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꽃으로 피어난 저마다의 바람들….

내가 바랐던 수많은 것들… 그리고 지금

김달래 44세. 주부.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내 나이 삼십 대 후반,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내 집을 마련했다. 안방에 누우면 회색빛 하늘이 손바닥만큼만 보이던, 그래서 숨이 턱턱 막히던 전셋집과는 달랐다. 전망이 어찌나 좋고 햇볕도 잘 들든지, 꼭 하루가 25시간으로 길어진 듯 햇볕이 아주 오래오래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눈이 내린 날 베란다에서 바라보면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져 있었고 아침 공기는 또 어찌나 상쾌하든지. 그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던 송년의 밤, 노란 불빛 아래 올망졸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아이들과 남편이 까르르거리며 뒹굴고 있었다. 베란다 너머 보이는 바깥세상의 풍경은 반짝이는 불빛들과 폭죽 소리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또 한 해가 지나간다며 아쉬워도 하고, 새해에는 더 잘 살아보겠다 다짐을 하기도 하며 흥청거리고 있었다. 한데 나는 행복하면서도 괜히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이 아름다운 순간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하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신혼 시절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면회를 갔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는 “달래야! 나는 이제 우짜꼬, 우짜꼬…” 하며 울고 계셨다. 더 살고 싶어도, 일어나 걷고 싶어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도 다시는 그리될 수 없는 그 절망감, 막막함, 두려움, 그 순간 모른 척 꼭꼭 덮어 두었던 나의 미래를 그만 보고 말았다. 많은 것들이 이루어진 순간에도 또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 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 장면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답고 또 슬프기도 한 생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또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그전에도 나는 항상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 왔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잘해서 더 나은 대학에 가기를 바랐고, 대학 시절에는 교사가 되고 싶었고 그 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한집에 살고 싶었다. TV에서 수없이 보아온 것처럼 아들딸 낳고 평수 넓은 집에서 풍요롭게 살기를 바랐다. 마치 화성에라도 가는 것처럼 난생처음 온 가족의 바람이던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그렇게 내가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면 뭔가 다른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던 것일까? 이룬 순간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또 다른 바람이 생겼으므로.

이제 내 나이 사십 대 중반, 나는 더 이상 새로운 바람을 갖고 싶지 않다. 살아오면서 가졌던 그 수많은 바람들을 이루느라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잃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얼른 자라서 몸이 좀 편해지기를 바라느라 내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를 놓쳐버렸다. 좀 더 넓은 집과 돈 많이 버는 남편을 바라느라 세 아이 아빠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 버렸다. 공부 잘하는 자식을 바라느라 내 아이의 싱그러워야 할 사춘기 시절에서 생기와 자신감을 빼앗아 버렸다. 왜 그것이 이제야 보이는지.

이제 마음수련을 하며 바람조차 버리며 살려 한다. 바람이 욕심이 되어 소중하고 감사함으로 반짝이는 삶의 순간을 가려 버리지 않도록. 이제 남은 생의 나날들에는 지나간 나날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리라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모용수 작. <외출>

캔버스 위에 오일. 41×53cm. 2008.

바람조차 내려놓을 때 찾아온 행복

송수란 48세. 주부. 러시아 모스크바 거주

20년의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으면서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혼 초부터 이혼 시까지 전남편의 외도는 가정불화가 되었다. 20년을 살며 너무 많이 참아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에 마비가 와서 더 이상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때 이혼을 했기에 난 감히 고개를 떳떳이 들고 다녔다. 이혼을 하고도 난 억울하다 했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 이런 일을 당했나 하면서 지난 세월과 전남편을 원망하면서 살았다.

이혼 후 힘든 몸과 마음으로 씨름하고 있을 때 착실하고 성실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모스크바로 왔다. 외도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참을 수 있다! 다짐하고 시작했지만, 매일 직장에서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하루 종일 혼자 집 안에서 기다려야 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모스크바 생활도 점차 힘들어지고 향수병까지 왔다. 너무 힘들 땐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나왔지만, 몸과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고 나니 욕망과 욕심이 조금씩 올라왔다. 자연히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스스로 혀를 찼다. 벽에 ‘처음처럼’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써 붙여가면서까지 처음 올 때의 바람 없는 마음으로 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모스크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기를 일년 정도 하고 나니 우울증이 왔다. 좋은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갑갑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힘들어하다니, 이 마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

