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잠시 멈춰 서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잊지 못할 소학교 2학년 때의 실수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잊음이 헤퍼지는 것을 스스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의 일도 잘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이렇게 망각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득히 머언 60년 전의 한 가지 일이 별스럽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아마도 그때 그 일이 나의 여린 가슴에 너무나 큰 자극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다른 애들보다 한 살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함께 놀던 소꿉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가니 나도 가겠다고 떼를 썼다. 일곱 살인 것을 여덟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 붙은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바람이 거센 날과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학교 대문 앞까지 업어다 주시었다.

그런 철부지가 2학년에 올라간 여덟 살 때 선생님을 크게 노엽히는 일을 저지를 줄이야. 그때의 1교시는 조선어 시간이었는데 언제나 수업 전에 먼저 소고(小考)라는 작은 시험을 치러야 했다. 전날에 배운 것을 어느 만큼 아는가를 검사하는 시험인데 그날도 금자라고 부르는 처녀 선생님이 연필과 32절지 종이 한 장 준비하고 책가방은 책상 옆 교실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하시었다. 그것은 교과서나 필기장을 보고 쓰는 부정행위(컨닝)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반급에서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은 나의 자리는 왼쪽으로 첫 번째 줄 제일 앞자리였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하고 나서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책가방을 나의 앞쪽 교실 구석에다 슬쩍 밀어놓았다. 그것으로 하여 그날 선생님은 대노하였고 나는 체벌을 받아야 했다. 책상 옆 교실 바닥에다 놓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선생님을 노엽혔던 것이다.

선생님은 죄꼬만 것이 돼먹지 못한 행실을 한다고 교단에서 내려오시더니 식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분필 꽁다리로 나의 이마를 아프게 문대놓고 또 귀를 잡아 비틀어놓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분부대로 책가방을 가져다 제자리에 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아픈 것보다 억울해서 울었다. 원래는 “선생님, 전 훔쳐보지 않고서도 100점을 맞을 수 있습니다”라는 뜻으로 한 일인데 그만 선생님을 괄시하는 무례한 짓으로 되었던 것이다. 품성이 좋고 행실이 단정하다고 칭찬받던 내가 그만 딴짓을 하여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100점을 장담하던 그날 시험은 빵점이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나는 금자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이로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학기에 금자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교로 전근하였다고 했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선생님이 전근한 것을 은근히 좋아하였다. 만약 지금 이 세상에 금자 선생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팔십 중반에 오른 파파 할머니로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소학교 2학년 때 저지른 큰 실수였다. 내가 오늘까지 그날의 잘못을 잊지 못하는 것은 철없는 여덟 살 적에 받은 체벌이 억울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한 번의 실수가 훗날 내가 성장하는 길에서 삶의 도리 하나를 깨우치는 경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철학 개념으로 풀이하면 동기와 결과의 관계로서 아무리 좋은 동기도 결과가 나쁘면 나쁜 것으로 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주관 욕망이라 해도 그 행위 표현에 따라 상대방에게 엄청난 오해와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넘어지며 일어서며 살아온 인생길에서 내가 범한 실수가 어찌 한두 가지일까만 그중에서도 내내 잊지 못하는 어릴 적 실수는 오늘도 단순하고 유치했던 동년을 꼬집으면서 나더러 매사에 신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수란 조금만 조심하지 않거나 주의하지 않으면 생기는 잘못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성장 과정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실수라는 것이 도꼬마리처럼 붙어 다닌다.

이 말은 결코 실수의 정당성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실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하여 실수를 자랑거리로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실수란 많이 하기보다 적게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실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은 실수를 하고도 교훈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실수를 하고 교훈을 찾을 줄 안다면 실수를 적게 하면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해보는 말이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헬리코와 얼음산>
26×48cm. 종이에 오일. 1989.

그때 그 말은 큰 실수였다

정순옥 50세. 과외 교사.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

정우를 처음 만난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시작한 과외는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아이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엄마들의 입소문을 타서 실력 있는 과외 선생님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찾아왔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온 정우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과외를 택한 것도 손자를 염려한 할머니의 결정이었고 아이는 마지못해 따라온 것이었다.

