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해줄 수 없는 선물일지라도 그 마음만은 잊지 말고 전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선물을 하며…

원성룡
72세. 전남 광양시 광양읍

운동은 건강에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훌륭한 치료법이다. 나는 공기 맑고 하늘이 드높게 펼쳐지는 백운산에 산책을 간다. 걷는 운동을 하고 생수를 꼭 떠온다. “생수 배달이요~ 생수요~” 생수를 떠와 이웃들에게 골고루 선물해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생수를 배달한 후 넓은 텃밭에다 채소를 심는다. 마늘을 파종하자 싸늘한 날씨에도 싹을 틔웠고 축 처진 양파는 서서히 일어나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했다.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시금치 생강과 마늘은 기본이고, 상추, 부추, 배추, 무, 당근 등등.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들은 모두 친척들에게 선물한다. 남에게 퍽퍽 퍼주어야 마음이 편해져오니 나 자신도 모르게 주는 기쁨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봄이 찾아오니 요즘은 너무 바쁘다. 넓은 텃밭에 씨앗을 뿌릴 준비 작업을 해야만 한다. 여름이면 풀과의 전쟁이다. 뽑아도 뽑아도 또 올라오는 풀을 매야 하고 또 매야 하고 무공해 채소를 가꾸기가 정말 힘이 든다. 그래도 계속 일을 하는 이유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하 웃음이 나온다. 내가 먹기보다 친척들에게 무공해 채소를 선물하기 위함인 것이었다. 힘은 들어도 농약 없이 채소를 가꾸어가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무공해 채소를 선물하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행복해지는 마음, 그 누가 알리요?

친척들의 “감사해요, 고마워요~, 이걸로 동네 잔치했어요.” 그 따듯한 말 한마디에 힘든 몸이 위로받는다. 작년 겨울에는 너무 많이 아파서 다시는 텃밭 일을 안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봄이 찾아오니 내 발걸음은 다시 텃밭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못 말리는 내 자신이여. 아들딸들은 이제 좀 쉬라며 일을 못 하게 한다. 나는 알았어, 알았다, 대답만 하고 열심히 텃밭에서 봄을 맞고 있다. 힘이 닿는 한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야 나도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주는 기쁨을 계속 얻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채소를 가꾸며 마음의 대화를 나눈다. 무럭무럭 크거라. 꼭 자식을 돌보는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자연이 주는 선물들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자연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준다. 그런 자연에 비하면 자꾸만 더 가지려 하는 인간들의 욕심이 부끄럽다. 들판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활짝 웃는다. 나도 따라 웃어본다. 힘들어도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위로해 보며 이 글을 쓴다.

정일 작.
<선물>
60.6×72.7cm.
Oil on canvas. 2013.

선유 천사, 네가 우리에겐 가장 큰 선물이란다

정용희
37세. 자영업. hyeyoung0308.blog.me

2012년 2월 2일 새벽, 우리 부부에게 작고 아담한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과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공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 우리 공주님은 SMA(척수성근위축증)이란 희귀병을 진단받았습니다. 몸의 근육이 점차 소실되는 병이었습니다. 왜 하필 우리 부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슬프고 절망적이었습니다. 병명을 검색하면 암울한 글들뿐이었습니다. 이후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1년이 넘게 중환자실에 있는 날들은 계속됐고, 기관절개수술과 위루관수술 등으로 아프고 쓰린 상처만이 몸에 남았습니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중환자실에 홀로 남겨두고 떠날 때면 우리 부부의 가슴은 찢어질듯 아프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환우 모임들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많은 위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끔 힘들다 털어놓는 말 한마디에 응원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 새삼 마음을 터놓고 함께할 수 있는 이웃들이 있다는 게 참 감사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겐 슬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언제 우리 곁을 떠날지 모르는 선유 천사 덕분에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선유 천사는 길게 잠을 못 잡니다. 잘 때도 침을 계속 흘립니다. 침을 삼킬 수 있는 근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침이 기도로 넘어갈까 봐 밤잠을 설쳐가며 번갈아가면서 보살펴도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짜증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줄까 늘 생각하고 연구했습니다. 선유 천사에게 꼭 필요한 재활 치료도 열심히 받고, 필요한 보조기는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늘 누워만 있는 선유 천사를 위해 지루하지 않게 쉬는 날이면 전시회관이나 마트 그리고 놀이공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유 천사에게 맞는 놀이 기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몇 번의 고비가 찾아왔지만, 우리 부부와 선유 천사는 꿋꿋이 이겨나갔습니다.

지금 선유 천사는 27개월이 되었습니다. 이젠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스트레칭과 호흡기 재활 치료를 해주고 밥을 먹고 음악을 듣고 만화를 보고 신나는 몬테소리 수업을 합니다. 눈짓과 얼굴 표정으로 엄마와 이야기합니다. 우리 동네에서 최고로 부지런한 엄마를 만들어버리는 우리 선유 천사님….

