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꾸만 붙잡아두던 것들을 시원하게 버린 사람들의 버렸기에 얻은 자유와 평화, 그 유쾌한 이야기들.

 

머릿속 잡념들을 TV 전원 끄듯 꺼버리다

이영순 43세. 공무원. 대전시 서구 둔산동

살아 있다는 자체가 참 힘들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기에 먹고 입어야 했고 돈도 벌어야 했고, 자식 교육도 시켜야 했다.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서 청소하고, 반찬 만들고….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일상들이 나에게는 참 버거웠다.

배 과수원집의 3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기본적인 체력이 너무 약했었다. 부모님조차 나에게 그 무엇도 바라는 마음이 없으셨던 거 같다. 그저 내가 숨 쉬고 살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대견해하신다 할까. 과수원이 엄청 바쁠 때에도 나한테 맡겨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맡겨지더라도 “엄마 힘들어” 하면 바로 “쉬렴!”이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렇게 보호를 받으며 살다가 결혼을 하고 직장 생활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첫아이를 낳을 즈음,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집안일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남편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자신의 공부만 할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부하 직원의 일까지 하다 보니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앉아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누워 있으면 땅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직장 생활이 보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가 나의 위치를 낮게 취급했고, 항상 대접을 받으려고만 했다. 내 존재 가치가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하나? 마음이 참 힘들었다.

병가를 내고 허리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복직해야 했는데,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싶어 눈앞이 깜깜해지고 가슴이 꽉 막혔다. 이런 힘듦 속에 있을 때 친구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래, ‘과감하게 버려 보자!’ 생각했다. 살면서 쌓아온 기억들, 그로 인해 뼛속 깊이 배어버린 관념과 관습들,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없게 하는 것들을 버리는 수련이었다. 집중 수련을 마친 후 생활 속에서 늘 수련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 내 나름대로의 방법도 생각해냈다. 내가 TV를 보고 있을 때 TV 속 사람들이 가짜이듯이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TV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전원을 꺼버리는 것이다.

‘난 여태까지 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어!’라는 생각이 들면 내 머릿속의 TV를 끄듯 꺼버렸다. 그렇게 머릿속의 잡념들이 사라지니 마음도 편해지고, 힘들었던 일도 점점 수월해졌다.

직장에서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여길 때, 자존심이 상하고 열등감에 시달릴 때, 이건 가짜지 하며, TV를 끄듯 그 생각을 버렸다. 집안일을 할 때도 이 일을 했더니, 너무 피곤해! 하는 마음을 껐다. 이걸 하고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하는 부담도 하나 둘씩 지워나갔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리고 집착, 남편이 나의 부모처럼 모든 걸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 때도 역시 내 머릿속의 TV 전원 스위치를 꺼버렸다. 그렇게 내 머릿속의 쓸데없는 잡념들을 TV 전원을 끄듯이 계속 꺼나갔다.

마음이 가벼워진 만큼 미워했던 사람도 항상 좋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는 감정들에 이끌리지 않고, 마음 없이 대하다 보니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 되어가는 듯했다. 버리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싶다.

하늘의 해, 달, 별들이 ‘하루 종일 비추고 있으려니 힘들어’라는 마음 없이 그냥 있듯이, ‘그냥 산다는 것’,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전미경 작. <티움> 모시에 나뭇잎, 풀꽃. 36×33cm. 2005.

 

버렸다, 식탐(食貪)!

국승철 59세. 자영업.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워낙 식성이 좋아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던 나는 항상 식탐에 시달리는 편이었다.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한 환경에서 못 먹고 자랐던 우리 세대의 한이라고 할까. 음식의 질에 상관없이 일단 배가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음식을 남긴다는 걸 거의 죄악으로 생각했기에, 회식 자리에서도 뒤처리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덕분에 음식을 준비한 분들에게는 인기 짱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배가 부른데도 끝까지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배가 고플 때면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집에는 항상 먹을 것이 풍족하게 있어야 하고, 밥을 배불리 먹고도 또 다른 빵이나 후식을 먹어야 하는 나.

이렇게 먹을 것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먹는 것 앞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싶고, 먹을 것에 초탈하고 싶었던 나는 나중에 단식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몇 년 전,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그 기회가 왔다. 퇴직을 변화의 계기로 삼기로 한 나는 그 시작으로 식탐을 버려보기로 했다.

처음 단식은 아내가 먼저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하루하루의 몸 상태를 상담하고 지도받으면서 일상생활을 똑같이 하는 생활 단식이었다. 아내의 단식을 도와주면서 과연 나도 할 수 있을까를 은근히 염탐했다. 준비 단계를 거쳐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내의 단식 과정을 보면서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하루 종일 입으로 들어가는 건 생수와 죽염뿐이라 뱃속은 당연히 텅 비어 있어, 음식 냄새만 맡아도 환장할(?) 상황일 걸로 짐작했는데 아내는 너무도 태연히 아침저녁 가족들 식사 준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주는 게 아닌가.

‘저 사람에게 저렇게 독한 면이 있었던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큰일 났다, 이제 와서 결혼을 무르자고 할 수도 없고….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걸.’

