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스티벌은 언제였나요? 우리 삶은 늘 축제입니다.

작은 드로잉 수첩이

가져다준 기적

이은경 47세. 경기도 과천

역경은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된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늘 똑같이 평온한 삶이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 날들이 얼마나 행복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삶의 역경이 시작되었다. 경제적 무능력, 알코올 중독, 권위적인 분위기, 지인의 자살, 치매…. 결혼과 동시에 내가 감내해야 했던 여러 가지 상황들로 어두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속내를 털어놓곤 했지만, 어느 순간 나에게 다시 돌아와 비수로 꽂혔고, 자존감은 더욱더 낮아져갔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하며 불평불만은 늘어갔다.

미술 교육을 전공한 나는 일반인들에게 그림 가르치는 일을 20여 년간 해오고 있었다. 회원들에게는 밝은 척 그림을 가르쳤지만, 하루하루 괴로운 시간들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내 인생에 변화를 준 한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 봄 그림 가르치는 곳의 한 회원님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선생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육십 평생 남편에게 무시당하며 살았는데, 드로잉 수첩에 자신이 그린 걸 본 남편이 그게 뭔지 물으며,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듣는 순간 행복 바이러스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드로잉 수첩은 화가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간단한 스케치나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작은 손바닥 스케치북인데, 회원들에게도 가지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나부터도 그림을 가르치는 자세가 달라졌던 거 같다. 아~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대화를 나누는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겠구나. 그다음부터는 각자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감싸 안아주고 격려해주는 시간이 늘어났다. 몰랐던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가면서,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너도 그랬구나.’ 서로 치유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나 역시 드로잉 수첩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그림일기처럼 내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화가 나도, 기쁠 때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우울할 때도, 여행을 가고 싶을 때도, 흔들리는 버스에도 몸을 맡기고 쓱싹쓱싹… 그렸다.

그리면서 예전엔 몰랐던 걸 깨닫게 되었다. 말은 예쁘게 포장할 수 있지만 그림은 자기도 모르는 심연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 언어이면서 본능적인 언어라는 걸.

그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면서 그동안 이 소중한 걸 놓치고 살았구나… 하는 후회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사랑받지 못했다며 서운해했던 것이 부끄러워졌고, 원망해 왔던 것들 또한 남 아닌 나의 탓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과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했는지, 행복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 마치 순례자가 순례의 길을 기도하며 가듯이 천천히 내 안의 아이와 대화를 하며 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의 작은 드로잉 수첩은 내 인생의 역경들이 하나하나 경력으로 쌓이면서 재창작으로 이어졌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렇게 내 마음의 문이 점차 열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다가가게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을 보다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어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드로잉 수첩의 그림과 사연들을 올리기도 하고, 코끼리 커피 그림을 프로필 창에 올리기도 했다. 코끼리를 그린 이유는 통통한 걸 좋아하기도 했고, 따뜻하고 귀여운 동물인 코끼리가 우리 아이의 태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커피 역시 소통의 도구가 된다고 생각해 좋아하는 것들을 접목해 보았다.

코끼리를 그리며 코끼리가 또 다른 나인 양 말을 걸며 ‘괜찮아 괜찮아’ 토닥토닥 위로해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올해 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코끼리 그림이 전시 기획자의 눈에 띄어 전시회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전시를 하면서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어엿한 작가로서 그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까지를 이겨내지 못했다면 역경이 경력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힘든 시기를 보내시는 분들에게 조금만 더 이겨보라고 응원하고 싶다. 조금만 더 가보면 인생의 멋진 페스티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의 10분 축제

윤은노 39세. 젠나무민북스 편집장.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남편은 오늘도 터키식으로 아침을 차렸다. 터키 차, 소금에 절여 짭짤한 까만색 올리브, 오이와 토마토, 참치(팩), 내가 만든 빵. 때로는 삶은 달걀이 추가된 이 식단이 남편이 365일 먹는 아침 식사다. 반면 나의 아침 식사는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도 나와 남편 그리고 사랑스런 우리의 아이들 두 명은 식탁 앞에 앉았다.

사건은 7살 딸이 갑자기 터키 차가 담겨 있는 뜨거운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자기도 어른처럼 뜨거운 주전자로 직접 차를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딸의 이름을 외쳤다. 딸은 남편의 저지에 더욱 손잡이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나설 때이다. 하지만 나도 오늘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다. 물론 딸이 다칠까 봐 얼른 상황을 정리하려는 남편의 마음은 알지만 어린 딸에게 차근히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그 행위를 저지하려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결국 왜 아이에게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주지 않느냐고 남편에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참고로 남편은 터키와 한국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 생활 17년이 넘어가는 한국말을 매우 잘하는 터키 사람이다.

어찌 됐건 딸아이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주전자에서 무사히 차를 따랐다. 하지만 난 이미 더 이상 식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르짖는 나이지만 오늘은 내 마음이 긍정적인 에너지가 바닥났으니 충전해 달라고 신호음을 보내고 있었다.

잠깐 발코니 쪽을 보았다. 햇빛은 찬란하고 날씨는 매우 좋았다. 자연을 느끼고 싶었다. 숲 속을 걸으며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바람을 포기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그리고 사춘기 때 하던 행동을 아직도 하는 39살의 나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잠깐 잤나 보다. 3살인 아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미 오후 3시. 일어났다. 커피를 타려고 가스 불을 켜는데 남편이 다가와 “잘 잤어?”라고 묻는다. 내 기분이 나아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을 건네는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잠으로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야!”라고 야멸차게 답해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답변에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조심스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말을 건넨다. “엄마, 기분 괜찮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내가 키우는 식물 친구에게 물을 줘야 하거든.” 하면서 작은 통에 물을 담아가지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왔다.