우리 가정은 항상 바쁘고 항상 북적북적거리고 항상 행복해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놓고 간 선물 같은 우리 선유 천사님 덕분에 우리 부부는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할 정도로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선물에는 항상 의미가 있다고 하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왜 선유를 보내주셨을까…. 우리 부부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선유 천사를 돌보며 나는 정말 사랑이 없고, 미성숙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부족한 사람임을 매일매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고,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눈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의 아픔에 눈물 흘리고 공감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이 선유 천사를 통해 받은 선물들입니다.

우리 부부는 희귀병으로 고통받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선유 천사의 병을 알려나갔습니다. 블로그엔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응어리진 마음들을 푸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 인연으로 우리 부부는 천안에 사는 가족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유 천사와 같은 병을 앓는 아이가 있는데, 외출하는 건 엄두를 못 내고 있다기에, 직접 유모차를 태우고 외출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을 열고 세상에 한 걸음 내딛는 그 가족을 보며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소망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장애아로 인해 힘들어할 가족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삶이 버겁고 힘들겠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그 아픔조차도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모두에게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그래서 우리 부부는 늘 내일이 가슴 뛰게 기대됩니다. 앞으로 있을 선유 천사와 함께할 많은 날들에 또 어떤 선물 보따리를 받게 될지 말입니다.^^

정일 작.
<기다림>
22×27cm.
Oil on canvas. 2013.

어느 해 오월, 아들이 건넨 카네이션

이현주
50세. 주부.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

어느 해 오월, 근심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작은아들이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피시방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낮과 밤이 바뀌어 생활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퇴근하듯 들어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누군가 한동안 그러다가도 지치면 그만두겠지! 그러니 믿고 기다려보라는 이야기만 했다. 하지만 속상하고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절대로 우리 아이들은 방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원하지 않던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공고에 가고 싶어 했다. 입학해 두 달도 채우지 않고 그만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만 자는 아들을 보면 화가 났다. “그럴 거면 나가라”며 윽박지르고 짜증을 냈다. 아들은 엄마, 아빠의 눈치도 살피지 않았다. 하루는 현관 입구에 벗어 놓은 슬리퍼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슬리퍼를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쪽이 달랑달랑 떨어진 채로 끌고 다니는 슬리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에서 깬 아들은 또 외출을 하려는지 슬리퍼를 찾았다.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했다. 화가 난 아들은 “나도 버리지!” 그리곤 쓰레기통을 뒤져 슬리퍼를 다시 꺼내는 것이 아닌가?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화가 난 아들은 더욱 그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전쟁 같았던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부터 잠만 자던 녀석이 점심만 되면 일어나 어디론가 급하게 나가버렸다. 그러다가 피곤에 쌓인 모습으로 들어와 코까지 골며 잠을 잤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잘 가는 피시방 근처에서 몰래 숨어 살폈다. 그 순간, 아들이 보이고 아들 친구들도 여럿 보였다. 무슨 일일까? 가슴이 뛰고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과 말을 하고 웃기도 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좌판에 펼쳐 놓은 꽃을 팔고 있었다. 용돈을 벌자며 꽃집 알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어버이날이 되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아들은 웃으며 한 손에 카네이션이 담긴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엄마, 아빠 선물이라며 건네준다. 남편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를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고맙다는 말을 하고 출근했다. 나는 속으로 엄청 울었다. 방황만 한 줄 알았던 아들은 그동안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왔던 거다. 그동안 모은 알바비가 100만 원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엄마 옷도 사 입으라며 10만 원을 준다. 그날 너무 놀라고 미안해서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한테 공부해라 뭐 해라 아무 말 안 할게. 엄만 너를 믿을게.”

아이를 내 뜻대로 인문계 고등학교로 보낸 후 얼마 안 되어 아들이 “이제라도 공고로 옮겨 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겠거니 하고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 조금만 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더라면 아이가 행복했을 텐데. 늘 엄마 마음대로 아이를 키우려 했구나 싶어 참 미안했다. 다행히도 나와는 달리 남편은 언제나 아이를 그냥 지켜봐주었다. 그래도 그런 아빠가 있어서 아이가 이렇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 후, 아들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믿어주는 만큼 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했다. 군 생활도 마치고 지금은 복학을 해서 멋진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 믿고 기다리면 결국은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 거 같다.

처음으로 아들에게 받았던 카네이션 선물. 지금도 카네이션만 보면 설렌다. 너무도 행복해서다. 카네이션 바구니에 작은 아이비 화분이 꽂혀져 있었는데 6년이 지난 지금도 잘 크고 있다. 아이비가 크는 만큼 우리 아들도 이렇게 커가는구나 싶다. 아이비는 겨울이 되면 잎이 다 떨어지고 노랗게 마르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순이 돋아난다. 온실이 아니라 바깥에서 바람이나 햇볕을 골고루 받으면 더 잘 성장한다. 사람도 똑같은 거 같다.

“그때 우리가 왜 그랬지?” 한번은 아이가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팽팽한 삶의 인생에서 사춘기라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 방황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선물이 된다.

정일 작.
<푸른빛 산토리니>
61×93cm.
Oil on canva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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