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한 걸음,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기 힘으로 일어서리라 마음먹는 것, 그것이 시작입니다.

알려는 집착 훌훌 털고 쿨하게 다시 서다

김명숙 44세. 도서출판 나무발전소 대표

스물아홉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면서 ‘아, 나는 죽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격한 감정을 느껴보았다. 외과 의사는 밤새도록 내 얼굴을 깁고 또 기웠다. 아, 도대체 얼굴이 어떻게 된 거지? 하필 얼굴을 다칠 게 뭐람. 처음 붕대를 풀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의 놀람! 절망! 참담한 심정이란…. 내가 나인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왜곡된 얼굴을 보고 울고 또 울었다.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얼굴을 심하게 다쳤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늘 슬픈 생 일년 동안의 치료 기간을 거쳐,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상처는 아물어 가도 콤플렉스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왜 나한테 이런 몹쓸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고통을 주셨을까? 하는 자책의 마음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혼자 영화관에 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라는 일본 예술영화였다. 영화는 한 여인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건의 발단은 평범한 가장인 주인공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면서부터다. 부인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투서였다. 편지 이후 남편은 부인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도소 출소 후 주인공은 늘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주인공이 집안 거실에 놓인 어항을 헤엄쳐나가는 꿈, 한 줄기 빛이 보이고, 편지들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 주인공은 꿈속에서 깨닫는다.

‘편지는 원래 없었다!’ ‘이 모든 파국은 결국 나의 환상이었다!’

나는 주인공이 하얗게 떠다니는 편지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장면 속에서 갑작스런 교통사고의 원인을 알려고 어리석게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간 병사의 가슴에 화살이 꽂혔다. 병사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나는 죽게 되는 것인가? 나의 가족들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한탄만 하고 있을 때 부처가 나타나 그 화살을 단숨에 뽑아서 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제1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을 맞지는 말라는 말씀도 있다.

하이경 작. <봄과 여름사이>

캔버스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 72.7×91cm. 2009.

나는 그때 같은 영화를 세 번에 걸쳐 보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을 알려고 집착하는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사고는 사고일 뿐 오버하지 말자! 나는 그렇게 쿨하고 털털한 성격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직장을 나와 32세에 기획사를 차리고, 36세에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그 생명의 신비에 감사해서, 신이 나에게 선물을 주는구나 하는 벅찬 감동도 느껴보았다. 마음속 앙금을 털어버리고 나니,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2009년에는 1인 출판사를 시작하여 꾸려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뭐가 됐든 시작해보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게 맞나, 고민도 하지만 한번 해보자는 마음밖에 없다. 그렇게 내가 주어진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해나가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도 알게 된다. 시작도 안 하면 배우지 못하는 귀한 경험들이다.

나는 눈뜨자마자 크게 웃고 크게 외친다

고혜성 37세. 개그맨. 자신감코리아 대표

일단 시작하자! 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나는 1975년 성남의 달동네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나는 어릴 적부터 내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생계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했다.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20대 초반까지 배달이라는 배달은 다 해봤고, 승용차 기사로도 일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간판 세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다. 그래도 ‘입구가 깨끗해야 복을 받는다’는 둥 하며 몇 번이고 찾아가 설득을 하자 점차 일거리가 늘어 나중엔 서울 시내 간판이라는 간판은 다 닦았을 정도였다. 그러다 간판 제작 업체를 만들었다. 열심히 스티커, 전단지를 뿌리자 대형 간판 의뢰도 들어왔다. 그렇게 생짜로 나를 세상에 던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지에 대해 배워갔다.

그런 도중에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3층에서 간판 작업을 하다가 떨어져, 발꿈치 뼈가 으스러진 것이다. 의사는 평생 걸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때 내 나이가 25세였다. 불안했지만 슬픔에 빠졌던 건 도합 1분 정도였다. ‘나는 걷는다. 나는 누가 뭐래도 반드시 똑바로 걷는다’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만 했다.

무조건 걸었다. 절뚝거리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몸으로 컴퓨터학습 CD 방문 판매 일을 하다가 걷는 것이 힘들어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다 빗길에 오토바이를 몰다 다친 다리를 또 다치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났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에서 자라는 북극의 수목일수록 목질이 야무져 양질의 목재로 쓰인다’는 글을 보고 또 보며 힘을 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왼쪽 발뒤꿈치에는 인공 뼈가 박혀 있는데, 걷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서른 살에는 개그맨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이 개그맨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오락부장을 했고,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애들을 웃길 수 있을까만 고민했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돌아보게 되었을 때 개그맨이 생각났다. 하지만 개그맨 시험에 열 번이 넘게 떨어졌다. 그러다 KBS 개그맨 공개 콘테스트인 ‘개그사냥’에서 1등을 하면서, 개그를 시작했다. 2005년 말 개그콘서트에서 ‘현대생활백수’로 히트를 쳤다. ‘현대생활백수’ 코너를 할 때는 평균 수면 3시간을 넘긴 적이 없다. 미친 듯이 개그만 생각했다.

