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잔인한 복수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중학교 2학년 딸아이에게 전해주면 좋을 거라며 아이돌 그룹의 화보집을 선물받았습니다. 반갑게 화보집을 들춰보는 딸아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얘들이 엑스오냐?”
저의 물음에 딸아이가 피식 웃었습니다.
“엑스오가 뭐예요, 엑소지.”
딸아이의 썩소에 발끈해 한마디 더 했습니다.
“엑스오나 엑소나 그게 그거지, 가시나야.”
그러자 딸아이도 발끈합니다.
“엑소를 엑~~스오라 그러면 안 되죠. 아빠가 좋아하는 씨스타를 ‘씨소타’ 뭐 ‘그네타’ 이러면 안 되지 않겠어요?”
이런…. 마지막 페이지를 다 넘기고 첨부터 다시 펼쳐 보는 딸아이가 화보 속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찬열이… 그리고 세훈이… 백현이….”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아이들 이름이 신기해서 다음 페이지 아이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얘는 누구냐?”
“찬열이라고 했잖아요. 앞에 찬열이… 얘는 세훈이 아까 말한 세훈이.”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다시 저에게 묻습니다.
“얘가 누구라고요? 모르죠? 찬열이요, 찬열이. 다 같은 찬열이.”
그리고 12명의 멤버들 이름을 손가락을 짚어가며 나열합니다.
“크리스, 레이, 디오, 타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얘 누구라구요? 찬열이 찬열이 찬열이!!!”
내 딸이지만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5년 전 썼던 글이 생각나 소개합니다.

제목 할머니의 잔인한 복수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와 5학년 3학년 두 남매가 거실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이다.
“할머니 이게 뭐라고요?”
“케….”
“케로로라구요.”
“이게 뭐라고요?”
재차 이어지는 질문에 어머니는,
“케… 로… 로….”
그러자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맞았어요! 할머니.”
“자, 그럼 이건요?”

“…….”
어머니는 코에 걸친 돋보기 너머로 두 눈만 껌뻑인다.
“기로로요, 기로로, 이건 타마마, 이건 쿠루루, 이건 도로로 아셨죠? 이게 뭐라고요?”
“…쿠….”
“쿠루루요, 쿠루루.”
두 남매가 서로 마주 보며 낄낄거린다. TV 만화영화 캐릭터 카드를 들고 할머니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 사실 나도 며칠 전에 당했던 일이라 어머니의 맘을 이해한다. 당해보면 알지만 은근히 약이 올라서 끝까지 받아준다. 이런 쓸데없는 오기로 난 2시간에 걸쳐 ‘개구리중사 케로로’란 만화의 캐릭터를 구분하게 됐다. 두 남매가 개구리 캐릭터를 가지고 어른들을 놀려 먹는 데 신이 났나 보다. 그래도 손자 손녀들이라고 끝까지 받아주며 노력하시는 어머니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며 난 욕실에서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다.
여전히 거실에 모여 있는 세 사람 곁을 지나치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풍”… “똥”… “비”….
“이게 뭐라고?”
어머니가 호기에 찬 음성으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묵묵부답.
“풍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이게 오동, 이게 메조, 이게 난초, 이게 홍싸리, 흑싸리….”
어머니의 능숙한 패 돌림과 화려한 손목 스냅 앞에 아이들은 여전히 묵묵부답. 케로로 캐릭터 카드는 이미 한쪽으로 물려 있고 어머니 손에는 화투짝이 쥐어져 있었다.
“너희 아빠한테 물어볼까?”
어머니가 나를 한번 넌지시 쳐다본다. 난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풍초똥팔삼…”이란 한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방으로 들어왔다. 짜식들….
좀 전까지 남매들의 낄낄거림은 온데간데없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어머니의 복수에 찬 다그침만이 거실을 맴돌았다.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라, 70년 세월을 이길 수 있나.ㅋ

백일성(43)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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