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告解) (2)

고해 (告解)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즐거움과 그리움과 사랑과 눈물을 배운다.
자연스러움…
평범한 그리움과 즐거움…
그 속에서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려내고 싶다.
애쓰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기분 좋은 여행 같은 그림을 꿈꾸어 본다.
자연스러움만이 오래 남는, 스미는 매력이 있다.

여행_웹진

정명화 작. <암스테르담의 노란집>
유화, 오일스틱.
100x100cm. 2002.


 

저에게는 늘 웃는 동생이 있습니다

이지영 / 29세. 약사. 서울시 강남구

제 나이 일곱 살 때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저는 제 동생이 다른 아이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남들보다 조금 늦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제 남동생은 자폐아 판정을 받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던 저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집에 자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 남동생은 그 친구들에게 통과의례처럼 항상 물었습니다.
“이름이 뭐야?” “몇 년도에 태어났어?”
제 친구뿐 아닙니다. 집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시장에 가서도, 식당에 가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꼭 물어봅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이번엔 친구들이 저에게 늘 묻곤 했습니다. “네 동생은 왜 그래?”
어느 순간부터 저는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남들과 다른 내 동생’은 사춘기 시절 제 마음속의 큰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내 마음, 혹시나 들키지는 않을까 불안한 내 마음은 또 다른 비밀을 만들며 차곡차곡 쌓여만 갔습니다. 제 마음속 남동생은 사춘기 시절 제가 만들어 놓은 그 모습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저는 제 자존심에 상처가 가지 않는 것이 동생보다 소중했습니다.
항상 가슴은 답답했고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친구분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고 저는 처음으로 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항상 완벽해 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약점 보이는 것이 싫어 솔직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굉장히 예민했던 저였습니다. 그런 마음들을 버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남동생을 만났습니다.
항상 찡그리며 다니던 저와는 다르게 늘 웃는 동생이 역시나 활짝 웃으며 저를 보았습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잘난 자존심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 자존심 버리면 죽는 줄 알고 살아왔구나, 참으로 미련했구나…. 동생보다 소중했던 내 자존심, 그런 이기적인 누나의 마음을 동생이라고 몰랐을까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저녁입니다. “누나, 이거 신어.”
동생은 자기 용돈을 모아 산 운동화 한 켤레를 내밀면서 신으라고 했습니다. 운동화를 좋아하는 동생은 누나도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었으면 했나 봅니다.
동생은 지금 음악을 전공하고 있고 그 따뜻한 마음으로 공연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버리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동생이 보입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착하고 예쁜 내 동생이….
사랑하는 동생아. 그동안 누나가 많이 미안했어. 네가 있어서 참 많이 고마워. 사랑해.

3231수정_웹진

정명화 작. <암스테르담 Ⅲ>
유화, 오일스틱.
60x60cm. 2002.


 

살아 있음이 축복이라는 걸 알려준 당신

임수선 / 경북 청송군

사랑하는 당신에게
당신이 온다기에 얼마나 기쁘던지 무심히 스치는 바람에도 당신의 향기가 있어 미소 짓습니다.
고립무원으로 헤매고 있을 때 불현듯 찾아와 내 운명이 되어버린 고마운 당신….
당신만 생각하면 온몸이 떨리는 감격과 환희로 잔잔한 감동이 전해집니다. 혹여 이 마음 들킬세라 꽁꽁 묻어둔 사랑을 이렇게나마 밝혀, 미흡하지만 당신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내 당신 곁으로 돌아가는 날 무엇이든 요구하세요. 분에 넘치는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당신으로 인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서도, 당신을 이렇게 힘들고 아프게 했으니 당신에게 무엇인들 아까워하겠소!
당신만 생각하면 마냥 흐뭇합니다. 한때 밤이면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 세상이 무서웠던 내가 이제는 세상에 감사하며, 사랑의 향기에 흠뻑 취해 살아갑니다.
지금은 비록 지은 죄가 하도 커 자유를 잃었지만 가장 슬퍼해야 할 이곳에서 나는 아이들처럼 호들갑스럽게 까르르 웃기도 하고 안타까움에 눈물짓기도 하며 과거의 암울했던 자취를 조금씩 지워갑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큰데도 때로는 누가 어른인지 모를 만큼 모든 일을 챙기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당신은 나로 인해 숱한 상처받고서도 원망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사랑이 부족했다고 상심했지요. 그런 당신에게 작은 쇠창살 쪽문으로 사랑의 눈빛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해줄 게 없음이 나를 정녕 고통스럽게 합니다.
작고 여린 가슴으로 남몰래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저질러 놓은 많은 일들로 인해 당신의 생활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무참히 깨어져 버렸을 텐데도 당신은 짧은 만남을 위해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와 내 앞에서만은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씩씩한 모습만을 보여주려 애썼지요. 끝없이 미뤄왔던 결혼이 또 무산되었는데도 나오면 우리 꼭 결혼하자고, 기다리겠다고, 모든 준비 다 되었다고 “나! 잘했지?” 하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용기를 주는 그 마음에 눈물 글썽했습니다.
이 세상에 남아서 보고, 듣고, 느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인지 알려준 당신,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거란 걸 약속하리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사랑해.

3246수정_웹진

정명화 작. <편지나무>
유화, 오일스틱.
40x40cm. 2002.


