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나만의 보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유물 놋대접과 인두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우리 집의 놋대접과 인두는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겨놓은 유품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가 보물처럼 아끼시던 물건인데 내가 엄마의 유물로 남겨놓은 것이다.

엄마의 놋대접은 간장 종지처럼 앙증스럽게 생긴 작고 깜찍한 것으로서 나의 유년 시절의 지정 밥그릇이었다.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돌이 방금 지난 나를 업고 친정 나들이를 가셨는데 그때 엄마의 할머니 즉 나의 외증조할머니께서 친정에 왔다가 쇠붙이를 가지고 돌아가면 아이가 무탈하게 자란다고 하시면서 이 놋대접을 주셨다고 한다. 이렇게 이 놋대접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의 성장과 연결된 인연의 고리가 되었고 기억에 없는 외증조할머니의 자상하신 성품을 느껴보는 실물이 되었다.

광복 초기, 당장 먹을 것이 없어 할아버지의 유물인 두 권의 의서(?)까지 좁쌀 한 되와 바꾸면서도 이 놋대접만은 다치지 않으셨다는 엄마, 아마도 엄마는 모름지기 이 놋대접을 나의 건강을 지켜주는 보호신쯤으로 여기신 듯싶다.

내가 크면서 식기를 사발로 바꾸게 되자 엄마는 이 놋대접을 볏짚수세미에 벽돌 가루를 묻혀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아 찬장 서랍에 장중보옥처럼 간수하시었다. 그런 놋대접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으랴.

이민 1세인 외증조할머니께서 살길을 찾아 괴나리봇짐을 이고 두만강을 건너오실 때 가슴에 품고 오신 놋대접, 손녀인 나의 엄마의 손을 거쳐 지금은 나의 재산이 된 놋대접, 조상의 기원을 담아 4대를 전해오면서 백년 풍진 세월을 이야기하는 놋대접임에랴.

엄마의 인두는 전기다리미가 나오기 전까지 엄마의 세간 필수품이었다. 전기다리미가 유행되면서 엄마는 이 인두를 기름종이에 싸서 농짝 밑에 감추어두시었다. 지금은 민속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옛날 인두를 엄마는 한사코 버리지 않고 보관하신 것이다.

인두란 우리네 앞 세대 여인들이 오랜 세월 천의 구김살을 펴거나 옷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던 도구이다. 엄마는 매번 다림질을 할 때면 이 인두를 화롯불에 꽂았다가 꺼내어 엄지와 식지로 찬물을 튕겨보고 뜨거운 정도를 가늠하신 후 혼솔을 꽁꽁 눌러 바로잡아 놓으셨다.

무쇠로 만든, 바닥이 반질반질하고 한 자가량 되는 쇠자루에 나무 손잡이가 달린 이 인두는 엄마가 경주 김씨 가문에 시집와서부터 쓰던 것이라고 하니 적어도 70년을 우리 집에서 살아온 셈이다. 가난을 밥 먹듯 하던 구질구질한 세월에 한 가정의 옷만이 아닌 마음까지 반듯하게 다려주시던 엄마의 인두! 지금 이 인두는 놋대접과 함께 가난 속에서 깨끗하고 바르게 살아오신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은기 작.

<아기 곰의 꿈>

28×26cm

Oil on canvas / 2012

한생을 선량하고 반듯하게 살아오신 나의 엄마,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해코지되는 일은 손톱만치도 할 줄 모르신 나의 엄마, 그렇게 조용히 사시다가 운명하신 엄마께서 이 인두로 당신의 마음 갈피가 구겨지지 않게 누르고 또 눌렀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더러 이 인두로 생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세속에 부대껴 자꾸만 구겨지는 심령의 구김살을 하나하나 펴면서 사람답게 살라고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유물인 놋대접과 인두, 폐품수구원의 계산법으로 값을 매기면 단돈 10원도 안 되는, 돈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이 유물을 놓고 나는 꼭 값진 것만이 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집에 유물이 있다면 가난에 젖은 유물밖에 더 있겠는가?