“선상님, 우리 정우 잘 좀 가르쳐주셔요. 얘가 천방지축 놀기만 하지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구먼요. 듣자 허니 영식이가 여기서 공부한다믄서요? 암쪼록 그렇게만 해주셔유.”

사실 공부라는 게 하루아침에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과외를 한다고 무조건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영식이는 반에서 1등만 하는 아이인데. 솔직히 정우 같은 아이를 받았다가 기존의 아이들까지 괜히 빠지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도 됐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정우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정우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어 혼자, 맨 마지막 시간에 가르치게 됐다. 그렇게 가르치면서 정우의 사정을 알아갔다. 엄마는 안 계셔서 대신 할머니가 키워주고, 아빠는 집 짓는 데서 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우는 항상 자신의 환경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빠는 벽돌도 나르고, 무거운 쇳덩어리도 옮긴대요. 그래서 우리 아빠는 힘이 무척 세요.”

거리낌 없는 정우의 말에 나는 애틋한 마음이 생겨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언젠가부터 정우를 다른 아이들보다는 만만한 아이로,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은연중 차별을 두고 대하게 됐다. 게다가 정우 역시 자신은 꼴찌라는 사실에 그런 나의 차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또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과외 시간의 마지막이다 보니 기운이 달릴 때도 있어 가끔은 숙제 검사만 하는 것으로 수업을 끝내기도 하고,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자로 손바닥을 치고, 한 번쯤은 거리낌 없는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럴 때면 정우는 시무룩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타나곤 했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너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집 짓는 데서 벽돌 나르는 일 할래? 그보다는 집을 지으라고 시키는 일을 해야지.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겉으로는 정우에게 공부에 대한 동기를 찾아준다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중에야 그 말이 엄청난 실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은연 중 나는 정우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아빠에 대한 자부심도 조금씩 허물어지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우는 공부에 재미를 갖게 돼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더니 중학생 때는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했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내게 오지 않았다.

그 후 간혹 정우를 떠올릴 때면 한없이 미안해지곤 했다. 정우는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차별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또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훨씬 더 잘 자라난 정우는 아이들을 가정환경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정우에게 그렇게 말한 이후 한 번도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작년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연히 정우를 만났다. 처음에는 건장한 체격의 낯선 청년이 먼저 인사를 건네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정우였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길가의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정우는 대학교에 다니다 작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지금은 휴가를 나왔단다.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초등학생 정우와 맑은 웃음을 짓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우에게 미안하고 할머니께 죄송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좋다. 그리고 정우야, 아버지 말이야.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너를 이렇게 반듯하게 키워주셨잖니? 그러니까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혹시나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이 상처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렇게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나는 미안함을 그렇게 내비쳤다.

“그럼요. 아빠는 저에게 영원한 아빠예요. 예전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힘이 세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저에게 공부에 대한 재미를 갖게 해주셨거든요. 언제나 건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정우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십수 년 묵혔던 미안함을 그제야 풀었다. 정우의 손이 거인의 손처럼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듯한 든든함으로.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피에로가 된 자파>
31.5×24cm. 종이에 오일. 1996.

초보 가위손 시절의 실수들

장미숙 50세. 주부. 서울시 송파구 송파대로8길

머리를 자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앞머리가 많이 자라 있었다. 가보처럼 소중하게 모셔둔 가위들을 꺼내 살짝 다듬었더니 금방 눈앞이 시원해졌다. 가위를 치우려고 하는데 아들 녀석의 덥수룩한 뒷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다듬어준다고 하자 아들은 영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이발 기계로 지저분한 뒷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아들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이발 기계에 머리카락이 몇 올 뜯겼던 것이다. 가위는 괜찮은데 이발 기계는 그동안 묵혀둔 탓인지 영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다시 가위와 이발 기계를 닦아서 서랍 속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다. 비록 앞으로 쓸 일이 없더라도 버리고 싶지 않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나는 미용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스물여섯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기술을 익혔고, 수습 기간을 거쳐 어엿한 미용사가 되었는데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저지른 잊을 수 없는 엽기적인 실수들은 지금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내가 처음 취직한 미용실은 여대 근처에 있던 제법 큰 미용실이었다. 그곳의 주인이면서 제일 실력이 좋았던 미용사는 나보다 어린 남자였다.

