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용기가 없어 때로는 쑥스러워서 못 했던 그 한마디. 한 해를 보내며 글로나마 전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부지, 그때 그 영수의 점수가 말입니다

전원일 59세. 소설가, 시인. 경남 밀양시 내이동

나는 시골 대농가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면 소재지 중학교 생물 선생님이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소 풀 먹이는 목동(牧童)이 나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 이유는 선생의 아들로서 항상 공부는 물론 언행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아버지의 독려로 나름 무거운 마음의 짐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소를 몰고 산에 가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면서 그런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목동이었던 ‘영수’라는 두 살 아래 아우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나와는 달리 부모님으로부터 미움을 엄청 받는 아이였다.

반에서 꼴찌를 맴돈다며 가문의 망신을 시키는 아이로서 늘 야단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영수가 모든 게 꼴찌는 아니었다. 영수는 몸이 비호처럼 날쌔어서 닭쌈왕이요, 혹말타기왕이요, 딱지치기왕이요, 구슬치기왕이었고 목동들 중에서 유일하게 소를 타고 가는 위풍당당 아이였다. 그렇게 산에서는 ‘왕’이었던 영수는 집에만 들어가면 늘 기가 꺾인 졸(卒)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주인에게 내몰린 개처럼 눈치만 슬슬 살피는 아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영수가 안쓰러워서 어떻게 하면 ‘목동의 왕’에게 집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게 해줄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해답(?)이 나왔다.

우리는 3월말고사를 쳤고 아버지는 채점하기 위해서 시험지를 자전거에 가득 싣고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1, 2학년 시험지 채점을 맡겼다. 그 안엔 영수의 시험지도 있었다. 나는 내 방으로 시험지를 들고 와 문고리를 잠그고 1학년 5반 김영수 시험지부터 펼친 후 답안지와 맞춰 떨리는 손으로 오답을 지우개로 지운 후 정답을 써주었다. 맞는 것은 두서너 개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틀려 있어서 손에 진땀을 흘리며 한두 개 정도만 틀리게 하고 모조리 고쳐주었다.

그 시절만 해도 시험지 종이는 물론 지우개의 품질도 형편이 없어서 지울 때마다 종이에 구멍이 뽕뽕 생겨 애를 먹었고 아버지한테 발각이 날까 두려워 빨강색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큼직하게 그려놓았다. 그렇게 영수의 성적은 단연코 <수>가 되었다.

다음 날 저녁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우리 마을 누구 집 아들이 공부를 잘하냐고 물으셨다.

“밀양댁집 아들 영수 그놈이 공부를 참 잘합니다.”
“영수가 공부를 잘한다꼬? 그놈은 늘 구슬치기만 하고 공부는 안 한다꼬 저거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던데?”
“아닙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제가 맡고 있는 생물 과목은 두 개만 틀리고 96점 받아 이번에 <수>를 받았습니다.”
“하하하. 영수가 늦재주가 터졌는가베. 그래 크는 아이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기라.”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곧장 영수 집을 찾아갔다. 나는 영수의 손을 꼭 잡고 엊그제 내가 저질렀던 일을 말해준 후 앞으로 생물 과목만은 열심히 하라고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는 영수가 하루아침에 학구파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아버지가 보는 참고서에서 중요하다고 빨강색을 쳐 놓은 부분을 적어 그것을 집중적으로 외우게 함은 물론, 영수와 개인적으로 둘이 앉아 문답식으로 묻고 답하며 예행 풀이 연습까지 했다. 그럼에도 1년간의 나의 노고는 겨우 절반 정도의 성적을 거두는 데 그쳐 나의 음밀한 공작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후딱 지나버렸고 나는 40킬로미터 떨어진 부산에 있는 인문계 고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 고향에 왔을 때, 소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가 중2가 된 영수가 소나무 아래에서 영어 단어장을 들고 중얼중얼 외우고 있는 걸 보았다. 영수는 사범대학에 진학해서 생물 선생님을 할 거라고 했다. 순간 얼마나 감동했는지.
하지만 영수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 영수의 성적은 여전히 미, 양, 가뿐이었다. 영수에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부턴 더 이상 공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리고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영수는 결국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건설 회사 사장을 하고 있다.