엄마는 백 년이 넘는 놋대접 하나와 70년이 되는 인두 하나를 나에게 남겨주시었다. 나는 지금 국보(國寶)와는 비길 바가 못 되는 이 값싼 유형의 유품에서 값진 무형의 가치를 본다.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엄마의 체취와 심성을 느끼는 것이다. 빈궁 앞에서 머리 숙이지 아니하고 바른 금 하얀 가르마 하나 곱게 지켜오신 엄마의 조선족 여인의 삶을 읽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유물인 놋대접과 인두를 우리 집의 민속 골동품이요, 유형문화재라고 말한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다.

세상에는 앞으로 걷는 게도 있었다

정운용 80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나는 게를 무척 좋아한다. 옆으로 걷는 모습이 꼭 나와 같다.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오라 하면, 대답은 예스인데, 해가 저물면 옆으로 처져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보니 나와 비슷한 게가 애정이 간다.

게에 관한 웃지 못할 이야기가 생각난다. 옛날 국내 재벌 그룹의 K회장을 만났을 때였다. 그가 자랑하며 ‘게’ 포스터를 나에게 보이며 어때요? 물었다. 그 내용인즉 상부에 큰 게 한 마리가 우뚝 있고, 자그만 게 수십 마리가 밑에 그려져 있고, 포스터 표어는 ‘너희들은 옆으로 걷지 말고 바로 걸어라’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회장님, 이 표어는 잘못됐습니다. 게는 원래 다리가 옆으로만 걸어가게 구조가 되어 있어 바로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회장께서 즉시 포스터를 회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게들은 다리의 절의 폭이 넓어 사람의 무릎 관절같이 일방향으로만 구부러진다. 아무리 해도 앞으로는 전진할 수 없고, 자연스럽게 다리를 움직이면 옆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게가 좋아 나는 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현재 99마리를 모았다. 나무, 동,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모형, 브로치, 장난감 등 세계 각국의 것이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게는 30년 전 명동 입구 노점에서 산 걸어가는 게이다. 세계에서 움직이는 게는 이것뿐이다. 한국 사람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이 게는 나의 보물 제1호이다.

게를 좋아하다 보니 게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게는 한국, 일본 근해에만 약 1,000종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의 게 종류 중 5분의 1에 달한다. 게는 교미 후 약 3주가 지나면 암게는 큰 밀물 때, 살던 곳을 떠나 바다로 대이동을 한다.

모든 암게는 알을 안고 있다. 한 마리의 암컷이 2~3만 개의 알을 안고 있다고 한다. 바다의 바위밭에 모인 게들은 바위를 꼭 잡고 알을 방출한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암게를 기다리던 숫게는 다시 교미를 서두른다. 한 마리의 암게는 1년에 수회 산란한다.

김은기 작.

<프로포즈>

73×61cm

Oil on canvas / 2012

게는 어릴 때부터 성체가 되어도 탈피를 되풀이한다. 등딱지가 딱딱하여 이것을 벗어버려야지 성장할 수가 있다. 탈피에는 3분에서 5분 정도 소요된다.

게를 잡은 경험도 있다. 베트남 해변가에서 컴컴한 밤에 게를 잡으러 갔다. 생닭 모가지를 쇠사슬에 묶어 바다에 넣고 약 15분간 플래시로 비추어 보면 닭 냄새에 게가 난리가 난다. 이놈, 저놈, 큰놈, 작은놈들이 닭 모가지를 뜯으며 탐색을 한다. 덩치가 같은 놈은 서로 싸운다. 나는 물고 늘어진 게들을 물통으로 옮기기만 한다. 삽시간에 물통이 꽉 찬다.

어느 날 일본에 앞으로만 걸어가는 ‘병정게’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구주 남쪽의 섬 아마미오-지마(奄美大島)에 있는 친지 기이레례이꼬 여사가 ‘병정게’를 소개하며 자기가 사는 섬에 있다는 것이다. 병정게가 이동할 때면 파란 등딱지가 햇살을 받아 더욱 빛이 나고, 꼭 갯벌에 보석이 아로새긴 것 같다고 했다. 바닷물이 빠지면 무수히 떼를 지어 다니며 모래나 흙탕에 포함된 유기물을 입으로 가져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게가 바로 병정들처럼 앞으로 걷는다고 한다. 옆으로 걷지 않고. 그렇다! 세상에는 옆으로 걸어가지 않고 바로 직행하는 게도 있었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바로 걸어갈까 싶다.

