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이 믿고 따라주는 반려동물들. 상처받고 힘들 때면 더욱 큰 위로가 되어주는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행운의 삼색 고양이 그리고 내게 힘이 돼준 길고양이들

고경원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 저자. 서울시 도봉구 도봉2동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쯤 잊지 못할 인연을 만난다. 내겐 2002년 7월에 만난 ‘행운의 삼색 고양이’가 그랬다. 당시 인터넷서점에 전시 리뷰를 쓰며 생계를 유지하던 때라, 종로 일대 서점가를 돌며 신간을 훑고 인사동과 사간동 화랑가에 들러 전시를 취재했다가 다시 전철역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자주 다녀 익숙해진 그 경로를 ‘개미길’이라고 불렀는데, 행운의 삼색 고양이를 만난 것도 그런 개미길에서였다.

다른 길고양이 같았으면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금세 달아났을 텐데, 녀석은 좀 특별했다. 화단에 몸을 숨기고 행인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던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겁을 먹기는커녕 동그란 눈을 빛내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닌가. 어린 고양이다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 사랑스러워 한참을 머무르며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이후로 10여 년간 지켜보게 된 화단 길고양이의 첫 기록이다.

단지 귀여운 길고양이를 만났다는 추억으로만 남았다면 행운의 삼색 고양이를 금세 잊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화단 근처에서 간간이 얼굴을 비치던 녀석은 1년 뒤 어미 고양이가 되어 나타났다. 너무 일찍 엄마가 되어 새끼들을 키우는 일이 힘들었던지 통통했던 두 볼도 홀쭉해지고, 보송보송했던 콧등 털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헌데 내겐 귀여운 어린 고양이 시절의 모습보다, 어른 고양이의 의연함이 자리 잡은 그 얼굴이 더 큰 감동을 주었다. 엄마가 된 그 고양이가 내게 눈빛으로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참 고단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살아야지. 기왕에 태어났으니까, 사는 동안에는 있는 힘껏 힘내서 살아야지.’

돌이켜 보면 내가 길고양이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도시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을 향한 동지애에 가까웠다. 20대 중반에 비정규직 기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해 프리랜서와 정규직 사이를 오가던 무렵, 길고양이가 살기 위해 눈에 띄는 음식을 일단 집어삼키고 보는 것처럼 나도 온갖 글을 쓰며 하루하루 버티곤 했다.

그렇게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을 느낄 때마다 힘이 되어준 건 길고양이였다. 집고양이처럼 살갑게 다가와 위로해주는 법은 없었지만, 길고양이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되어주었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시달려 고단해질 때면, 화단 고양이들의 은신처로 찾아가 30분이고 1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게 그 무렵의 낙이었다. 회양목과 사철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화단은 그네들의 집이었지만 동시에 내게도 지친 마음을 쉬어가는 은신처였다. 집이 멀어서 매일 밥을 챙겨주진 못했지만, 취재가 있어 근처에 들른 날은 사료를 챙겨 갖다주곤 했다. 오늘만은 한 끼라도 제대로 된 밥을 먹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무심코 스쳐 지나는 길고양이 동네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노릇을 기꺼이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짧은 생을 살다 떠날 길고양이들이지만, 그들이 한때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아갔다는 사실조차 잊히는 건 안타까웠다. 그들의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사진으로 붙잡아두고 싶었다. 사진 속에서만큼은 그들도 영원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 있을 테니까.

길고양이를 찍을 때면 최대한 몸을 낮춘다. 때론 흙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때론 쓰레기 봉지 곁에 쭈그리고 앉는다. 잔돌에 무릎이 배기고 시큼털털한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찌를 때, 눈비에 젖은 바지에서 으슬으슬 한기가 밀려올 때 ‘길고양이가 이런 환경 속에서 버텨왔구나’ 싶다. 그렇게 몸을 낮춰 길고양이의 눈높이가 되어보고 길고양이의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오랜 시간 지켜본 길고양이의 희로애락을 사진과 글로 전하면서 바라는 건 한 가지다. 이런 작업이 계기가 되어, 도시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길고양이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거리의 고양이에게도 제각기 사연과 감정이 있고 소중한 삶이 있음을 글과 사진으로 접하다 보면, 그들이 지닌 생명의 무게가 언젠가 묵직하게 와 닿지 않을까. 우리 주변의 길고양이 이야기를 10여 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도, 내가 그들에게 위로받으며 느낀 마음의 빚을 그렇게라도 갚아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길고양이가 행복하기를!

전영미 작.

< Cute Cup Pup> 20×20cm

장지에 채색 / 2011

나의 안내견 찬미창조

김예지 34세. 피아니스트.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교 박사 과정 재학 중

워낙 어려서부터 잘 안 보였기에,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내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2000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친구들이 한 시간이면 하는 과제를 나는 며칠이 걸리곤 했다. 나는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그걸 절실히 느낄 즈음 안내견 창조를 만났다. 창조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의 아주 덩치가 큰 남자아이였다. 사람을 무척 좋아해 처음 만나자마자 나에게 달려와 내가 넘어질 뻔할 정도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 이후로 언제나 창조와 함께했다.

