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도 원망도 놓아버리자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들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용서할까 합니다

이한라 27세. 직장인.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지난 1월, 나는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 대학에 들어가면 꼭 하겠노라고 공언했던 그 유럽 배낭여행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떠났다. 그리고 45일간의 여행 일정에 프랑스 니스와 모나코를 넣었다.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그저 탁 트인 산호빛 에메랄드 지중해를 보면서 ‘힐링’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 떼제베를 타고 리옹을 거쳐 프랑스 최남단에 위치한 니스에 도착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파리와는 달리, 하늘하늘 흔들리는 야자수, 따스한 바닷바람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무작정 해안으로 향했다. 아래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에메랄드빛 바다색.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닷물의 저 끝에는 수평선이 아스라이 그어져 있고, 지는 해는 바다에 그 색을 입히고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하얗게 모래사장에서 부서지는 그 탁 트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한참을 주저앉아 그렇게 울었다.

대학 시절, 나는 잠시 의사의 꿈을 꿨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내가 선택한 길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주셨다. 어머니께서는 매일 나에게 전화하셔서, 힘들지는 않는지, 공부는 잘돼가는지, 잘 먹고 잘 자는지를 물으셨다. 그리고 응원과 격려도 잊지 않으셨다.

“우리 딸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그러나 몇 달 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길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 길임을 확신했다. 책상에 앉아는 있는데 집중할 수 없었고 계속 나태해져만 갔다. 부모님께 이 공부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려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공부가 재미있는 척, 할 만한 척, 부모님을 속였다. 결국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시험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부모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 못하겠다고, 시험을 포기하겠다고 말이다.

부모님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무척이나 아쉬워하셨고 또 안타까워하셨다.

물론 내 의사를 존중하여 주셨지만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했다. 나는 그저 부모님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는 착한 딸로 내비치고 싶어, 부모님을 속여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모님께서 나에게 실망하셨던 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고 분노했다.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가 나와 맞지 않음을 알고도, 그저 공부하고 있는 것이 편하고, 스스로의 틀을 깨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용기가 없어 주저했던 내 자신은 그야말로 소위 말하는 ‘루저’였다.

그 후, 회사 생활을 하고 시간도 꽤 흘러 이제 그 일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마음속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 일을 상기시키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어 몸서리쳤다. 나는 그 기억 속의 루저였던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과 분노가 탁 트인 니스 바다를 보자 내 속에서 흘러나왔다. 흐르고 넘쳐,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나는 그렇게 한참을 나 자신을 놓아버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프랑스 어느 한 도시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용서하기 시작했다. 내 자신에 대한 분노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도 바닷바람에 실어 보냈다. 주위 사람 누가 의사가 되었다고만 해도 움찔했던 나의 옹졸한 마음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의 잔여로 괜히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는 척했던 나의 위선도 다 놓아버렸다. 나는 개운해졌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부모님께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많이 감사하다고 말이다.

유의랑 작.

<휴식> 170×90cm

Oil on canvas / 1988

나는 ‘왕따’가 아니었던 게 아닐까

백혜명 31세. 직장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거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대체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하는 아이였다. 교우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되도록이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친구들의 의견을 들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업 경쟁이 치열해졌고, 아이들은 각각 파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괜히 그들 무리에 끼었다가 엄마한테 안 좋은 잔소리를 들을까 봐,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공부만 파고들었다.

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가 돼 버렸고,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곧잘 와서 묻곤 했지만 친구로서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의 문이 서서히 닫히면서 간혹 친구들이 궁금한 것을 질문해도 잘 답변해 주지 않았다. 그런 게 화근이었는지 친구들은 불만을 갖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지금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건가 했는데, 정말로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애들이 없었다! 아예 두 명의 친구는 대놓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나를 못살게 구는 친구들도….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왕따 상황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것은 그때뿐이었다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경험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 나를 또 왕따시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무서웠고, 우연히 그 친구들을 마주치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니까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 그 아이들이 더 불쌍한 거라고, 그냥 훌훌 털고 살자며 나를 다독였고, 그게 용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나를 괴롭히던 친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마음에서 용서했기에 그 친구를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생각에 불과했다.

그 친구를 보는 순간 원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와 정반대였다.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진심으로 반갑다고 했다. 솔직히 그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용서하기는커녕, 미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건 나였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아이는 내게 원수였다. 친구는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고 말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친구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을까?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미스터리한 상황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유의랑 작.