커피를 타고 갑자기 딸아이가 키운다는 식물 친구가 보고 싶어져 다시 물을 받아 들고 나가는 아이를 따라가 보았다. 빌라에 사는 누군가가 심어놓은 걸 딸아이는 자신의 식물 친구라고 정한 것이다. 밖에서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속으로 “Why Not?”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면서 용기가 생겼다. 대문을 열자마자 마치 높은 탑에 갇혀 있던 라푼젤이 처음 밖에 나온 것처럼 자유를 느꼈다.

7살, 3살 아이들을 둔 엄마에게 대문 밖을 자유롭게 나서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아는 분들은 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100% 햇볕이 내리쬐는 건너편 담에 몸을 살짝 기대고 눈을 감았다 떴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신선한 바깥 공기가 몸 안을 정화하자 어느새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지중해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햇빛이 찬란한 하얀색 집들 중 한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파란색 머그컵에 담겨 있는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그 순간을 만끽했다. 더 이상 햇빛 생각이 안 날 정도로 햇빛을 만끽한 나는 딸아이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서 3초도 안 되는 거리로, 단 10분 만에 햇빛과 행복을 내 몸과 영혼에 충전하는 방법을 알게 된 나는 환호했다. 집으로 들어온 후 딸아이를 껴안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사랑스런 표정으로 “뭐가, 엄마?”라고 물으며 나를 쳐다보는 딸아이에게도 나의 행복이 전해진 것 같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밥을 먹다 갑자기 나는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사랑해”라고 말했고, 남편도 “나도 사랑해”라고 답했다. 우리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나는 오늘 노력하고 시도한다면 삶을 매 순간 축제같이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오늘을 축제로 만들면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오늘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인생의 전환점 돼준

고마운 친구, 축제

안국현 43세. 축제닷컴 대표.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

‘어떤 일이든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해야만 하는 일에서 하고 싶은 일, 재미있는 일로의 전환. 나에게 그런 계기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2008년 4월, 당시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하고 있던 내게 한 분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축제를 잘 홍보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라며 조언을 구해왔다.

인천의 인천중구문화축제를 기획하시던 분이었다. 축제? 소프트웨어 개발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나에게 축제는 전혀 생소한 분야였지만, 도움을 드리기 위해 찾다 보니 우리나라에만 1년에 1,300개가량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렇게 축제가 많다니, 깜짝 놀랐다.

태백산눈축제,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진안군마을축제, 함평나비대축제, 담양대나무축제, 춘천마임축제, 고창청보리밭축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하는 축제, 각 시나 군에서 기획하는 축제, 지역 문화제, 마을 단위 축제 등등 매주 전국적으로 20개씩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된 농사일에 앞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풍류를 즐기는 풍류 사회였는데 그러한 전통이 그렇게 발전해온 것 같았다.

이런 좋은 축제들을 한눈에 보기 좋게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어떨까, 나처럼 전혀 몰랐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5개월간 준비를 해서 2008년 10월에 축제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오픈했고, 사이트를 홍보하기 위해서 ‘축제 이야기’라는 계간지도 발행하게 되었는데, 반응이 좋아 2010년 1월부터는 월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봄에는 특히 축제가 많은데 요즘 같은 때는 매주 지방 축제에 참석한다. 하루에 1,000km를 달려본 적도 있다. 여수국제청소년축제, 하동야생차문화축제, 김해분청도자기축제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축제를 찾아다니다 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곳이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이렇게 살 수 있는 나의 삶이 참 감사하기도 하다.

축제를 다니며,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취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충북 옥천에 농수산물축제를 운영하는 군 관계자 분이다. 사실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축제를 즐길 수 없다. 제대로 된 축제를 만들기 위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티는 안 나는 일이라, 기피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분은 “꼭 이 축제를 발전시켜서 지역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준비를 하였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도 감동을 받아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고, 옥천 포도축제에서 농수산물축제로, 그리고 지금은 옥천의 대표적인 축제로 변모했다. 담당자의 열정 하나로 그렇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참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는 재작년 봄에 참석했던 청산도슬로우걷기축제이다. 6시간 30분을 차로 달려, 다시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해 참석한 축제. 바다와 산의 조화, 여유롭고, 정겨운 마을 주민들, 참가하는 사람들의 온화한 표정…. 그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걷는 것만으로도 축제가 될 수 있구나, 알려준 축제.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포기할까, 할 수 있을까 조급했던 나. 뭐든지 빨리 해야 하고, 빨리 결론을 내야 마음이 편했던 삶. 그런데 그곳에서 느리게 걸으면서, 인생을 그렇게 빨리 안 살아도 되겠구나, 이렇게 느리게 사는 것이 인생을 축제로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그런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축제는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선물해준 고마운 친구다. 매달 한두 번씩은 아이들과 같이 축제를 찾아다닌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해진다.

5월에는 정말 많은 축제들이 열린다. 가족과 함께 좋은 축제를 찾아서 떠나보면 좋을 것 같다. 그곳에는 또 다른 희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