초보 시절에는 가위를 드는 것보다 허드렛일을 더 많이 했다. 청소, 손님 머리 마사지며 머리를 감기는 일, 미용 기구를 정리하고 약을 바르는 일 등등. 그러다 보니 손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고 만져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미용사가 나에게 어떤 남자분의 커트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단골손님이었는데 성격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위와 빗을 잡고 그분 곁에 서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애써 태연한 척 머리를 잘라나갔다. 거울 속의 손님 눈과 마주치면 더 떨릴 것 같아 외면했다. 손님도 내가 초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발 기계로 밑머리를 밀고, 가위로 쳐올려가며 마지막 마무리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커트를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가위가 두 개 필요하다. 하나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 사용하고, 하나는 틴닝 가위라고 숱이 많은 부분을 가볍게 해주고, 끝부분은 자연스럽게 골라주는 마무리용 가위이다. 그래도 바짝 긴장하며 조심했던 덕분에 대충 머리 모양이 나온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적이 안심을 했다. 그리고는 뒷마무리를 하기 위해 숱이 많은 뒷머리에 가위를 넣어 싹둑 잘랐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확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가위를 빼자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아닌가. 틴닝 가위로 숱을 골라야 할 부분을 그만 잘 드는 커트 가위로 한 움큼이나 잘라내 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손님 뒷머리에 웅덩이가 움푹 생겨버리고 말았으니….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어찌할 줄 몰라 괜히 뒷머리를 다듬는 척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미용사가 아직 멀었느냐면서 다가왔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미용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님, 우리 직원이 처음이라 실수를 했네요. 제가 다시 손질을 해드리겠지만 뒷부분이 약간 짧아질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무료로 해드릴 테니 이해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얼굴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일이 다 끝나고 난 뒤 나는 남자 미용사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그 뒤로는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용사가 되고 난 뒤 그보다 더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아니, 그건 실수라기보다는 한눈을 팔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여고생 커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뒤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자꾸 말을 시키는 것이었다. 잠시 뒤를 돌아보며 손님 말을 거들었는데 “아얏!”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여고생의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다 가위로 귀를 살짝 건드렸던 것이다. 다행히 여고생은 단골손님인 데다 상처가 작아서 쉽게 마무리되었지만, 내 생애 가장 엽기적인 실수를 한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고데기로 머리카락을 태워버린 일이며 자잘한 실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실수도 많이 하면 실력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덕분에 나의 미용 실력도 점점 늘어났다. 지금도 그때 그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사하다.

어렵게 배웠던 미용 기술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되었다. 그러나 가위를 볼 때마다 그때 일들이 생각나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된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내 이름은 스윗하트>
21×18.5cm. 종이에 아크릴. 2008.

월간 마음수련 6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 앙드레 단(André Dahan, 1935~)입니다. 그의 동화책 <안녕, 꼬마 물고기> <피에로가 된 자파> <내 친구 달>은 프랑스 옥토곤상(1991), 앙굴렘 국제만화 대상 등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슬로바키아, 일본 등지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고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등에 꾸준히 초청되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그의 작품은 인종과 천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전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앙드레 단의 한국 첫 개인전 <My Dear Friends- 앙드레 단 특별전>이 롯데갤러리에서 열립니다(4.30~5.23). 초창기 원화부터 앙드레 단의 도서 49권의 대표 원화, 판화 100여 점이 전시되며, 전시 진행은 앙드레 단이 평생 즐겨 썼던 친구(사랑), 달, 별, 해, 꿈, 성장이라는 소재들로 구성됩니다. 자료 제공 롯데갤러리 02-726-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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