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밀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여섯 가지 비밀 이야기.

 

꼭꼭 숨겨둔 비밀을 고백한다는 것만으로

이희윤 24세. 고려대학교 <쿠스파> 동아리 팀장. ‘포스트시크릿 코리아’ 진행

“난 수영할 때 쉬하는 걸 좋아해.”

흥겨운 물놀이 때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웠던 꼬꼬마.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귀여운 고백으로 시작된 이 영상은 미국의 ‘포스트시크릿’이라는 프로젝트 소개 영상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익명으로 엽서에 적게 했고 이것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고해성사 창구가 된 것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수십만 통에 이르는 엽서들이 모였다.

작년 말, 이 영상에 푹 빠진 나는 즉시 ‘포스트시크릿’ 책을 구입했다.

책의 구성은 매우 간단했다. 이제까지 도착한 엽서들을 모은 것인데, 그림이 반이요, 글자는 한두 줄이었다. 하지만 난 그처럼 한 장, 한 장에 담긴 무게감에 넘기기 어려운 책을 본 적이 없었고, 여러 밤에 걸쳐 눈물을 흘리며 읽어야 했다.

“아들이 내가 게이란 걸 알게 될 게 두려워요. 그리곤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까 봐”…. 어떤 사연에는 깊이 공감을 하며 위로받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 상당수의 사연에는 공감할 수 없음에 감사했다.

서평에도 말해놓았듯이 꼭꼭 묻어둔 비밀을 어딘가에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쓰는 사람에게는 치유를, 읽는 사람에게는 위로를 주는 것이다.

카이스트 대학생 자살 문제가 끊이지 않던 올해 초, 나는 ‘포스트시크릿’을 한국에서 직접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자살 방지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신건강협회로부터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먼저 프로젝트 원작자인 프랭크 워렌씨께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허락을 받았고, 마음이 맞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올해 7월 9일, ‘포스트시크릿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작은 사서함과 블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우선 대학가에 우표를 붙인 엽서 2,000장을 배포했다. 그로부터 3개월, ‘포스트시크릿 코리아’에는 2백여 통의 사연들이 도착했다.

“난 공무원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단지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은 큰딸이고 싶어요. 그래서 그와의 사랑도 자꾸 망설여요. 부끄럽게 생각하실까 봐…” “초라한 내 모습.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아요. 모두들 외모만 따져요. 나도 예쁘다는 말 듣고 싶어요” “나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아 너무 두려워요”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엄마를 때리는 게 미워서” “도와주세요, 자신이 없어요” “내가 자살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어서 기뻐요”…. 사연들을 읽으며 같이 울고, 때로 같이 웃는다.

익명의 사람들이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 위안해주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3년 전 심장병을 앓던 우리 아가가 천사가 되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가가 우리에게 준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이를 잃은 엄마의 사연을 홈페이지(www.postsecret-korea.blogspot.com)에 올렸고, 얼마 후 자식을 잃은 또 다른 어머니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약이 아니라 이 엽서의 내용 하나가 저를 그렇게 위안해주네요.”

그때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이 내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였으니까.

사람들이 내게 비밀을 적어 보내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엽서를 통해 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고, 시각을 넓히게 됐다. 낯선 이에게 이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비밀을 고백해주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몬드리안 작. <선의 구성: 흰색과 검은색의 구성> 유화. 108.4×108.4cm.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국립미술관

 

어머니와 자취방

신호진 29세. 대학생. 서울시 광진구 자양4동

나는 지방 출신 서울 유학생이다. 처음엔 학교 근처의 친척 집에서 신세를 지던 나는 친척 집이 이사를 가게 되는 덕분에 결국 자취를 허락받게 되었다. 얼마나 신났는지 바로 돈을 타와 집을 계약하고, 어머니께서 사주신 부엌살림과 이불과 전기장판 등을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아들 사는 곳을 한번 봐야겠다며 상경을 하셨고, 꼬박 이틀 동안 아들의 첫 자취방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셨다.

내가 생각하기엔 참 깨끗하게 잘 정리해놓은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는 “사내놈이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 놓고 사는 게 없어 보인다”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두 번째, 세 번째 자취방으로 이사할 때마다 상경해 며칠씩 청소를 해주셨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내 나이 27살 때였다. 나는 의류학과라는 전공을 살려 옷을 디자인해서 파는 사업을 친구들과 해보기로 했다. 처음 다녔던 학교가 안 맞아, 다시 재수를 하는 바람에 거의 삼수나 마찬가지로 학교에 들어간 나는 남들에 비해 늦었다는 조바심도 있었고, 더 늦기 전에 뭔가 자리를 잡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집에선 모르게 사업을 하겠다며 휴학을 했고 자취방 보증금 1,000만 원도 쓰고 말았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다짐을 했었다. ‘반드시 돈을 벌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면 그때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다짐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친구 4명이 함께 시작한 동업은 점차 힘들어지자 두 명이 포기했고, 나와 다른 친구는, 또 집에는 비밀리에 한 학기 등록금을 받아 사업 자금으로 쏟아부었지만 결국 폐업을 하고 만 것이다.

그때의 좌절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 모르게 돈만 까먹고,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힘든 마음을 몇 달간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내 마음을 돌아보니 정말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한방에 큰돈을 벌어보자, 하는 조급함뿐이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 된 지금 일을 배울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 학교 공부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예전에는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며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게 되었다.

