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인생 50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하다

글 & 사진 최민식

출처 <휴먼 선집>(눈빛)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 선생님을 직접 뵌 것은 지난여름입니다. ‘소년시대’라는 주제로 선생님의 사진을 담게 되면서였지요. 처절하게 가난했던 이웃들의 삶을 담아 오신 분이니, 매사 엄하고 진지한 분일 거란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마치 옆집 할아버지처럼 너무나 따듯하게, 유머러스하게 조근조근 말씀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 남루하고 처절해서 때론 외면하고 싶었던 가난한 이들의 삶…. 하지만 선생의 카메라는 50여 년간 그들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것은 부디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생의 간절한 기도였고,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기에 선생의 사진은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2월 12일 작고하신 사진가 최민식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님의 글과 사진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내가 사진에 눈뜨게 된 것은 내 나이 28세이던 1955년,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의 사진집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을 접하면서부터다. 그때 받았던 감동은 지금 다시 되새겨 봐도 너무 생생하다. 사진가에 의해 포착된 삶의 순간이, 사진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이후 유진 스미스(Eugene Smith, 1918-1978)의 사진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휴머니즘으로 일관해 온 작가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사진을 찍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 길로 삶의 터전이었던 부산 곳곳을 누비며 서민의 일상을 찍기 시작했다.

나의 사진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쌀을 사 놓으면 연탄이 떨어지고 연탄을 들여놓으면 쌀이 떨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도 팔아야 했기에 밤에만 수돗물이 나오는 달동네에 살기도 했었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내 사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흑백사진 속에는 희로애락이 공존한다. 가난한 사람들, 지울 수 없는 정겨운 얼굴, 참으로 극적인 순간을 그들과 함께했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진지한 사랑을 담으려고 했다.

부산 자갈치시장은 근 50여 년 동안 내 사진의 소재가 되어 온 장소이다. 최근에 현대식 건물로 변신하는 바람에 과거의 정감과 활력, 투박함 같은 것은 많이 사라졌지만 나에게 자갈치시장은 언제나 영원한 안식처로 다가온다.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힘찬 몸짓으로 약동하는 자갈치시장은 비릿한 생선 냄새와 함께 생명력이 꿈틀대는 곳이다.

시장 모퉁이에 모여 앉아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던 아지매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혼잡했던 시장통, 그 치열했던 삶의 풍경이 이제 사라진 것 같아 몹시 아쉽다. 내 사진들을 보며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못내 떠나보낸 옛 정경들이 가슴 한편을 시리게 하여 가만히 읊조린다.

“아지매들 다 어디 갔나 모르겠네, 사진 잘 나왔는데….”

나는 지난 50여 년간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시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쉽게 찍을 수 있는 사진, 돈이 되는 사진을 찍으라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항시 그런 질문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나의 영원한 테마는 인간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계 곳곳의 헐벗은 땅, 병들고 굶주린 자들을 목격해왔다. 그들에겐 진정 나눔이라는 배려가 필요하다. 나눔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줄 뿐 아니라 그들과 내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안전한 곳에 있다는 현실에 감사하게 해준다. 어려운 사람을 보살펴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 이렇듯 나는 사진을 통해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어 휴머니즘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려는 신념으로 사진을 해왔다.

내가 행운아라 생각하는 것은 온갖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진의 외길을 걸을 수 있는 바보 같은 신념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욕심 없이 사진에 미칠 수 있게 해준 가난에 고마워하고, 나를 일깨워주는 이웃들의 눈물과 웃음에 고마워한다. 바로 그 이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오늘도 나를 이 땅에서 사진가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사진가들이여, 부디 진실하기를….”

사진은 내부에 진실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출발한다. 눈에 보기 좋은 것으로만 만족하거나, 본질과 관계없는 것을 조작하고 표현하는 사진가는 결코 올바른 사진가가 될 수 없다.

내가 의도적으로 연출하지 않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은 그 현실 자체에 이미 예술이 추구하는 진실이 담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가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인간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수많은 책과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집을 통해 끊임없이 사진을 배웠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를 그토록 사진에 몰두하게 한 것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신의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성공한 인생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남겼는가가 되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사진가 최민식(1928-2013)님은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57년 일본 도쿄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진을 연구하면서 인간을 소재로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총 14권의 <휴먼> 시리즈(1968-2010)를 출간하였으며, 2008년 13만여 점의 자료를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여 민간기증국가기록물 제1호로 선정되기도 한 님은, 한국사진문화상(1974), 예술문화대상(1987),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2000), 부산문화대상(2009) 등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는 <낮은 데로 임한 사진>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에 출간한 <휴먼 선집>은 최민식 선생의 대표작인 <휴먼> 시리즈 14집을 총정리한 책으로서, 그의 사진 철학이 녹아 있는 마지막 유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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