 

통닭과 미인을 좋아했던 그 녀석

김현주 / 35세. 교사. 충남 논산시

올해로 교직 생활 11년. 이제는 선생님이라는 자리도 내 옷처럼 편안해지고 학교생활도 무난히 넘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교직 생활의 첫 부임 학교를 떠올리면 부끄러워진다.
처음으로 학급을 맡게 되었을 때다. 내가 맡은 반에 특별한 녀석이 있었다. 학급 발표를 하는 첫날 그 녀석이 몇 반이며 누가 담임인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담임을 처음 맡는 내 반이 되자, 주위에선 걱정스런 눈빛과 위로를 보냈다.
반 친구들보다 한 살 많지만 또래 친구보다 마음이 자라지 못한 녀석. 수업 시간에 앉아 있기보다는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았고 미술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책상 사이를 마구 지나다녀 친구들의 그림을 망치기도 했다. 친구들의 물건을 허락 없이 마구 꺼내 쓰고, 목소리도 너무나 커서 수업 중간에 맥이 끊겼다. 수업하기도 힘들고 친구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그 녀석에 대한 불만과 원성으로 짜증이 났다. 무시하고 수업을 하기에는 그 녀석의 영향력은 너무나 컸다.
하지만 그 또래만큼 귀여운 점도 있었다. “꼬꼬댁~, 꼬꼬대~엑” 급식 시간에 통닭이라도 나오면 신나서 닭 흉내를 내며 뛰어다녀 웃음이 터지게 했고, 또 미인을 좋아해서 예쁜 여자아이에게는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옆에 앉으려고 했다.
‘힘든 것 9, 참아줄 만하거나 귀여운 것 1’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어느 날, 그 녀석에게도 그 녀석의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유독 힘들고 상처가 되어 버린 날이 오고 말았다.
나는 그 녀석의 지난해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잘 교육받은 것이 있었다. ‘뭐든 다 해주려고 하지 마라’ ‘시간이 걸려도 자기가 다 하도록 해라’ 등이었다. 그래서 알림장만은 꼭 자기 힘으로 다 쓰고 집에 가도록 했다. 그날도 그 녀석은 알림장을 쓰고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한 글자 써 놓고 딴짓하고 한 글자 쓰고 놀았다. 급식 도우미로 오신 어머니들이 청소를 하셨지만 나는 뒤로 밀었던 책상을 기꺼이 앞으로 당겨주며 알림장 쓰기를 독려했다. 하지만 녀석은 또 몇 자 쓰고는 딴짓이었다.
몇 번의 주의를 주는 사이, 난 그 녀석의 날 놀리듯 하는 태도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약을 올리고는 날쌔게 도망가는 녀석을 나는 기필코 뛰어가서 잡았다. 순간 이제껏 그 녀석과 함께하면서 힘들었던 무수한 날들이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 빠져 나가려고 온몸에 힘이 들어간 녀석을 죄인 잡듯 끌고 왔다. 교실의 어머니들도, 자상한 스승상도 다 잊었다. 나는 지금 내 속을 다 뒤집어놓은 열 살짜리 원수를 잡은 것이었다. 교실에 있던 어머니들도 놀라고 안타까워하였지만 나를 어쩌진 못했다.
그 녀석을 질질 끌고 휴게실로 갈 때였다. 그 녀석의 어머니와 딱 마주쳤다. 녀석의 어머니는 평소 건물 밖에서 기다리곤 했는데 그날은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나오지 않자 찾아온 것이리라…. 충격과 놀람 이상의 복잡한 표정도 잠시, 녀석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인사를 하고는 아들을 데려갔다.
그제야 잊었던 사도강령(師道綱領)이라도 생각난 걸까?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월이 흘러 나 역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마음수련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되돌아본 내 모습, 나는 더욱더 그때의 일을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었나. 나는 내가 학생들에게 매를 들거나 상처 주지 않고 욕을 하거나 차별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선생님보다 마음으로 그 녀석을 미워하고 있었던 거야. 그 녀석이 나에게 했던 힘든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나도 모르게 미워하고 차별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일이었어.’
그날 그 녀석의 어머니가 뒤에서 흘렸을 눈물에 가슴 아팠다. 진심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받고 싶다.
사실 며칠 뒤 녀석의 아버지가 찾아왔었다. 나를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그냥 차분히 그 녀석이 왜 특별한 아이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하였다. 녀석은 아주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았다고 했다. 의사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열병 이후 그 녀석은 또래 아이처럼 자라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내가 위로의 말을 할 자격은 있었을까?
녀석은 이제 제법 남자 티가 나며 어른으로 가는 길에 있을 것이다. 아직도 통닭에 노래 부르며 미인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녀석에게 초등학교 때의 너의 이 선생님은 참 어리석었다 말하고 싶다. 겉으로만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너를 너다움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왜 너는 다른 아이들 같지 않느냐며 마음으로 밀어냈었다고….
너는 그때 겨우 열 살이었는데…. 이런 선생님을 용서해 줄 수 있겠니?
그리고 참 고맙다. 너에 대한 미안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나를 돌아보게 해주어서 이제는 어떤 아이라도 그 아이만의 제 색깔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선생님다운 선생님인가’ 늘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준 소중한 나의 제자야.
통닭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예쁜 여자만 쫓아다니지 말고, 항상 건강해야 해. 알았지?

2010년 12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의 작가는 서양화가 정명화입니다. 그녀는 1959년 서울 생으로, 21세에 파리 살롱 데 아티스트 프랑세스 전에 입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14회의 개인전과 Artists Exhibit in SOHO 등 80여 회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며, 자유로운 감성과 유려한 색채로 두터운 애호가층이 형성돼 있습니다. 지금은 그림을 좋아하는 딸과 함께 파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푸른색을 주조로 하는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