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정래

문학을 통해 잊혀져가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려온 한국 문학의 거장 조정래(71) 작가.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역사의 현장 속에 있는 듯 수많은 인물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들이 펼치는 삶의 희로애락에 함께 울고 웃으며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들을 기억하게 된다. 독자들로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보람 있다는 소설가 조정래. 그가 이번엔 중국 땅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상사원들의 이야기 <정글만리>로 돌아왔다. 칠순의 나이에도 오직 ‘노력’이란 말을 금과옥조처럼 삼는다는 대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조정래 작가는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거울 비추듯 글로 써내려왔다. 아름답든 혹은 추하든 꼭 봐야 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통해 우리 민족의 애환을 구성지게 때론 구슬프게 전해주었던 소설가 조정래. 그가 지난해 중국을 소재로 한 신작 <정글만리>를 발표했다. 중국 땅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를 격려하듯 경제 불황으로 지친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전해졌고, 이내 100만 부 이상이 팔리며 화제가 되었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메울 때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다가도, 촌철살인의 말을 건넬 때면 매의 눈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조정래 작가. 작가의 혜안은 늘 그렇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세상과 마주하게 했다.

<정글만리>를 읽고 나면 중국을 다시 보게 된다고들 말합니다.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요?

중국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데 정작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짝퉁 천국이다, 게으르다, 더럽다… 그런 편견도 있고. 하지만 그건 중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예요. 14억의 중국은 지금 세계 소비 시장으로 바뀌고 있어요. 중국의 중대함을 빨리 자각할수록 우리한테 이익이다, 우리가 가진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고, 그들과 올바른 친교를 해서 제2의 경제 도약을 중국에서 이루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20, 30대 젊은 층이 많이 읽어서 앞으로 우리 미래를 준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미 20년 전에 구상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의 변화를 예상하신 건가요?

1990년이에요. 소설 <아리랑>을 쓰기 위해 취재차 중국에 있었는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왜 사회주의 소련은 몰락했는데 중국은 건재한 것인가?’ 그것은 저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지식인들,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질문이었어요. 소련은 달걀 하나를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는 반면, 중국은 쌀은 물론 가게마다 샴푸 등 생필품도 넘쳐났거든요. 하지만 며칠간의 취재를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14억 인구의 배고픔을 해결했어요. 그때 중국의 엄청난 힘을 직감했죠.


예상은 적중했다. 2010년 그는 중국이 G2(세계 경제 2위)가 되던 시점에 맞춰,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 20년간 고시 공부하듯 모은 중국에 관련한 자료 스크랩만 90여 권, 16번 중국 방문을 하면서 모은 취재 수첩만도 20여 권에 이른다. 그래서일까. <정글만리>를 보면 중국의 경제, 문화, 역사, 기질 등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소설 속의 인물 중 액세서리 사업을 하는 하경만이란 인물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실존 인물인가요?

네. 하경만은 사실 중요한 인물이에요.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하사장처럼만 하면 중국에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중국에서 표창장, 감사장도 줄 정도니까. 원래 이름은 하덕만인데 지금도 거기 있어요. 그 사람 이야기 중 80%는 있는 그대로예요. 매출액의 일정 부분을 중국 사람을 위해 쓰고, 공장이 있는 마을의 노인들까지 극진히 모시니까 동네 사람들, 영감님들이 다 그 공장을 지켜줘요. 경제인들이 잘 새겼으면 좋겠어요.

<정글만리>의 인기에 대해 혹자들은 조정래 작가가, 경제 도약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준다는 점이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간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정래 하면 우리의 험난했던 역사를 가장 날카로운 필체로 써내려간 대표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1943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인 시조 시인 조종현 선생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여왔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고뇌하던 문학청년에게 비추어진 우리나라는 분단으로 인해 역사는 왜곡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역사의 진실을 쓰겠노라 다짐한다. 하지만 수많은 장벽에 부딪쳐야 했다. 서슬 퍼런 분단국가에서 법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글을 쓰다 보니 작품의 완성도가 낮았던 것. 이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는 결단을 내린다.
‘이 땅의 작가로서 험난한 역사의 아픔과 질곡을 알면서도 소설을 안 쓴다면 비겁이다. 내가 태어나서 후회 없이 눈을 감으려면 최소한 이 세 이야기는 써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소설이 바로 장편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원고 기둥 옆에서
첫 손자 재면이와 함께. 저자 제공.