어린 마음에 영수를 도와주고자 했던 행동은 방법은 잘못됐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영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르게 만들고, 영수에게도 삶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성적만으로는 알 수 없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걸 성적으로만 판단하려는 사회의 잣대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수가 생물을 참 잘했어. 그놈은 생물 선생이 되어야 했는데 저거 아버지가 애를 무조건 야단만 치갖고….”

한평생 고향 김해에서 살며, 중고교 교장을 역임하셨던 아버지, 이제 팔순을 넘기고 기억력도 쇠락해진 아버지는 지금도 가끔 영수 이야기를 하신다.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그 사건을 이제나마 고백하고 싶다. 아버지 40년 만에 고백합니다. 아부지, 그때 영수의 생물 점수는 말입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이영철 작.

<푸른 마을의 동화> 117×7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0.

소록도, 이번 겨울에 또 만나요

김한빛 24세. 대학생. 전라북도 익산시 신동

지난겨울 국립소록도병원 행복병동으로 2주간 자원봉사를 가게 되었다. “니가 그동안 받은 사랑만큼 세상에 나눠줘야 하지 않겠냐”는 부모님의 권유로 가게 된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 두 번째니까 더 잘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비슷한 자리에 계신 할머니들, 간호사, 물리치료사 선생님들, 똑같이 돌아가는 병동 시간표인데 그곳에 서 있는 나는 또 다른 낯섦과 대면했고 또 어쩔 줄 몰라 했다.

봉사 마지막 날, 조그마한 내 손이 아기 손 같다고 꼭 쥐어주시고 날마다 우리가 물수건으로 세안시켜 드린 것처럼 내 손을 문질러주시며 제비처럼 돌아오라던 상기 할머니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날 아련하게 하고 잠 못 들게 한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성격이 불같으면서도 사랑에 올인할 줄 아시는 명정순 할머니. 할머니의 과거사를 들은 뒤로는 미워할 수도 짜증이 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할머니 유년 시절, 할머니의 할아버지는 술꾼에 폭력을 쓰는 사람이었고 할머닌 아무것도 못 하고 이불만 쓰고 우셨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라 살림살이 다 빼앗기고 노동 착취를 당하셨고, 한센병 이후 이곳에 오실 때 마흔 즈음 만난 남자는 정부에서 준 옷가지 등을 빼앗아갔고,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인 손녀딸은, 엄마를 일찍 여의어 보육원에 있다고. 할머니는 운동을 하면서 너무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하시는데 나만 눈물이 났다. 바보같이. 내가 가지지 못한 진정한 솔직함을 지니고 있으셔서 부러웠다. 난 솔직하지 못하니까. 진짜 나도 날 잘 모르겠으니까.

이런 내가 행복병동에서 찾은 건 무엇일까. 내가 찾아낸 건 사랑이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 해본 적도 없고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감정 느끼지 못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 말씀을 들으면 상대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본인에게는 그것보다 귀한 건 없겠다 싶다.

정순 할머니에겐 손녀딸이, 최명순 할머니에겐 따님이, 조봉순 할머니에겐 손자 증손자들이, 김보원 할머니껜 남편이 그런 존재인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가정이, 함께하고 있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너무 많은 행복을 갖고 있어서 몰랐던 나는 눈이 안 보이시는 할머니보다 눈뜬장님이었음을 알았다.

마지막 날, 두 번째니까 안 울 자신 있었는데 학기가 끝나면 또 오냐는 질문, 수고했다는 말씀들에, 제비처럼 돌아오라는 말씀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할머니 꼭 기억할게요,라는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했는데 사실은 나한테 한 말이었다. 또 돌아가서 생활하다 보면 잊어버릴텐데.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껜 손 한번 제대로 잡아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심지어 같이 사는 가족에게도 아쉬움과 불만이 있는데, 내가 잡고 있는 이 할머니의 얼굴, 손, 성격, 마음을 다 담을 수 있을까. 너무도 불안해서 자꾸자꾸 되뇌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 이곳에 와서 처음 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 믿어보고 싶어졌다.

설날 집에 못 가서 어떡하냐고 걱정하시며 미안하다 하시는 경순 할머니께 부모님 허락을 받았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훌륭한 분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칭찬받은 것보다 한 백배 천배는 더 기쁜 묘한 경험을 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오히려 난 가족의 사랑을 잘 못 느낄 때가 많았는데 할머니의 부모님 칭찬에 왜 내가 우쭐해지고 행복해진 것일까.