하지만 6개월여 만에 막을 내리며 나는 다시 원점에 섰다. 금세 복귀하려니 했지만 아이디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방송을 그만두면서 나는 ‘자신감 대통령’이라는 책을 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이겨내온 자신감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전문강사가 되어 그런 비결을 알리고 있다.

하이경 작. <연작-스미다>

캔버스에  오일 및 아크릴. 각 40×90cm. 2010.

여전히 내 본업은 개그맨이라고 생각한다. TV에 나와야만 개그맨이 아니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희망을 주고,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게 개그맨이라고 생각한다. 토크쇼 MC의 꿈도 있다. MC가 되어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시작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눈뜰 때라는 것을 알았다. 눈뜰 때 어떠한 마음으로 시작하느냐에 모든 게 달려 있는 것이다. 나는 눈뜨자마자 웃는다. 그리고 외친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안 되는 것은 없다. 다 된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열 번 하면 된다. 백 번 해도 안 되면 천 번, 만 번 하면 된다. 일단 시작하자.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 ‘지금’

강일구 44세. 일러스트레이터.

출세나 성공에 목적을 두지 않으려 한다. 악착같기보다는 즐겁게 느긋하게 일을 하려 한다. 만나면 상쾌하고 나를 돌아보게 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선택한다. 내 그림 스타일이 아닐 경우 욕심을 내기보다는 다른 작가를 소개해주고,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자 한다. 아등바등하기보다는 손해 보는 쪽을 택한다.

나의 이런 태도는 세 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생긴 인생관이자 가치관이기도 하다.

34년 전 여름, 나는 첫 번째 죽음의 고비를 맞는다. 어른이 들어가기에도 깊은 웅덩이, 옆집 형의 멋진 다이빙을 보고 수영도 못하는 걸 잊은 채 같은 방법으로 스며들었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고 시야는 보이지 않았다. 온몸은 물먹은 상태였고 숨은 이미 멈춤 상태를 지난 듯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숨쉬기가 편해지더니, 가족들의 얼굴이 필름처럼 쏜살같이 나타나다 사라졌다. 이게 죽는 과정이구나, 삶이란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가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땅에 눕혀져 있었고, 옆집 형이 “너! 큰일 날 뻔했다”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집에 오니 가족이 다시 보였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삶, 죽음,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하는 조숙한 어린이가 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 두 번째 죽음의 문턱을 넘게 된다. 꿈속인 듯 검은 구름이 계속 나를 엉키면서 못 일어나게 하는 느낌이었다. 뭔지 모를 무게에 눌려 온몸이 마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다행히 형수님의 목격으로 살 수 있었다.

세 번째 죽음의 위기는 군대에서 겪었다. 한겨울 대대장실 안 당번병실에서 새 연탄을 갈고 난로 뚜껑을 연 채로 깜빡 잠이 들었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이미 연탄은 새하얗게 타버린 상황이었다. 밀폐된 4평 남짓한 좁은 공간. 분명 100%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일어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세 번째 죽음을 면하게 되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하라는 뜻이구나, 확신하게 되었다. 느긋한 마음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 아옹다옹하며 숨 가쁘게 치고 싸우고 헐뜯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여유롭게 가족과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잘하는 건 그림밖에 없는데…. 그림을 통해서 뭔가 하려면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1993년에 상경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첫 자취 생활을 하며 도전을 재산으로 매일 눈물을 비벼 먹던 시절, 마치 외판 사원처럼 일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출판사를 기웃거렸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불편한 사람도 만나고, 그림이 퇴짜를 맞은 적도 있고,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건가 고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의 현실을 수업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했다. 편안하고 웃음과 여유가 있는, 한 번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 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지금’ 딱 두 글자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그 안에 모든 게 내포돼 있는 것 같다. 오늘 죽더라도 미련이 없도록 지금을 사는 것이다. 내가 덜 욕심을 내어 다른 이가 행복하다면 더 즐겁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세 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에 함께 가는 것이다. 어차피 자연에서 왔으니 누굴 원망할 필요도 없고, 미련을 가질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 그저 이 순간의 행복을 느끼면 된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한데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싶다. 동네 어딘가에 24시간 불빛이 새어나오는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 그 갤러리가 쉼터가 될 수도 있고, 그 불빛이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면 좋겠다.

하이경 작. <연작-하고 싶은 이야기들>

캔버스에 오일. 25×150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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