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합니다. 이별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늦둥이의 고백, 어머니를 보내고

공민호 38세. 미용사. 충남 논산시 상월면

 

어머니는 나이 마흔셋에 3남 3녀 중 늦둥이로 나를 낳으셨다. 바로 위의 형하고는 7살 차이, 큰누나와는 19살 차이가 났다. 다섯 살 때쯤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모든 걸 꾸려나가셨다.

누나와 형들이 다 커서 객지로 나가자,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니는 묵 장사를 하셨고, 집안 형편이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항상 늦둥이 아들이 필요한 것, 먹고 싶은 것을 사주셨다. 하지만 이런 고마운 어머니도 그때뿐, 난 항상 뭔가 부족해했고 어머니의 행동들이 불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형 누나들처럼 어머니 품을 떠나 객지에 나가 돈을 벌고 미용 기술을 배운다고 한창 열심히 일을 했다. 그때쯤 어머니는 한평생 하시던 장사를 그만두고 홀로 시골집에서 지내셨다. 갑자기 시간은 많아지고, 자식들의 빈자리도 커서였을까.

어머니는 기운도 없어 보이고, 삶의 의욕도 점점 떨어지면서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러려니, 좋아지려니 하고 어머니를 잘 살펴드리지 못했다. 그저 내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지켜보는 자식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난 뭐가 뭔지를 몰랐다. 막상 나의 곁에서 죽음이라는 게 일어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만 흘러내렸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어머니 모습이 이상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내 앞에서 숨 쉬지 않고 계신 어머니가 정말 나의 어머니란 말인가? 이젠 싸늘하게 누워서 아무런 대답도 없고 어머니는 정말 어디에 계신 건가?

세상은 야속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없는 생활이 이렇게 힘들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지낸 시간이 많고 애증이 많았던 탓일까, 난 어머니의 빈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 말고 화장실에 가서 30분 넘게 눈물을 흘리는 등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어머니의 죽음을 자책했던 나는 점점 몸까지 약해져 의욕도 없고, 허무해졌다. 날 괴롭히는 복잡한 생각들로부터 돌파구를 찾고 싶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그러다 ‘마음을 지우개처럼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수련 본원을 찾았다. 내 마음속에만 있던, 내가 사진처럼 찍어두었던 어머니와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우동 한 그릇 사드시지 못하고 아끼고 아껴 용돈을 주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형식적인 전화 한 통 하고 용돈 조금 드리는 걸로 자식 역할 다했다 여긴 나, 나이 많고 배움이 부족한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나. 내가 내 미래를 위해 쏟아부은 열정의 반만이라도 어머니에게 관심을 가졌었더라면….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옛날 조상들은 부모가 죽으면 그 무덤 옆에 빈소를 차리고 삼년상을 치렀다는데 나도 어머니의 삼년상을 한다는 마음으로 수련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죄책감이 어머니를 편안히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어머니는 나를 용서해주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사진들이 가득 차서, 공허한 마음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죄책감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으로 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다. 이젠 어디서나 어머니 얘기를 편안하게 한다. 미용실에 오시는 할머니들을 뵈면 마치 어머니를 뵙는 것 같아 더 잘 챙겨드리게 된다. 요즘은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찾아가 봉사도 한다.

막내의 욕심이자 마지막 바람은 우리 누나와 형들도 마음속에 묻어둔 수많은 어머니에 대한 자기만의 사진 속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실로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한 적도, 형제들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번 한 적이 없는 듯하다. 이제라도 고백하고 싶다.

“어머니, 저 늦둥이 막내예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며 애지중지 키워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이 헛되지 않게 더 많이 내 주변 사람들, 세상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형들, 누나들, 철딱서니 없는 막내 때문에 항상 걱정하는 것 잘 알아. 형들, 누나들에게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도록 열심히 살게. 사랑해, 고마워.”

장경숙 작. <기다림2> 혼합재료. 60×30cm. 2008.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나를 떠나보낸 여행길

신혜 29세. <먼지의 여행> 저자. blog.naver.com/nanyanya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재산의 잃음, 이런 상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뭘 할지도 몰랐다. ‘나’라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먼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때쯤인가 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돈 없이 전 세계를 여행하는 독일 순례자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3개월 정도 서울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삶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신에게 영감을 받으며 실천하려 했고, 사람들과 항상 이야기하고, 그걸 통해 자기 안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만들어갔다.

언제나 돈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배워온 나에게,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자는 게 매일매일 어떻게든 해결됐던 그들의 삶은 매우 새롭고 매력적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집, 가족, 재산, 학력, 지위, 인맥 등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던 것들을 뒤로하고, 온전히 나를 내 마음 안의 영감에 맡긴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다행히도 난 새롭게 살고 싶었다. 남들이 바라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다. 온전히 내 안의 영감에 귀 기울이고, 그걸 통해 배우는 삶을….