그 청년, 영구에서 장동건으로 변하다

홍수연 치과 의사, 서울이웃린치과 원장

그는 78년에 태어난 젊은이다. 준수한 외모에 사회단체 활동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1년 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이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은 20대의 풋풋함을 겨우 벗어난 것 같은데, 치과 병원에 처음 내원했다는 그의 입 속은 70대인 내 아버지보다도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만성 성인형 치주염이라 부르는 잇몸 질환으로 흔들리지 않는 치아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방사선 사진 촬영을 했더니 치아를 붙잡고 있는 뼈(치조골)가 위 앞니의 경우 치아 뿌리 끝에서 겨우 2-3mm밖에 남아 있지 않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게다가 앞니가 많이 벌어져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장동건인데, 입만 벌리면 영구 같았다. 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우선 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울었다. 나도 먹먹해져서 처음 보는 젊은이 앞에서 눈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제안했다. 어차피 치아를 모두 잃을 각오를 하고 한번 도전해보자. 각각의 치아들이 견디기 어려운 힘을 받는 경향이 있으니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묶어보자. 기왕 묶는 김에 앞니들은 위치를 움직여서 보기라도 좋게 해보자. 물론 교정 장치가 보여서 신경 쓰이기는 하겠지만, 이를 닦기 편한 쪽인 바깥쪽으로 붙여서 한번 해보자. 10개월가량 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그때는 포기하자.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 동안 그와 나 사이에는 갑작스런 오기와 팽팽한 긴장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기초적인 잇몸 치료부터 시작했다. 치석제거, 치근활택, 치주소파, 부분판막…. 말이 쉽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병원에 와서 마취 주사 맞고, 한 사이클을 마치는 데 2개월 이상 걸리는 치주 치료의 단계를 통과하기는 정말 힘들다.

차라리 어느 부위가 너무나 아프다든지, 생사가 갈리는 질환이라면 모를까 평소에는 아무런 증상도 없다가 치아를 상실할 지경까지 되어야 뭉근한 통증이 있는 잇몸병을 치료하는 데 이다지 노력을 해야 하는 건가? 많은 치과 환자들이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결국은 치아를 다 잃고 후회하는 것을 나는 20년 동안 많이 보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기초 치주 치료를 마쳤다.

다음은 교정 치료의 단계였다. 위아래 앞니 12개에만 교정 장치를 붙이고 월 1회 병원에 와서 힘 조절을 해주는 치료이다. 성인들에게 치주를 위한 부분 교정 치료를 할 때는 치아의 배열이 아름다워지는 것보다는 치아가 움직이다가 빠져버리지는 않을지 무척 신경이 쓰인다. 결국 성패는 교정 치료 기간 동안 환자가 얼마나 이 닦기에 목숨 걸고 도전하는지, 의사가 이를 어떻게 배려하는지에 좌우된다.

환자와 만나는 건 월 1회이므로 나머지 29일 동안 그가 이를 잘 닦는지, 장치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병원에서는 알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결국 환자의 노력이 치료를 완성해가는 게 성인 치주 교정의 핵심이다. 의사가 할 일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공감 정도라고나 할까?

김은기 작.

<기다림>

53×53cm

Oil on canvas / 2012

그리고 10개월 만에 교정 장치를 제거했다. 유지 장치를 붙이고 치료 전후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들을 채득했다. 1년 전 처음 내원했을 때의 방사선 사진과 이번에 찍은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았다. 정말 놀라웠다. 치조골이 전반적으로 3mm 이상씩 새로 생겼다. 전체적으로 치조골이 수평으로 새로 생기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행복한 결과가 생겼을까?

그는 죽을 각오로 하루 세 차례 열심히 이를 닦았을 뿐이라고 한다. 가진 건 젊은 몸과 의지뿐인데 그 사소한 이 닦기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 앞으로 뭘 할 수 있나 싶더란다.

참 대단하다. 아니, 대견하다. 그리고 이런 ‘보물’ 같은 환자들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영구에서 장동건으로 변한 그의 웃음이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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