의 토종개들을 도살했고 그 과정에서 털이 길고 부드러운 삽살개 대다수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우리 집 목장에 있던 삽사리들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탁연빈, 김화식 교수가 1960년대 멸종 위기에 놓인 삽살개 연구를 시작하면서 전국을 다니며 어렵사리 모아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대학을 가고 미국 유학을 갔다 오면서 삽살개는 내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다 32살의 나이에 경북대 교수로 오면서, 삽살개와의 운명은 다시 시작되었다. 1984년 여름 아버지의 목장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그때 남아 있던 삽사리는 단 8마리뿐이었다. 힘없이 묶여 있는 삽사리들의 눈동자와 딱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아, 저 여덟 마리가 문익점의 목화 씨앗 세 알이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이미 계획하던 다른 연구가 있었지만, 나는 멸종 직전에 놓인 삽사리를 살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목장 뜰에 개들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진 삽살개를 찾아 나섰다. 시간만 나면 어김없이 개를 돌보러 달려갔다. 정성을 들인 만큼 삽사리의 수는 늘어났다. 8마리에서 30마리, 50마리…. 처음에는 똥 냄새조차 싫지 않을 정도로 삽사리들이 좋았다. 하지만 점점 많아지는 개를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어떤 지원이나 관심도 받지 못했기에 이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며 좌절할 때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삽살개들이 수천 년을 우리 땅에서 살아왔다 보니 어지간한 병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 삽살개와의 알 수 없는 묘한 교감이 나와 삽사리들을 단단히 엮어주는 것도 같았다.

한 번은 농장에 있는 한 친구가, “당신이 삽살개를 부리는 게 아니고 삽살개에게 당신이 선택된 것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멸종 위기의 삽살개를 구해 이름을 알리고 싶은, 학자로서의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정말 삽사리들이 나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이 있었다. 동물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삽사리들도 수컷끼리 툭하면 싸운다. 어느 날 갑자기 수컷 두 마리가 으르렁대더니 싸움을 시작했다. 저러다가 둘 중 하나는 죽겠는 걸? 앞뒤 잴 것 없이 싸우고 있는 한 녀석의 배를 잡고 세게 뒤로 잡아당겼다. 그 순간 녀석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엄청나게 큰 이빨이 나를 향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구멍 낼 정도로 강한 이빨을 지닌 녀석들. 당연히 크게 물리겠구나, 했는데 아프지가 않은 것이다. 눈을 뜨고 보니 내 팔뚝이 그 녀석의 이빨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었다. 이빨이 내 살갗에 닿은 순간, 자신의 주인인 걸 알아채고 멈춘 것이다. 동물들이란 자기 본능을 억제하기 힘든 법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두들 놀라워했다.

삽사리를 키우는 사람들은 “주인밖에 모르는 너무 멋있는 개”라고 말한다. 기다려! 하면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개, 주인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행동, 낯선 사람에게서 주인을 지켜주는 행동이 감동스러운 개, 주인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영리한 개, 순할 땐 순하지만 용맹할 때 아주 용맹한 개, 작은 개가 자기 밥그릇을 넘보면 아예 줘 버리지만, 다른 큰 개가 자기를 해코지할 때는 절대 물러남이 없는 멋진 개…. 오랫동안 삽살개를 키운 사람들 대부분이 느끼는 특징이다.

삽살개의 이름을 풀어보면 악귀 쫓는 개를 뜻한다. 또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고도 불리며, 대단히 신령한 동물로 여겨졌다. 청룡(3살, 청삽사리), 수호(5살. 백삽사리), 복길이(6살, 황삽사리)가 포즈를 취했다. 현재 삽살개육종연구소에서는 500마리의 삽살개를 키우고 있다.

이런 삽살개는 1992년 천연기념물 368호로 지정되었고, 1999년 100마리 분양을 시작으로 현재 3천 마리 정도를 전국적으로 기르고 있다. 사전에 개념조차 없어 사어(死語)가 될 뻔했던, 삽살개라는 단어가 이제 사전에도 당당히 등재되어 있다. 삽살개와 함께하는 세월 동안 말로 표현 못할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렇게 삽살개를 다시 찾은 것에 보람을 느낀다.

굴곡 많았던 시대의 아픔 속에서 힘없이 사라져갈 뻔했던 삽살개가, 오랜 역사를 우리와 함께해온 민족견으로서의 특성을 간직한 채 그렇게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하지홍 교수는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 농화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경북대 유전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1985년, 마지막 남은 8마리 삽살개를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다시 삽살개를 살려냈으며, 저서로 <우리 삽살개>, 자전적 이야기를 동화로 담은 <삽살개 아버지 하지홍>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