<결> 230×150cm

Oil on canvas / 2006

그즈음 마음수련을 하게 된 나는 내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을 떠올리며 버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때의 일만 떠올려도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버리면서 나는 점점, ‘나’로부터 벗어나 중학교 시절의 ‘나와 친구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친구는 두루두루 교우 관계가 좋은 아이였다. 그 친구는 혼자 외롭게 있는 내가 안타까워 그 또래의 방식으로 나를 주목받게 해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 친구에게는 그러한 놀림이 친구들 사이의 흔한 장난 같은 것이었는데, 나만 내 열등감에 사로잡혀 나를 왕따시킨 거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철석같이 그 친구가 잘못했고, 나는 불쌍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착하고 바르다며 살아왔지만, 그게 얼마나 오만했던 건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 행동으로 하지 않았을 뿐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마음속으로 ‘왕따’시키고, 미워하며 살아왔던가. 그렇지만 언제나 세상은 똑같이 햇살을 비춰주고, 숨 쉬게 해주며 모든 것을 품어 안고 늘 용서해주고 있지 않았나. 용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내 자신이었다. 내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이 평화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있었다. 용서란 이 세상이 내게 해준 것처럼,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는 거라는 걸 배웠다. 부끄러웠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진심 어린 참회를 하고 나서야, 나는 진정으로 그 친구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었다. 내 마음에도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50년 넘게 부재중인 어머니를 용서하며

홍경석 55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성남동

딸의 대학원 졸업식이 있던 날, 모처럼 강추위가 멀찌감치 나들이를 간 날이었습니다. 그날 졸업식에서 딸은 석사 학위를 받았지요. 지난 2005년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상경한 지 어언 8년여 만에 받는 참으로 영광의, 그러나 지난한 과정을 담보로 했던 졸업증서!

캠퍼스에 나와 기념사진을 찍던 중 근처에서 연방 눈물을 훔치는 어떤 노모 한 분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그분 역시 저처럼 아들의 박사 가운과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는 중이었지요.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분은 마구 오열하셨습니다.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니!” “엄마, 이젠 그만하세요!”

유추컨대 그 졸업생의 부친께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그 홀어머니는 갖은 고생과 바라지 끝에 자신의 아들이 우리나라 제일의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는 영광의 자리에 오게 됐으나,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현실이 새삼 통탄스러우신 듯 보였습니다.

애처로운 그 모습을 보자 어떤 동병상련의 아픔이 제 폐부를 마구 찔렀습니다. 저를 낳은 지 불과 백 일여 만에 집을 나간 어머니. 그로 인해 아버지는 시나브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불과 오십 살도 못 사시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셨지요. 따라서 참으로 오랫동안 어머니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집 어머니들은 남편이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자식들을 봐서라도 모두 참고 산다던데 당신은 왜 그랬습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여전히 불변하게 일언반구 회신조차 없었습니다. 그랬던 어머니를 비로소 용서한 건 딸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던 지난 2004년 겨울이었지요.

‘그동안 당신을 참으로 미워했고 심지어는 증오까지 했었지요. 그렇지만 이제부턴 그토록 미워했던 제 심지(心志)에서 증오의 촛불 심지까지를 말끔히 제거하렵니다. 당신은 그동안 내게 있어 너무도 견딜 수 없을 만치의 시련과 아픔을 켜켜이 쌓이게 한 단초 제공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젠 용서하렵니다. 왜냐고요? 따지고 보면 용서란 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동안 당신을 용서할 줄 몰라서 그 숱한 나날 동안을 번민과 증오, 그리고 때론 자학의 밤으로 점철하곤 했거든요. 뿐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날 낳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커다란 상실감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각인된 주홍글씨와도 같았지요. 근데 오늘날 아들에 이어 딸마저 소위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보니 이것이 어쩌면 당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는 억지춘향격 자기 합리화 당위성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이 없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할 줄 알았으며 아울러 당신의 몫까지를 채워 아끼고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날 아무리 증오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먼저 용서하는 순간, 날 짓누르던 미움과 원망의 먹구름에서도 벗어나 참다운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제 나이 올해로 55세.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진 모르겠으되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거두겠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용서와 관용이란 긍정의 비단으로 채우겠습니다.

유의랑 작.

<열매> 60×25cm

Oil on canvas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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