내가 사업을 접었을 때는 집에는 막 사업을 시작했다고 알린 후라, 폐업 소식은 그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이런 반전의 말씀을 하셨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지난 학기까지 학교 안 다녔지? 별것도 아닌데 왜 말 안 했어.”

이럴 수가! 어머니께서는 내가 사업과 함께 비밀로 부쳤던 휴학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도 아들을 믿는 마음에, 아무 소리도 안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자취방에 대해서만은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 나는 방만 각자 있고 거실과 주방은 다른 친구들과 공용으로 쓰는 하우스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나만의 자취방에서 지내는 걸로 아신다. 내가 사업을 시작할 때쯤부터 어머니의 일이 바빠지면서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셔서인데, 철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작은 방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가 청소해주셨던 나의 자취방들이 떠오른다. 혼이 나더라도 어머니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벌릴까도 생각해봤지만 ‘이것도 인생 수업이다’ 생각하고 어머니께 번듯한 집을 보여드릴 수 있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하려고 한다.

“어머니!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앞가림 잘하는 아들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다음 자취방 구하면 올라오셔서 꼭 다시 청소해 주세요!”

 

몬드리안 작. <구성 제VI> 캔버스에 유채. 95.2×67.6cm. 1914년. 바젤, 바이엘러 컬렉션

 

외톨이는 아량이 없었다

이계승 50세. 작가.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어릴 때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B라는 친구가 생겼고 완전 죽이 맞아서 다녔다. 둘 다 책과 음악을 좋아했고, 그의 집에는 맘대로 크게 들을 수 있는 전축과 레코드판이 잔뜩 있었다. 둘의 집은 1.5km쯤 떨어져 있었는데, 놀러 가면 저녁밥까지 얻어먹고 밤이 깊은 줄 모르고 놀았다.

B는 늘 형 자랑을 했다. 머리가 엄청 좋아서 공부 따위는 열심히 안 했는데도 서울공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 특유의 괴짜스러움도 갖고 있어서 그의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소동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야구장에서 응원하면서 박수를 어찌나 세게 쳤던지 시계가 고장 나 버렸고 그걸 고친답시고 뜯었다 조립했는데 초침과 시침이 바뀌어서 1초에 한 시간이 가버렸다는 에피소드는 몇 번을 다시 들어도 배꼽을 잡곤 했다.

그런 형님을 만나 장래의 진로 같은 것도 묻고 싶었지만 형은 워낙 바쁘게 사는 인생이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외톨이 중학생이었고 2학년이 되기까지 B와 더욱 밀접하게 붙어 다녔다. 학년이 바뀌어 서로 다른 반이 되자 약간 소원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주말마다 도서관을 같이 다니거나 시험공부를 같이 하고 수영장에도 놀러 가고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교우 관계가 여전히 단출했던 나와 달리 B는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고등학생이 되자 B에겐 여자 친구도 생겼다. 그런데 녀석은 그녀의 청순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만 할 뿐, 명색이 가장 가까운 친구인 나에게조차 소개를 해주지 않았다. 무척 서운하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고3이 되면서 우린 한 달에 두어 번 만날 정도로 바쁜 인생이 되었다. 우리보다 4배쯤 인생이 바쁜 서울대 형님은 결국 얼굴 한 번 안 보여주고 군대를 가버렸고 녀석은 여자 친구와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헤어지기로 했다고 근황을 말해주었다.

B는 수학을 잘했다. 그래서 가끔 그의 도움을 받곤 했는데 어느 날 어려운 함수 문제를 가지고 그의 집에 갔다. 있겠거니 하고 연락도 없이 갔지만 마침 그날따라 녀석은 귀가가 늦었다. 기다리는 동안 B의 어머니께 형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뜨악한 얼굴로 “형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라며 되묻는 것이었다.

“서울공대 다니다 군대 간 형님 말이에요.” “얘가 무슨 소리를? 우리 B는 형이 없어. 걔가 우리 집 장남이라구.”

그 말을 들으면서도 어머니가 나를 놀리는 줄 알았다.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인사조차 없이 황급히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 후 심하게 앓았다. 학교에도 안 가고 며칠 끙끙 앓아누웠는데 B가 찾아왔다.

나는 누워서 아는 체도 않고 눈조차 뜨지 않았다. B도 한동안 아무 말 않고 앉아 있더니 조심스럽게 가공의 형에 대한 고백을 했다.

“미안해, 형 얘기…. 너한테만 그런 게 아냐. 다른 애들한테도 그랬는데… 처음엔 그냥 재미로 그랬어. 근데 너한테는 정말 미안했다….”

독백처럼, 방백처럼 B는 더듬더듬 고백을 해나갔다. 열등감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여자 친구 얘기도 틀림없이 너의 소설일 뿐이었지?’라고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한마디 대꾸도 않는 것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유일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B는 할 수 없이 방문을 나서며 휴~ 하고 한마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어떤 미안함이나 회한보다는 마음의 짐 덩어리를 내려놓았다는 안도의 한숨으로 느껴졌고, 비밀이란 발설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더욱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훨씬 몇 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친구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고하는 B에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토닥이는 아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몬드리안 작.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캔버스에 유채. 127×127cm. 1942/43년. 뉴욕, 근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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