당시 분단으로 인한 우리나라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나요?

가령, 일본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겼다고 하는 청산리 전투. 우리는 김좌진만 쓰고, 북한에선 홍범도만 써요. 그걸 역사학자들은 모르냐, 다 알아요. 근데 얘기하면 불리하니까 피하는 거지. 그러다 내가 <아리랑>에서 협공했다고 쓰니까 그다음부터 역사 연구자들도 그렇게 쓰는 거예요. 그때는 남북한이 서로 다른 이념 때문에 원수가 되면서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역사 기록을 삭제하고 그랬으니까. 심지어 서로 인간이 아니다, 악마라고 가르쳤잖아요. 그래서는 통일이 영원히 안 되죠. 제가 태백산맥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란 걸 인정하자는 거예요. 태백산맥을 보면 남로당 간부 정하섭이 소화와 연애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들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 결국, 문학을 통해 악마라고 생각한 대상이 사람으로 바뀌는 거죠.

한때는 유서를 써놓고 글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쓴 채 글을 쓰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요?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말이 있죠.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앞서간 사람들이 있어요. 김구, 신채호, 한용운, 윤동주까지 수없이 많잖아요. 그때보다 지금 상황은 훨씬 나은데 못 하는 게 말이 되는가 하고 결심한 거죠. 문학은 진실만을 쓴다, 문학은 인간다운 삶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가는 거예요. 당시 집사람에게 내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견딜 수 있겠느냐고 확답도 받았어요. 그만큼 각오를 하고 가는 거죠.

1983년 태백산맥 집필 이후, 그는 10여 년간 수많은 공갈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뒤 2005년 5월, 11년 1개월 만에 무혐의 판정을 받게 된다.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근거자료들은 태백산맥에 수록된 사실이 진실임을 입증했고, ‘이미 350만 부 이상 팔린 책’이라는 점도 주요했다. 수많은 독자들은 위기에 처한 작가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독자의 힘을 실감했던 당시가 작가로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럼요. 최고로 복된 작가지. 더군다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까지 총 32권을 다 읽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아껴가며 읽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가보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겠다” 이런 말들을 들을 때면 작가로서 사는 보람을 느껴요. 세계의 문학관이 수없이 많아도 독자들이 필사한 원고를 전시한 문학관은 태백산맥 문학관밖에 없어요. 열 권짜리 책을 원고지에다 손으로 일일이 베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렇게 독자들한테 사랑을 받으니 작가로서 큰 보람이고 고맙죠.(웃음)

<태백산맥> 16,500장, <아리랑> 20,000장, <한강> 15,000장. 무려 51,500장의 원고. 20년간 글감옥에서 1,200명의 인물을 낳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지어주며, 먹여 살리고 키우느라 세월은 흘러 마흔에 시작한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는 나이 예순이 되어 끝을 맺게 된다.
그는 글쓰기에 대해 ‘황홀한 글감옥’이라 비유한다. 분명 과정은 고통스러우나 원하는 대로 성취되는 순간의 황홀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온몸이 조각조각 깨지고 가루가 돼서, 땅속으로 들어가거나 어디로 흩어져버리는 듯한 고통을 수백 번씩 겪어도 할 이야기는 꼭 쓰게 된다”는 그이다.

조정래 작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아내 시인 김초혜씨다. 아내 역시 연작시 <사랑굿>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동국대 국문과 동기로 만나 47년을 한결같은 부부애로 살아왔다. “힘든 상황에서 나를 지켜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그는 “김초혜는 나에게 날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다”라며 예찬한다.