그렇게 시작된 여행. 24살의 나는 돈 없이 1년 동안 인도, 네팔, 태국, 중국을 돌아다니며 고요하고 느린 시간을 즐기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 무엇이든 해야만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바쁘게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듣고 배워왔다면, 그 반대의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 나무에 드는 햇살을 바라보고 물웅덩이의 잔물결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편안해지는 걸 느끼는 것.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냥, 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즐기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졌고, 그들과 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랬다. 이 여행은 그저 돈 없이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놓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그때그때 사는 것을 연습해야 가능한 여행이었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배우고 성장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여행 중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나눠주는 것을 받으면 정말 고마웠다. 빵 한 조각이라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은 축복이고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이 그날그날 채워졌다. 내가 가지고 떠났던 것들은 무거워서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주어서 사라졌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준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내가 입던 바지는 두 친구가 준 것이고, 기타는 순례자 친구가 준 것이고, 손목엔 여러 친구들이 만들어준 팔찌가 있고, 내가 덮던 담요는 다즐링에서 만난 친구가 준 거고…. 그들의 마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고 따듯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내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에 무언가가 생기면 필요한 이들과 나눠 썼다. 이렇게 ‘내가 사라지는’ 경험들을 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순례자들과 여행을 하다가 헤어져 혼자서 인도 콜카타의 마더하우스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의 고아원에 있는 수녀님이 벽화를 그려줄 수 있겠냐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정말 즐거워서 스스로 열정을 내어 했다. 6개월 동안 작업하며, 그곳의 자원봉사자 친구들이 생활비를 조금씩 나눠주어 살아갈 수 있었다. 밤에 기도를 하고 자면 아침에 영감이 떠오르고, 그것을 스케치해서 벽에다 그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가장 큰 힘은 먼지와 같던 나의 정체성 대신 과감히 선택한 여행 덕분이다.

 

장경숙 작. <바람이 분다>

캔버스 위 혼합재료. 73×117cm. 2012.

 

 

엄마, 이제는 후회 없도록 살게요

하순화 44세. 유기농숍 운영.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2011년 1월 10일 한파가 몰아치던 늦은 저녁. 휴대폰 벨이 울린다.

“119로 응급실에 가는 중입니다. 보호자분 빨리 오세요.” 불길한 예감은 했지만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잠자던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응급실로 가고 있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별의별 생각과 함께 5분이 500분 같았다.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딸이 힘들까 봐 요양원으로 가신 지 딱 11달째 되는 날이었다.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사롭지 않게 보이셨다. 엄마 얼굴을 보니 그래도 좀 위안이 됐다. 배가 아프시다고 했다. 그게 나하고의 마지막 대화였다. 응급 상황이 늘 있던 터라 또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괜찮아지시겠지, 스스로 위로를 했다. 엄마한테도 “엄마! 의사 선생님이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금방 괜찮아진대”라고 말씀드렸더니 편안히 주무셨다. 그렇게 엄마의 모습이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엄마를 보낸 지 일년이 다 됐지만 아직도 내 기억엔 엄마가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다. 그렇게 쉽게 가실 줄 알았다면 엄마 손이라도 꼭 잡고 못다 한 얘기라도 실컷 할 걸. 사랑한다고, 엄마의 딸로 태어나서 너무 행복했었다고. 같은 하늘 아래 엄마가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났었다고.

보고 싶으면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 달려갔었다. 추운 날 엄마가 보고 싶어서 출근길에 들렀더니 내 손을 만지면서 꽁꽁 얼었다며 당신 이불 속으로 내 손을 당겨 녹여주시던 우리 엄마. 유난히 쌈 싸먹는 걸 좋아하셨던 우리 엄마! 매주 일요일이면 엄마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서 우리 가족이 전부 맛있는 고기랑 쌈을 준비해서 갔었다. 이것저것 손자에게 먹이시던 엄마의 모습이 그립고 또 그립다.

요전 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연극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기고 싶고. 왜 이제야 엄마의 소중함을 깨닫는 걸까? 후회와 죄책감만 남았는데. 엄마에게 해줄 게 너무 많이 남았는데.

 

엄마, 늦었지만 잘해 드리지 못한 거 용서하세요. 앞으론 더 열심히 살게. 여태껏 나를 가장 사랑해주고, 내가 잘됐을 때 젤 기뻐해준 사람이 엄마였는데. 지금껏 철부지로 살았나 봐. 엄마는 내 곁에 오래오래 계실 줄 알았어! 다들 후회 없는 삶은 없다고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너무 많은 교훈을 남겨주셨어. 소중한 게 뭔지. 사람 보는 눈도 생겼어. 진심을 담아서 사람을 대하고 최선을 다하는 거.

엄마 나 많이 철들었지! 아껴준 만큼 사랑한 만큼 나도 엄마 뜻 잘 이어받아서 우리 아이들 지혜롭고 바르게 잘 키울 거고,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성규 아빠, 임서방 잘 섬기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 지켜봐줘!

엄마 영원토록 기억할게요. 사랑합니다.- 막내딸 순화 올림.

장경숙 작. <서쪽하늘> 대리석 위 순금박. 60×60cm.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