신기하고 중독성 있는 이곳 소록도. 아직은 십 년 넘게 오신 근재 삼촌처럼 마음의 고향이라 딱 잘라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이곳에서 지낸 시간들, 내가 가진 마음들을 돌이켜보면 조금씩 나에게 의미가 생겨가는 곳임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이곳에서 만난 윤영 대표님, 공재 오빠, 인선이, 성하, 성현 오빠, 대은 오빠, 성중 오빠, 영우, 윤미, 예희, 도경이 등등. 거금대교도 걷고, 마피아에 카드 게임, 바지락도 캐고 걸어서 간 녹동, 서로 웃고 떠든 기억들. 이곳이 아니었음 절대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유쾌하고 착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낸 이 시간들.

또다시 겨울이 찾아오는 지금, 그때의 마음을 솔직히 많이 잊어버린 듯해서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또 그때 정말 가족처럼 대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해보기 위해 쑥스럽지만 용기 내서 말해본다. 모두, 이번 겨울에 또 만나요.

이영철 작.

<분홍꽃비> 45.5×33.4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

아빠는 키만 작을 뿐이란다

박재영 전북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

키가 큰 사람은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감정이 있는데, 그게 바로 키 작음의 비애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 번호를 키 순서로 붙였답니다. 반 배정을 받는 학기 첫날에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키 순서로 줄을 세웠지요. 그러다 보니 저는 늘 1, 2번을 달았답니다. 1번을 면해 보려고(이게 1등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몇 명 뒤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선생님은 그걸 금세 알아채시고, “야, 너는 키도 작은 놈이 왜 거기 서 있어! 빨리 앞으로 안 나와!”라고 짜증 섞인 고함을 치곤 하셨답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키가 크대요. 그렇다고 키가 장대처럼 쑤욱 자랐다는 것은 아니고, 평소 1번 자리에서 8번 자리 정도로 이동했다는 뜻이지요. 그대로만 꾸준히 성장한다면 대한민국 평균치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중학교 2학년 이후, 내 키는 백두산 천지의 수위만큼 변화가 없습니다. 입이 짧아서였을까요? 못 먹어서 그랬을까요? 운동이 부족한 탓일까요? 아니면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요? 아무튼 잘 자라던 키가 뚝- 하니 멈춰 서 버렸답니다. 그리곤 오늘날까지 한 치의 변함없이 그 높이를 지키고 있네요. 내 키도 꽤나 지조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지조만 높은 키 덕분에 결혼식 때 난감했던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신부의 키가 저보다 5만 원짜리 지폐의 길이만큼(가로가 아니라 세로입니다)이나 크거든요.(제가 얼마나 능력 있는 남자인지 이제야 아시겠죠?) 신부의 키가 크다 보니 웨딩 사진도 앉아서 찍어야 하고, 함께 서서 찍을라치면 주변에 있는 돌이라도 가져다 신부 뒤에 놓고(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말입니다)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 돌 때문에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태연한 체 서서 멋진 포즈를 연출하기도 했지요. 결혼식이 있던 날 신랑을 배려한 신부는 신발을 신지 못했답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키가 커야 하냐고요? 도대체 이런 관념은 누가 만든 겁니까? 남자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은 여자가 만든 걸까요? 키가 크면 힘도 셀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상상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내세울 것 없이 키만 큰 남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작한 아이디어인가요? 아무튼 저는 이 관념 때문에 괴롭습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청춘들의 엉덩이만큼이나 열심히 흔들리는 버스의 손잡이를 잡을 때도 그렇고, 터질 듯한 김밥 속 같은 지하철에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모델처럼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학생들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도, 저는 작은 키 때문에 난감하기만 합니다.

딸이 세 살 때는 “아빠는 왜 그렇게 키가 커?”라고 묻곤 했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데요. 급기야 며칠 전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러데요, “아빠는 왜 그렇게 키가 작아?” 그래서 내가 아니꼽게 대답했지요. “그래도 내가 너보다 크잖아!”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잇-” 하고 음흉한 썩소를 날립니다.

그래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쪼그려 앉아 이렇게 말했답니다.

“사랑하는 딸아, 세상에는 키가 작다고 못할 일이 없단다. 키보다는 사람 됨됨이가 더 중요하거든.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알겠지?

이영철 작.

<행복을 주는 아이> 41×5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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