길을 다닐 때는 물론이고, 수업 시간에도, 친구와 대화를 할 때도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보통 나를 기다려야 할 때면 창조는 잠을 잤다. 피아노 연습을 할 때도 자는데, 내가 연주를 잘하면 잘 자는 것 같고, 좀 부족한 듯싶으면 잘 못 자는 거 같았다. 어느새 창조가 심사 위원이 되어 있었다고 할까. 공연을 위해 무대에 설 때도 함께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좋아해, 나름 무대 위에서 박수받고 사진 찍히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2000년만 해도, 우리나라에 안내견은 흔한 존재가 아니어서 창조와 어디에 가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출입을 거부당하곤 했다. 그러면 그게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낀 창조도 의기소침해졌다. 나도 속상해서 있으면 나에게 다가와 앞발을 내 무릎에 올려놓거나, 가만히 턱을 괴고 있기도 했다.

1년, 2년, 3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창조와 24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렇게 창조는 7년을 함께하다 9살 때 은퇴를 했다. 2007년 창조의 몸도 안 좋아지고, 그해 9월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면서 하게 됐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창조를 떠나보낸다는 건 말로 할 수 없이 슬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은퇴 후 무척 좋은 은퇴견 홈케어 가정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지금 내 곁에 있는 찬미를 만났다. 창조가 늠름한 남자아이였다면 찬미는 새침데기 여자아이다. 처음에는 창조랑 너무 달라 적응하기가 힘들었는데, 찬미는 여자아이를 키우는 것 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내가 외롭고 힘들어하는 거 같으면 나에게 다가와 갑자기 뒤집어져 배를 보여주며 허리를 막 움직이는 등의 애교를 보여준다. 언어도 사람도 모든 게 낯선 미국에서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어준 찬미. 사람들은 변하는 경우도 많은데, 창조와 찬미는 언제나 한결같다. ‘더욱더 사람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더욱더 개를 좋아하게 된다.’ 언젠가 책에서 쇼펜하우어가 했다는 이 말을 읽게 되었는데 무척 공감이 갔다.

내가 스스로 독립된 인생을 살게 도와준,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반려생명체. 언제나 내 곁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친구. 나를 절대 속이지 않는 나의 눈. 식사 챙기기, 목욕시키기… 사소한 것도 하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자식 같은 존재. 그로 인해 나를 어른스럽게 만들어주는 존재.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받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나의 안내견 창조와 찬미.

나는 지금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음악 교육을 하는 데 필요한 교재 등을 연구 중이다. 후배들은 나 같은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장애인 비장애인 구별 없이 모두가 하나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 나의 안내견들은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전영미 작.

<숨바꼭질> 34×44cm

비단에 채색 / 2012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내 동생, 푸근이

김채은 18세. 경기도 과천시 원문동

많은 분들이 인사말로 “형제자매가 어떻게 되니?” 자주 물으시잖아요. 전 그때 당당히 “오빠랑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어린 동생이 하나 있어요”라고 답합니다. 저에겐 동생의 정체성(?)이 중요하진 않지만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제 동생은 푸들이에요.(^^;;) 이름은 ‘푸근이’랍니다!!

어릴 적부터 늘 강아지 키우는 게 소원이었지만, 한번 키우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러기 쉽지 않다며 부모님은 단호히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러다 2년 전, 저희 가족은 10여 년 동안 살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니 새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친했던 친구들도 없으니 학교생활도 쉽지 않았고요. 그렇게 힘들어하는 저를 보며 부모님은 의논 끝에 그렇게 반대하셨던 강아지를 선물해주셨죠. 단, 생명을 키운다는 건 단순히 재미가 아니고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지요.

맑고 또랑또랑한 눈망울과 소시지 같은 꼬리를 달고 있던 복슬복슬 갈색 푸들. 아직 두 달밖에 안 된 조그마한 푸근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저를 푸근하게 감싸주는 거 같았습니다.

제 발소리만 들리면 문 앞까지 나와 반겨주고, 무릎 위에 올라와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리던 푸근이. 지치고 힘든 학교생활 속에서도 그런 푸근이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고, 푸근이는 그렇게 그 누구도 위로해주지 못했던 저의 마음을 위로해주었지요. 덕분에 좀 힘들더라도 다시 일어나 밝은 마음으로 생활하자고 다짐하였구요. 씻겨주고, 안아주고, 예방접종 시켜주고…. 그렇게 푸근이를 보살피면서 저의 마음도 더 커져갔습니다.

어려서 배변 판에 오르기도 벅차 낑낑대던, 마냥 바깥세상이 신기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푸근이가 어느덧 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 푸근이가 있어서 저는 2년의 시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작년, 신중한 고민 끝에 고등학교 입학 대신 검정고시를 선택했지요. 가끔 과연 잘한 선택인지 불안할 때도 있지만, 참 고맙게도 푸근이는 그때마다 저에게 더욱 달라붙어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 넣어줍니다.

어느새 저희 집 막둥이로서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푸근이와 함께 저도 같이 힘든 일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내 동생 푸근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제 삶도 책임감 있게 가꿔갈 것입니다.

며칠 전 두 살을 맞은 푸근아!!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 살자~ 고마워~^^.

전영미 작.

<수국이 피었어요> 37×44cm

비단에 채색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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