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합니다. 이별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큰딸을 시집보내고

추창연 59세. 농부. 전남 장흥군 안양면

사랑하는 딸 미란이에게

미란아, 네가 시집을 간 지 벌써 1년여가 되어가는구나! 물가에 놔둔 어린 사슴처럼 항상 걱정이었는데 이십여 성상을 훌쩍 넘어 이제는 한 가정을 꾸리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구나! 너를 시집보내는 날, 참 많은 감회가 교차했었단다.

네가 태어난 첫해,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엄마 품에 안겨 교회에 다녀오는 너를 보듬고, 하얀 눈을 맞으며 덩실덩실 춤을 췄었지. 너를 낳는 것도 무리라 할 정도로 엄마 몸이 약했는데, 두 사람 다 건강하니 하늘을 얻은 것 같았단다.

네가 두 살 되던 해, 동생 두리가 태어나던 날 아침에 설거지한다고 꼬막 같은 그 작은 손으로 퐁퐁 대신 콩기름 한 병을 다 부어 할머니에게 칭찬과 꾸중을 한꺼번에 들었었지.

그 작은 것이 어느새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또 학교에서 무슨 상이라도 타 올 때면 말할 수 없이 기뻤단다. 너도 어리면서 꼬물꼬물 더 어린 동생들을 챙겨주던 너를 보면 언제나 기특했지. 네가 자라가는 그 자체가 아빠에게는 보람이고, 힘이었단다.

항상 걱정과 미안함도 많았다! 외국에서 소가 많이 들어오는 바람에, 소를 키우던 일들도 엄청난 손해를 보고 접어야 했고, 어떻게든 재기해 보려고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도 지어봤지만, 연이은 실패를 맛봐야 했지. 어떻게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더구나. 네가 때로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면, 못 먹여서 그러나, 없는 형편에 병원 한번 데려가지 못하고 이 못난 아빠를 탓해야 했지. 쓸 만한 학용품, 좋은 옷 한 벌 사주지도 못했구나. 그래도 너는 누구보다 명랑하고, 항상 이해하고 따라주었지! 어디 가든지 “아빠같이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해줄 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단다.

처음 너를 떠나보낼 때가 고등학교 때구나. 작은 자취방 하나 겨우 마련해, 40리 떨어진 읍내 학교로 너를 보낼 때, 수많은 걱정이 앞섰지. 하지만 너는 정말 꿋꿋이 생활했잖아. 그러면서 일요일에 집에라도 오면 논, 밭에 나와 일손을 거들어주었지!

미대에 간다고 했을 때, 참 많이 걱정하고 반대도 했지. 하지만 아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계속 반대할 수만은 없었단다. 아빠도 미술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공부할 수 없었거든. 너까지 한으로 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에 나와 미술 교사를 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오직 일에만 매진하며 열심히 뛰었던 너. 네가 어느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싶다며 데려왔을 때, 내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술렁거렸다. 품 안의 어린애로만 보였던 네가 벌써 결혼을 한다고 하다니.

시집가던 날, 너의 영원한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너를 보니 섭섭함과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단다. 이제는 어려웠고 아기자기했던 지난 일들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열심히 꾸려가야겠지.

사랑하는 예쁜 딸 미란아!

인생에는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이 따른단다. 이제는 모든 것을 너희 둘이서 슬기롭게 헤쳐가야 하지. 첫째, 마음을 넉넉하게 가지고 사물을 보고, 항상 둘이서 의논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를 이해하며 즐거움으로 생활하면 모든 게 잘 풀려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간에 한 번 맺어진 운명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너희 가는 길이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하길 아빠는 늘 기도할게.

장경숙 작. <바람의 노래> 혼합재료. 60×60cm. 2010.

세상은 언제나 봄날

김진정 37세. 교사. 경남 창원시 의창구

햇살이 눈부신 초여름 날 오후. 그가 단단한 몸을 빠르게 움직이며 동네 아이들과 농구를 하고 있다. 땀 흘리며 집중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오늘도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운동장에서 농구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사회생활 4년 차의 건실한 여성, 그는 임용을 기다리는 청년. 다른 청춘들이 하고 있는 고민을 지나왔고 해결했으며 그와 나의 현재와 앞날은 온통 분홍빛이다.

그와 헤어졌다 다시 만난 지 6개월이 지나고 있다. 거의 매일을 만났다. 퇴근하면 그와 만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가로수 길을 걷고 유명한 맥주집도 갔다. 그는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며 진보적인 사회 의식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도 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잘 들어주었고 5살이나 어리지만 말도 잘 통한다며 좋아했다. 물론 싸운 날도 있었지만 소원한 기간은 이틀을 지나지 않았고 싸우기 전보다 더 사이가 좋아지고는 했다.

올 장마는 유난히 길고 비가 많나 보다. 연일 궂은 날씨다. 한국에서 제일간다는 이 종합병원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는 부스스한 머리에 피곤하고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속에 병원에서 처음 뵙게 된 그의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그리고 나도 있다. 옆방에선 그가 호흡기에 의지한 채 죽음과 싸우고 있다. 아니 죽음의 편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그의 병은 너무나 갑자기 찾아왔다. 올 들어 가장 덥다는 날, 그가 우리 집에 왔다. 열이 난다 했다. 더워서 그런가 했다. 좀 있으니 춥다고 했다. 두꺼운 이불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구급차를 타며 그는 이참에 건강검진 다 받고 건강해져 나오마 했다.