아내는 단식을 시작하니까 식욕 자체가 없어져서 음식을 봐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이윽고 나도 단식을 시작하고서야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 역시 하루 종일 물과 죽염만 섭취하면서 일상생활을 똑같이 하고, 거기에다 의무 사항인 1일 30분 운동까지 하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느낌도 없고 음식을 봐도 먹고 싶다는 식욕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속이 비워지면서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단식을 하면서도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나가 술과 안주 대신 생수만 마시면서 ‘위하여!’도 하고 2차까지 따라가 분위기를 맞춰주니, 친구들은 “저놈이 저렇게 독한 놈이었냐”는 소리를 해댔다.

단식에 고비가 많다는데, 이상하게 나에겐 고비가 없었다. 3일 계획을 10일로 연장해 도전했다. 단식이 계속되자 그동안 과잉 섭취되어 내 몸 안에 쌓여 있던 온갖 독소들이 분해되면서 나는 냄새는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역겨웠다. ‘정말 몸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많이 먹기는 먹었구나.’

그저 입을 즐겁게 해준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내 안에 채워 넣기만 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비움으로써 내 몸 안에 쌓여 있던 해로운 물질들이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숙변이 나오고, 아랫배도 서서히 들어가고 10kg 정도 감량이 되었다.

단식은 나의 식탐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먹는 것을 다스려봤다는 것, 어떤 것을 한번 끊어봤다는 경험은 삶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3년 후에 또 한 번의 단식을 했고, 내년에도 다시 할까 생각 중이다. 몸이 비워졌을 때의 즐거움을 알기에 평소에도 적게 먹는 소식을 즐기고 있다.

 

전미경 작. <축제> 종이에 나무껍질, 씨앗. 24.5×28.2cm. 2006.

 

‘왕년의 나’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다

하영준 45세. 기업인. 베트남 호치민 12군

1993년, 내 나이 스물아홉 살, 대기업 그룹 내 최연소 현지 법인장으로서 카자흐스탄에서 근무했다.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여러 해외 국가들과 인연을 맺으며 나름 최고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잘나갈 줄 알았던 내 인생에 고비가 찾아왔다. 이후 개인 사업을 시작했는데, 약 10여 년 남짓 운영해오던 공장에 화재가 나서 완전히 다 태워 먹고, 지분을 넘기고 투자를 받은 회사가 기업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바람에 회사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이를 만회하고자 소송을 시작하였고 관련 관공서를 수도 없이 찾아다니며 2년여간을 진행하였으나 끝내 아무 득도 없이 합의를 보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항상 남보다 앞서 살아왔고, 옳다고 믿는 바를 이루어내지 못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동안에 내가 쌓아온 성취가 고스란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이제까지의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이 너무나 허무하고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과감히 그것들과 결별하고 인생의 제2막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면 어떻고, 누가 나쁜 사람이면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옛날을 곱씹으며 세상을 탓하고, 남들을 탓하지 말자, 이제 내가 가진 쓸데없는 자만심과 미래에 대한 욕망을 과감히 벗어 던져버리고, 지금의 굴욕과 두려움과 질시는 기꺼이 받아들이며 다시 준비하자고 다짐했다. 과거에 잘나갔던 것이 무슨 소용인가.

어느 회사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 회사는 해외 시장 개척 업무가 꼭 필요한 곳이었다. 나는 “그곳이 어디이건, 회사가 원하는 곳, 회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고, 베트남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다.

나에게 특별히 부여된 임무는 현지(LOCAL)업계 시장 개척이었다. 한 달간의 본사 교육 기간, 나는 내가 접해보지 않은 새로운 분야였기에 시작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도 뜨지 않은 사무실에 누구보다도 일찍 나와서 제품에 대한 공부와 베트남어를 공부해 나갔다. 저녁이면 생산 부서로 뛰어가 야근하고 있는 분들과 실제 제품 조립도 같이 해보면서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그리고 2010년 7월, 마침내 베트남에 도착하여 지사로 들어서니 정리되지 않은 기계들과 치우지 않은 나무 박스들로 뒤엉켜 마치 시골 농기계 판매점 같구나 했는데, 바로 정전이 되었다.

“음… 그래, 이제 베트남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모든 것이 낯선 환경, 하지만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처지가 바뀌었으니 아무리 하찮은 일, 아무리 큰일도 거리낌 없이 해나가야 했다. 현실적으로 현지 업계 개척을 위한 준비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현지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아닌 현지인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현지인을 같은 인간으로 대해 주는 것이 시작이었다. 먼저 조직을 개편했다. 최대한 현지인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주었고, 새벽부터 최소 5개~7개 업체를 매일같이 밤낮으로 방문하면서 영업의 기본기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3개월여가 지나자 직원들의 수도 늘었고, 이전에 4시 반이면 퇴근하던 현지 직원들은 저녁 7시가 넘어서까지도 내일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1년 상반기 베트남 판매 실적 1위, 판매 신장률 1위 등 엄청난 성과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으려 한다. 앞으로도 더 많고 힘겨운 과제와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나간 일과 옛날의 나, 나의 경력과 업적이 오히려 우리의 실행을 방해한다는 생각도 든다. 옛날에…, 왕년에…, 내가 무엇을 할 줄 아는데, 나의 경력은 어떠어떠한데, 그런 사실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미래를 옥죄일 뿐이다.

지금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아가느냐’는 ‘얼마나 <내가 왕년에…>를 버릴 수 있느냐’인 것은 아닐까.

 

전미경 작. <여명> 삼베에 나뭇잎, 풀꽃. 65×53cm.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