평균 하루에 16시간씩 집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일해요. 평균 8시간 일하면서 지친 영혼들을 흔들어 감동케 하려면 그들의 두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내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에요. 그래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쓸 때 하루에 16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술도 안 마셨어요. 더구나 현대인들 머릿속엔 영화 들어 있지, 드라마 들어 있지, 스마트폰까지 있잖아요. 그들에게 이거 참 좋은 소설이야, 읽어봐, 하려면 작가도 그만큼 노력해야죠. 글을 쓰다 보면 긴장감 때문에 하루에 3~4시간밖에 못 자요. 자면서도 쓴다는 말이 그 말인데, 명료하게 떠올라서 뇌가 쉬지를 못하죠. 그러니 자기 관리도 잘해야 해서 저는 소식, 채식, 맨손체조를 해요. 젊었을 때는 하루에 맨손체조 3~4번이면 풀렸는데 이번엔 매수를 35매에서 25매로 줄였는데도 두어 시간 지나면 허리 아프고 옆구리가 당기고 그래서 하루에 7~8번 심할 땐 열 번도 했어요. 체조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구상을 하니까 소설은 계속 쓰여지고 있는 거죠.

선생님은 따로 구상노트가 없다면서요? 그 얘기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웃음) 몰두하지 않아서 그렇지 치열하게 하면 다 돼요. 그걸 보여주는 게 SBS <생활의 달인>이야. 제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인데 그걸 보면 한 가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전부 감동이에요. 인간의 존엄, 인간의 발견,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재 이유를 그렇게 극명하게 보여줄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들은 한 가지씩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고, 이 세상의 모든 직업은 숭엄하다는 걸 보여주잖아요. 세차하는 사람, 신문 배달하는 사람… 그중 하나가 소설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다만, 그들은 감동을 지속적으로 주지 못하지만, 작가는 글을 통해서 오랜 세월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내 소설 절반은 아내가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하셨는데요, 선생님의 문학 인생에서 김초혜 선생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집사람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독자고, 내가 쓴 소설의 최초 독자고, 열독자고, 내 작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조언자고…. 그 역할이 수없이 많아요. 집사람은 나한테 정말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예요. 좋은 작품이 되도록 나와 비슷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김초혜 선생이 지적한 걸 전부 다 고쳐요. 객관적으로 맞거든. 집사람도 시인이다 보니 시를 쓰고 나면 반드시 읽어보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여보 이거 이상한데 말이야…” 해도 절대 안 고쳐. 이유는 분명해요. “시는 소설보다 더 윗질인 고급 문학이다” 이거지(웃음). 그 말이 맞아요. 나도 시 쓰다가 안돼서 소설 쓴 거니까.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죽어 다시 태어나도 김초혜 선생과 결혼하겠다고 한단 말이야, 이 바보가.(웃음)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노력해라’입니다. 나 역시 작가로서 내 재능을 믿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내 노력만 믿어요. 사람들은 노력해라 하면 지겨워해요, 흔한 말이고. 근데 가장 중요한 거예요. 천재라고 이름 남긴 사람은 전부 철저하게 노력한 사람들이에요. 작가들도 될 때보다 안될 때가 더 많아요. 안되면 99%가 돌아앉아 술 마시고 여행하는데, 전 한 번도 안 그랬어요. 한 번도. 안될수록 더 책상 앞에 다가앉았어요. 결국 자기가 하는 거예요. 손자들한테도 그래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죽음이 보일 때까지 해라, 그러면 안 될 일이 없다”고.

우리 시대 어른으로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으면서도, 아직도 주변에서 노력하는 사람을 보며 삶의 자세를 배운다는 조정래 작가. 때문인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노력해라’라는 그 흔한 말조차도 전율처럼 다가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왔기에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훗날 “우리 민족을 가장 사랑한 작가”로 기억되길 바란다는 소설가 조정래. 그는 그렇게 사랑하는 만큼 세상을 그리고, 역사를 말하고, 인간을 바라보았으며,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해주었다. 그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조정래 작가는 1943년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대표작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1천 3백만 부 돌파라는 한국 출판 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했으며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단재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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