입원하고 이틀 뒤 나도 그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악성 림프종이란 병명을 받았다. 의식이 없다. 그러나 목으로 무언가 빼내는 치료를 할 때면 고통스러워 몸을 움직인다. 의사는 그가 완치된다 하더라도 장애가 남을 거라 한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의사는 우리를 단념시키는 듯하다. 집으로 내려오고 나서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 다녀왔다. 두 번째 전화를 받고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침대에 반듯이 누운 그는 몸에 붙이고 있던 거추장스런 것들을 모두 떼어버려서 그런지 편안해 보였다. 가슴도 아직 따뜻한 것 같았다. 혹시 그가 살아 있는 건 아닐까….

그를 보낸 후 나에게 세상은 더 이상 화창한 봄날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전의 냉소적인 내가 되어 있었다. 난 원래 사랑에 관심도 없고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나를 위로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혼자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영화에 음악에 빠지기도 했다. 마음속에 있는 그에 대한 마음을 쏟아버리고 싶었다. 반대로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지만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슬픔이 가득 찬 것 같았다. 누가 살짝 건들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직장 동료가 마음수련을 권했다. 수련을 하며 그를 잡고 있는 나를 버렸다. 그와의 짧은 추억에서 살고 있는 나를 버렸다. 추억의 장소들을, 농구하던 모습을, 유골을 뿌렸던 그 강가를, 울고 울었던 내 모습을 마음으로 버렸다.

나는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항상 받기만 하고,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기를, 나의 즐거운 일상이 되어주기만을 바랐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내가 흘린 눈물은 이제는 그런 그가 없는 나를 위해 울어준 것에 불과했다.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수련을 계속하면서 마음으로 빌었다.

그를 보낸 지 9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담담하게 그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된 지금 그가 아팠던 몸을 벗어버리고 편안하게 있음을 알기에…. 그도 나도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장경숙 작. <LOVE> 캔버스 위 혼합재료. 50×50cm. 2010.

아이들을 믿습니다

이정원 32세. <대광여자청소년의 집> 근무

나는 광주의 한 청소년 쉼터에서, 소위 말하는 비행 청소년들을 지도하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주로 형사처분 및 보호관찰을 받거나 소년원에서 퇴원한 여자 청소년들이 오는데, 거의 학업이 중단된 상태라, 처음에 오면 가정환경을 파악하고 진로 상담부터 한다. 그 후 학교나, 검정고시 학원, 미용, 제과제빵 같은 전문 직업 학원 등 아이들에게 맞는 곳을 찾아 다니도록 해준다.

하지만 한참 예민하고 민감한 여자 청소년들인 만큼 바람 잘 날이 없다. 학교에 지각 안 하게 보내는 것부터, 학교에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는 전화, 학원을 땡땡이 쳤다는 전화, 때로 재범을 저지르거나 쉼터를 가출했다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이야기, 그런 것들을 수습하고 다니다 보면 하루가 바쁘다.

이 일을 한 지 어느새 6년,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날마다 전쟁 같았던 날들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마음이 울컥해진다. 보통 아이들은 6개월에서 1년을 이곳에 머물다 간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 학교를 졸업할 때, 자격증을 딸 때, 강해 보이던 인상이 앳된 얼굴로 돌아갔을 때, 편지를 써서 줄 때, 재범하지 않고 무사히 쉼터를 떠나보낼 때의 감동들. 때로 아주 큰 변화를 보여 놀라게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번은 절도 행위 재판 후 우리 기관으로 온 여고생이 있었다. 어디서 맞았는지 얼굴엔 피멍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무기력하고 초점 없는 눈빛에, 말도 없고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일부러 농담도 걸고 장난도 치면서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음을 열기란 쉽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끝에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제야 그 아이가 계부의 잦은 폭행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는 것,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리다 절도까지 하게 됐다는 것, 이곳에 오기 전 다른 청소년 쉼터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모든 의지를 상실한 채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관심 가져주고, 들어주고, 웃어주는 사람들 곁에서 생활하면서 아이는 점차 말수도 늘고, 또래들과 장난도 치며, 표정과 성격이 밝게 변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검정고시도 준비했다. 우리는 아이가 대학생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대학 및 독지가의 후원을 받도록 도움을 주었고 드디어 진학에 성공했다. 대학 시절 내내 전체 평점 4.4라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며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던 그 아이는 현재 유학을 준비 중이다.

그렇게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고 내가 더 기쁘다. 아이들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언제나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사회의 편견처럼 나도 처음엔 이런 아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아이들은 정말 순수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너무 상처받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일 뿐이다.

아이들을 사회로 보낼 때 항상 믿음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하든, 이 세상에 자기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은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그 믿음이 이 아이들 어엿한 한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리라는 것, 그 또한 믿는다.

장경숙 작. <가을 기억> 캔버스에 유채. 53×34cm.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