그러다 마음수련을 하고서야 알았다. 끝도 없이 바라는 한 인간의 마음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나만을 위해 시간을 같이 해달라 바라는 마음을 버리니 남편도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수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착실한 남편과도 힘들어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수련을 하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모용수 작. <사랑합니다>

캔버스 위에 오일. 105×105cm. 2010.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모든 게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사랑과 부부에 대한 도리를 담보로 엄청난 집착을 하고 살았다는 것을…. 주변에서 우려하는 결혼을 하였기에 남 보란 듯이 잘 살아야 된다는 자존심까지 더했었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사랑의 가면을 쓴 채 똘똘 뭉쳐 있었던 나의 집착이 보였다. 항상 내 입장에서 상대를 보았고 당연히 상대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 계속 반복되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해주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도 다 나를 위한 것이었지 진정 상대를 위해 아무런 보상이나 바람 없이 해준 적이 없었다.

바라는 마음은 기대를 하게 되고 그만큼 욕심을 갖게 한다. 작은 바람이 이루어져도 또 다른 바람이 생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화가 난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할 때만이 진실된 행이 되고 그 행이야말로 복이라는 사실을….

작든 크든 갈등 없는 부부는 드문 것 같다. 그 갈등이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이 된 것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바라는 마음은 다 내려놓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살 때 항상 건강한 가정이 될 것이다. 마음수련은 내가 잘 살도록 해주는 등대 빛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톰 케이스 (Tom Kayes, 김한국)

29세. 그래픽 디자이너. 미국 오하이오주 샤론빌 거주

제 이름은 톰 케이스, 한국 이름은 김한국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서울시 동작구에서 1982년 1월 5일에 태어났습니다. 제 입양 서류에 따르면 상도동 지역 이씨 성을 가진 분의 집 앞에 버려졌을 때 생후 18개월의 아기였다고 합니다. 당시 저는 담요에 단단하게 싸여져 있었고 옆에 놓인 가방에는 여분의 옷과 백일 사진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 뒤에 저의 생년월일과 김한국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요. 이후 저는 장애가 있는 고아들을 돌봐주는 암사재활원에서 생활했습니다. 출생 시 제 등뼈가 완전히 발달해 있지 않아 일부 밖으로 드러난 척추 뼈 때문에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세 살 때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사는 케이스씨 가족이 저를 입양하였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입양한 마지막 아이였지만 7명의 동생과 11명의 손위 형제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3명의 친자식을 가진 후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16명의 아이들을 입양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가정에 입양되었지만 저는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 십 대를 보냈습니다. 자주 싸웠고, 집에서도 말썽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그것으로 대학에 가고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해 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저는 불행했습니다. 거의 웃지 않았고 만일 웃는 경우가 있어도 그건 행복해서 웃는 건 아니었습니다.

2007년 처음으로 한국을 2주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제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긴 역사와 풍습과 문화가 있는 나라였고 그러한 것들은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너무 멋진 여행이었고 제 인생에 있어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기였을 때 머물렀던 고아원 방문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아주 심각한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는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방문 4일째 되는 날은 제가 버려졌던 상도동 집에도 갈 수 있었습니다. 25년이 지난 당시에도 그 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만 이선생님은 2년 전에 이사를 가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저는 이선생님을 만나 뵙고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모용수 작. <나들이>

캔버스 위에 오일.

117.5×176cm. 2010.

미국으로 돌아온 후 저는 매일매일 한국을 그리워하였습니다. 한국의 입양 기관에게,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해주셨던 모든 것과 그곳의 아이들에게 베풀어주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의 선물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 달여의 기간 동안 매일 밤 한국에서 찍어온 3천여 장의 사진들을 가지고 모자이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만들면서 아이들의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장애를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항상 웃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왜 나는 저렇게 행복해할 수 없는가. 가족, 친구 그리고 좋아하는 일까지 있는데 말입니다.

2008년 봄,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암사재활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그곳을 찾았습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오기도 하고, 경찰서에서 근무한다는 다섯 명의 청년은 일주일 휴가를 그곳에서 보내기도 하더군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저는 암사재활원에 있는 아이들을 돕고자 웹사이트를 개설해 저의 작품들을 판매해 보았습니다. 이 웹사이트는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아주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지금까지 거의 1만 달러를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바람이라면 한국의 모든 장애 아동들이 한국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한국의 가정들이 가족이 없는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에 마음을 더 열기를 희망합니다.

친부모께서 안녕하시기를, 저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훌륭한 가족이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저를 데려다 놓으셨고 생년월일과 이름을 남겨놓아 제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한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진정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제가 태어났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www.MyWishForYo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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